150
인사가 오간 뒤에도 아르투르와 굴리엘모는 서로를 한동안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정말로 상대를 싫어했다. 인연을 회고해보자면 당연한 일이리라. 둘의 만남은 아르투르가 두라노의 독재관으로 있던 시절에 있었다.
굴리엘모는 피오레 가문의 후계자로서 참주정 시절의 빚을 요구하러 왔고, 아르투르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피오레 가문은 정권을 잃었고, 굴리엘모는 포로로 잡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한 것은 물론,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내놓아야했다.
그러니 굴리엘모에겐 아르투르를 싫어할 이유가 아주 많았던 것이다. 아르투르 역시 굴리엘모를 소인배 취급하며 멀리 했다. 두 사람은 타고난 성향과 교육이 완전히 달랐으니, 존중할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소인배 자식이랑 함께 하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데.’
아르투르는 여전히 표정관리라곤 할 줄 몰랐기에, 노골적인 경멸이 담긴 시선을 굴리엘모에게 보냈다. 반면 굴리엘모는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끓고 있었다. 경멸을 넘은 증오였다.
‘이런 무식한 놈 때문에 내 미래가 망가지다니, 두고 보자.’
하지만 두 사람 앞에 놓인 현실의 문제는 막중했고, 사적인 감정 때문에 이토록 중대한 일을 놓칠 순 없었다. 아타나시우스를 어떻게 처리하고, 도시를 되찾을 지 논의해야했다. 결국 두 사람은 약간의 대화를 나눈 후,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우선 굴리엘모는 아르투르의 교황 특사로서의 위신을 인정했고, 아르투르는 현재 상업 지구를 이끄는 건 피오레 가문이 맞으며, 그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기로 약속했다.
“상황부터 알려주게. 식량 상황이 나쁘다고 들었네만.”
“들으신 대로입니다. 항구 지역에만 거의 십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습니다. 거주 인구의 세 배지요. 식량, 무기, 물… 모든 물자가 부족합니다. 지금 시내에 남은 시민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해로를 통해 도시로 유입되던 모든 물류가 멈추었으니까요. 어서 해결하지 않으면 도시에 기근이 닥칠 겁니다.”
사태 초기에 피오렌치아를 떠난 자들이 차라리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선동할 능력만 뛰어났을 뿐, 대도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고도의 행정 능력과 기술적 지식은 전무 했다. 그런 고급 인력들은 미치광이 수도사를 피해서 이곳으로 피난을 와 있었고 말이다. 상수도가 막혀 사방에서 오물 냄새가 풍겨오는 것이 그 징조였다.
“그래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겠나?”
굴리엘모가 진지하게 상황 설명에 임하는 모습을 본 아르투르는 경멸하는 표정을 숨겼다.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했다.
“이번 주면 식량이 모두 떨어질 겁니다. 자금이라도 있다면 모를까요. 식량이 떨어지면 다들 아타나시우스에게 항복하러 가거나, 자신들끼리 싸우겠지요.”
고개를 갸웃하는 아르투르.
“심각한 상황인건 알겠군. 그런데, 자금이 있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황금을 뜯어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돈이라면 피오레 가문이 서부 대륙 제일 일 텐데?”
굴리엘모는 다시 가식적인 미소로 한껏 얼굴을 포장했다. 속으로는 자신을 욕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냐, 병신 새끼야. 그 정도?
“설명해드리지요. 피오렌치아는 서부 대륙 최대의 대도시입니다. 이런 거대 도시는 오직 물류의 연결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지요. 특히 식량과 물이 주가 됩니다. 육로는 해로에 비해 운송량이 택도 없이 적으니, 결국 해운이 중심이 됩니다. 때문에, 저희는 매 분기마다 도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도록 세계 각지와 계약을 맺어두었습니다. 지금도 타르수스에서 온 곡물 수송선들이 부두에 한 가득 있습니다. 자금이라면 시내의 황금백조 은행에 있지요. 그곳에서 안전하게 황금을 빼내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아실 테고요.”
아르투르는 조금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부두로 가서 신용 거래를 하건, 친분에 호소하건 하면 되는 일 아닌가? 한두 해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닐 텐데. 도움을 요청해보게.”
굴리엘모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는 건 즐거웠다. 아마 자신이 평생 칼질만 하고 자라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 할 테지.
“동방 사람들은 반드시 실물 거래만을 고집합니다. 신용 거래는 절대 믿지 않고, 공과 사는 철저하게 분리하죠. 부모에게도 외상은 주지 않는 게 동방인들 입니다. 그러니 담보 없이 물건을 달라고 할 수가 없지요.”
혀를 차는 아르투르.
“신의 없는 자들이군.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 목숨이 걸렸으면 움직여야지. 아무튼 물건이 있다니 다행이군. 내가 직접 만나보겠네.”
굴리엘모의 표정은 의구심으로 물들어갔다.
“설마 뺏으실겁니까?”
“혹시 그렇다면? 문제라도?”
여태껏 연기를 하던 굴리엘모의 표정이 번득 눈에 뜨였다.
“절대 안됩니다! 피오렌치아의 국제적 명성을 돌이킬 수 없게 훼손시킬 겁니까? 무역항으로서 끝이 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 혼란이 진정 되어도 피오렌치아엔 미래가 없습니다. 공의 명성에도 상인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흠이 갈 테고요!”
피식 웃는 아르투르.
“뺏을 생각은 아직 없네. 나는 강도 기사는 아니거든. 하지만 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으면 선택할 여지는 있지. 옳다고 믿는 일을 하는데 비난이 들어온다고 신경 쓰진 않겠네. 탐욕스러운 자들이 준 오명은 오히려 칭찬이지. 이 시국에 도시의 번영이 중요한가? 일단 다 살아남고 봐야지.”
하여간 상인들이란 자기들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족속들이었다. 놈들에겐 정말 정이 가지 않았다. 웃으면서 친구처럼 다가와선 거래가 끝나면 휙 떠나버리는 게 그들의 특징이었다. 신의 없는 자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알 바는 아니었다.
한편 굴리엘모는 절규에 가깝게 외쳤다.
“그렇게 간단히 해결 될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산 몰수는 안됩니다!”
“그건 교황 특사가 판단할 일이지. 굴리엘모. 그렇게 하기로 정했잖아.”
“…….”
“나도 그런 상황은 없길 바래. 사람들을 굶겨서 죽이는 것보단 낫다는 것 정도지, 나도 내키지 않아. 아, 이럴 시간 없으니 안내나 해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아르투르의 단호한 표정에, 굴리엘모는 깊은 한숨을 쉬고 결국 그를 부두로 데려다주었다. 이동 도중 만난 피오렌치아 인들은 모두 신경질적으로 날카롭게 굴거나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망했어… 우리의 악덕에 하늘이 죄를 내리신거야…”
“개소리 집어쳐! 그럴 거면 저 선동가 이야기나 들으러 가던가!”
몇몇 청년들은 아르투르를 보며 야유를 보내오기도 했다. 두라노에서의 전쟁이 끝난 지 고작 몇 달 뒤 일 뿐이니, 기억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들 뭐가 그리 대수이랴. 아르투르 역시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지금, 상업 지구의 분위기는 눅눅하고 우울했으며 모두가 빛나던 도시가 폭동과 내부 분쟁으로 거대한 똥통이 되어가는 것을 깊이 슬퍼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메트로폴리스를 처음 보아서 신이 난 힐데군드만 빼고 말이다.
“우와, 이 도시 엄청 큰 거 같다. 저 동쪽 바다도 대단해보이네. 저기가 동방으로 이어지는 대해 인가봐. 고향이랑 다르게 바람세기도 선선하고, 마음에 드는데?”
그녀는 관광이라도 온 것 마냥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 도시의 구조와 사람들을 살폈다.
“모든 북구인들을 합쳐도 여기 사는 사람들보다 적을지도 몰라. 그런 인구가 이런 한정된 땅에 모여서 산다고? 대단한데. 어떻게 이런 닭장 같은 도시에서 살 수 있는 거야?”
진심 어린 의아함이 담긴 힐데군드의 목소리에 아르투르가 답했다.
“일 년에 절반이 겨울이고 일주일에 한번 눈사태가 난다는 네 고향에서 사는 것보단 쉽지 않겠어? 어떻게든 다 적응하기 마련이지.”
“흐응. 그럴지도. 여기 녀석들, 보잘 것 없는 놈들도 살아남아서 형편없는 놈들이 많네. 키도 작고, 너무 마르거나 쪘고, 고생한 흔적도 안 보여. 남자고 여자고 약골만 가득하네. 고생한 흔적도 안 보여. 이곳 남자들보다 내가 더 힘이 세겠다.”
피식 웃는 아르투르.
“그런 기준이면 대부분의 기사들도 약골일거다.”
“네 말도 맞아! 문명인 남자들은 다 약하더라고. 여자들도 다를 거 없지. 스스로 무기를 배우긴 커녕 남편들 등 뒤에 숨기에 바쁘던데. 한심들 하기는.”
“아니지, 그게 아니야. 그냥 악마랑 같이 싸울 줄 아는 네가 너무 잘하는 거라고.”
“그건 그래. 내가 몸 잘 나긴했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고, 잠시 미묘한 기류가 흐른 뒤 다시 깔깔거렸다. 아르투르는 재차 웃었다. 이런 실없는 농담들이 중압감을 덜어주었다. 그 사이 부두에 도착하자, 그는 일찍이 본 적 없는 크기의 커다란 범선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도시를 떠났을 지금도 이렇게 큰 배들이 있는데, 무역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는 얼마나 발전했을 지 상상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굴리엘모는 그 중 가장 큰 배로 다가가, 앞을 지키고 있는 큰 체격, 까만 피부의 경비병들에게 동방의 언어로 말을 건넸다. 굴리엘모가 고압적인 목소리로 몇 번 말하지만,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의 어색한 사건들이 있던 뒤, 아르투르는 이 곡물선단의 함장이자 주인, 최대 주주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갑판을 올라가보니,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날랜 중년 사내가 고급스러운 터번을 비롯한 동방풍의 의류를 입고 서 있었다. 양 옆으로 기른 굉장히 인상적인 수염 역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그의 특징인 것 같았다.
“어서 오시오. 아르투르 공. 당신이 최고의 전사로 요즘 서방에서 날리는 사람이군. 딱 발걸음과 몸매만 보아도 범상치 않은 전사 같구려. 나는 지브릴의 아들 마라이카 셀 일이시리야타라고 하고, 내 아들 두 명을 우리의 군주인 타르칸의 근위대로 보냈소. 편히 마라이카라고 부르시오.”
동방인들은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종족들이었다. 그들은 이교도였지만 서부 대륙의 사람들 못지않게 문명이 발달했다는 점이 잘 알려져 있었다. 한때 아르투르는 말로만 듣던 동방인들을 보면 놀랄 거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용이나 악마에 비하면 인간 간의 문화 차이는 작고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만나서 반갑소. 마라이카. 나는 지금 교황 특사의 자격으로서 이 자리에 선 것임을 선언하겠소. 자, 말씀대로 식사부터 합시다.”
시중드는 노예들이 주인들이 앉을 수 있게 의자를 가져왔다. 두 사람은 중간에 책상을 둔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