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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검의 빛을 확인한 아르투르는 앞발을 내디디며 전방으로 성검을 크게 휘둘렀다. 어설픈 자세를 취하던 세 명의 병사가 단번에 허리춤이 잘려나갔다. 아르투르는 눈을 감아 가득 튀는 피가 눈에 들어가는 걸 피한 후, 곧장 왼손의 여명을 내뻗어 자리를 메운 적병의 목을 꿰뚫었다.
“컥, 컥!”
주저 없이 놈의 목에서 검을 뽑아낸 아르투르는 재차 성검을 크게 휘둘렀고, 이번에도 두 명이 쓰러졌다. 그 사이, 아르투르의 후방을 노리며 다가온 적들이 있었지만 힐데군드는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내며, 반격해서 쓰러뜨렸다.
“역시 신이 만든 칼이 좋긴 좋네. 나도 저런 거 한 자루만 있었으면 좋겠네. 어디서 났다고 했지?”
그녀는 전투 와중에도, 곁눈질로 번득이는 성검을 보며 부러운 시선을 내보냈다. 아무리 명검이라도 적들을 여럿 베다보면 뼈에 걸려 동작이 멈추거나 날이 상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빛나는 성검은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저, 베는 것을 피하지 못하면 죽을 뿐이었다.
“아버지 유품이야.”
두 사람은 등을 맞댄 채,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잇달아 쳐내고 반격하며 한 몸처럼 싸워나갔다. 순식간에 쓰러진 적들이 서른이 넘게 쌓이자, 광신도들조차 함부로 다가가지 못한 채 전열을 재정비했다.
“쳐라! 이 싸움에서 죽는 자에게는 천국이 기다리고 있노라!”
아타나시우스의 말에 병사들은 이를 질끈 물고 공격을 재개했다.
“신의 말씀에 천국이 있으리!”
아르투르는 한번 숨을 깊게 내뱉어 호흡을 가다듬고는 땀이 비 오듯이 흐르는 몸을 계속 움직였다. 적들이 긴 창으로 자신을 포위하고 창을 내찔렀지만 성검을 휘둘러 창대를 모조리 잘라내며, 앞으로 걸어 들어가서 여명을 얕게 베었다. 분명히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긴장감이 들지 않았다.
평소에 훈련하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오히려 그보다 쉬웠다. 날아드는 창칼들은 훈련 상대들보다 훨씬 느렸고, 기교도 모자랐다. 반면 흥분으로 끓어오른 자신의 몸은 훈련 때보다 더 격렬한 움직임들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두 합을 견뎌내는 적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세 합을 견뎌내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뭉쳐서 달려드는 것이 오히려 서로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냥 달려들어! 몸으로 놈이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라!”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죽음을 각오한 광신도들이 몸으로 부딪쳐서 아르투르의 행동을 봉쇄하려했다. 그렇지만 자신은 팔꿈치로 밀어내고, 발로 걷어차기만 해도 그들을 밀어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유리한 고지를 향해 움직이는 걸 잊지 않았다.
건물의 벽을 등지고 선 두 사람은 후방에 대한 걱정 없이 전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수십 개의 창칼이 또 다시 수십 번을 날아들었지만, 어느 일격도 치명타를 가하지 못한 채, 많은 이들이 쓰러져갈 뿐이었다.
“밀어붙여라! 깔아뭉개서 죽여!”
도저히 무기로는 상대가 되지 않자, 이번에는 수십 명이 스크럼을 짜서 함성을 지르며 동시에 달려들었다. 아예 힘으로 부딪쳐서 압사하게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선두의 몇 명은 벨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 전체를 쓰러뜨릴 순 없었을 테니까.
“흠. 위로 올라가지.”
“좋은 생각인데.”
두 사람은 펄쩍 뛰어서 달려오던 적병의 머리 위에 착지했다. 착지한 적이 쓰러지기 전, 그들은 적병들의 머리를 징검다리 삼아 연달아 뛰어서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적병들이 뒤를 돌아서려고 했지만 이미 육중한 스크럼을 짠 지라, 방향 전환을 하지 못한 채 건물의 벽에 부딪친 후, 충격으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휘유. 단순무식들하기는.”
아르투르는 웃음소리를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 명도 넘던 적병들의 반절 이상은 시체가 되어있었고, 덕분에 빈 공간이 제법 있었다. 군중들은 두려움이 담긴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이익! 나의 신도들이여, 어찌하여 저 악마들을 보고만 있느냐? 저 자들을 공격해 붙잡아오라니까! 아니, 죽여도 좋다! 죽여버려!”
아타나시우스의 말이 퍼져나갔지만 군중들은 여전히 주춤하고 있었다. 모두가 천국에 가고 싶어 했지만 죽고 싶은 이는 없었으니 말이다. 잠깐 사이, 아르투르는 상황에 대한 빠른 판단을 내렸다.
‘결국 저 사이비 예언자 놈을 쳐야한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가 소리치는 탑으로 가는 길은 빼곡히 군중으로 들어차서 막혀있었다. 힐데군드가 등 뒤만 지켜준다면 수백 명쯤은 죽이고도 남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종교적 광기에 휩싸인 수만 명이었다. 지금은 잠시 믿기지 않는 광경에 공포를 느끼고 있지만, 예언자의 말에 따라 목숨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움직인다면 두 명이 잘 싸운다고 어떻게 상대 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닌 것이다.
“힐데군드, 시간을 벌어봐.”
“그래? 시간은 얼마나 벌면 되는데?”
“죄수들을 구출하고 탈출로를 뚫을 때까지만.”
힐데군드는 황당한 표정을 드러냈다.
“뭐어? 지금 이 상황에서 쟤들 데리고 빠져나가겠다고? 너 미쳤니?”
아르투르는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시끄러. 하라면 해.”
“하! 좋았어. 그렇게 박력 있게 말하면 들어줄 수밖에.”
피범벅이 된 힐데군드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으면서 오른손의 검을 한 바퀴 휘둘러 피를 털어내며 앞으로 나섰고, 아르투르는 곧장 뒤편의 죄수들을 향해 달려갔다.
“다들 무엇들 하느냐! 움직이란 말이다! 너희의 맨손으로, 몸으로 달려들어서 놈들을 뭉개트려 죽여!”
아타나시우스가 소리치자 가장 용감하고 날랜 자들이 먼저 손에 잡히는 흉기를 들고 힐데군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힐데군드는 실실 웃으면서 주저 없이 칼을 내질렀고, 춤추듯 유려한 움직임을 보이며 차례로 적들을 쓰러뜨렸다. 그녀의 공격은 얕게 들어갔지만,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동료들이 차례로 죽어가는 모습을 본 군중들은 달려드는 것을 머뭇거렸다.
“더, 안 오냐?”
힐데군드가 그들을 비웃었지만, 오히려 군중은 제자리를 지키는 경향을 보였다. 그 사이 아르투르는 화형대 밑에 모여 있는 죄수들을 향해 달려갔다. 도중, 자신을 막기 위해 뛰어드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한번 칼날을 쓱 휘두를 때마다 파리가 죽듯 휙휙 죽어나갔다.
“다들 일어나라! 서둘러!”
죽음을 기다리던 죄수들은 살아날 기회가 생기자 정신이 번쩍 들어 재빨리 아르투르의 뒤를 따랐다. 아르투르는 지도를 보아두었기에 항구가 있는 상업 지구로 가는 방향을 알고 있었고, 상업 지구로 가는 길목을 뚫기 시작했다. 두려움으로 움직임이 굼떠진 병사들을 상대하는 일은 한층 쉬웠기에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힐데군드! 철수하자! 빨리!”
“더 즐기고 싶었는데, 안녕. 친구들. 다음에 보자고.”
힐데군드는 쓰러뜨린 베어버린 적병의 목을 뻥 차서 군중들에게 날려 보내고는, 아르투르를 뒤따라왔다. 아타나시우스는 한층 더 노기가 띈 목소리로 외쳤다.
“무엇들 하는가! 형제들이여! 공격해서 저 불신자들을 쓰러뜨리란 말이다!”
하지만 안전한 곳에서 용맹을 논하기는 쉬운 법이지만, 실제로 행동하기는 그보다 훨씬 어려웠다. 아르투르가 지나간 자리에는 참혹한 시체들에게서 흘러나온 피바다만 남아있었기에, 그들의 추적은 굼뜨고 느렸다.
“따라오면 놈은 가차 없이 죽이겠다.”
아르투르는 뒤돌아서서 싸늘한 표정으로 군중을 노려보며, 어깨에 성검을 올려둔 채 서서히 광장을 빠져나갔다. 아타나시우스는 모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미 두려움을 모르는 광신자들은 모두 죽었고, 나머지는 도망칠 용기도, 싸울 용기도 없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수만 명에 달하는 인파는 두 전사가 죄수들을 이끌고 광장을 탈출하는 것을 넋 놓고 지켜보는 것 밖에 할 도리가 없었다.
***
피오렌치아의 서쪽 지역, 대항구가 위치한 상업 지역은 별도의 성벽으로 보호 받고 있었다. 본디는 해상으로부터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서였지만, 도시의 대부분이 그들의 손에 들어간 지금은 아타나시우스의 완전한 도시 통제를 막는 마지막 방파제가 되어주고 있었다. 밤낮 없이 성벽을 지키던 자경대의 눈앞에 수십 명의 무리가 나타났다.
“어, 저기 누가 오는데요? 폭도놈들일까요?”
“보자고. 다른 탈출한 자들 일수도 있지.”
굉장히 큰 키의 사내가 백색군마의 고삐를 쥐고 성벽을 향해 걸어왔다. 그는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여전히 온 몸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경대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며 기겁해서 석궁을 장전해서 허겁지겁 겨누었다.
“정, 정지! 신원을 밝혀라!”
“피오렌치아에선 내 얼굴이 꽤 알려졌을 줄 알았는데….”
“우리 눈엔 피를 뒤집어쓴 괴물 밖에 안 보인단 말이오!”
아르투르는 잠시 신원을 밝혀도 되나 생각해보았다. 피오렌치아와 전쟁을 벌인 적이 있으니,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꽤 있을 터였다. 이름을 밝힌 뒤, 석궁 세례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다행히 그에겐 다른 직함이 있었다.
“피오렌치아의 혼란을 종식하기 위해 파견된 교황 성하의 특사다. 뒤에 오는 이들은 붙잡힌 사람들을 좀 구해왔을 뿐이니 어서 성문을 열고 너희의 지도자에게 안내해라.”
자경들은 상의하더니, 두 사람은 바깥에서 대기하라는 조건을 내걸고 우선 붙잡혀온 사람들을 성벽 안으로 수용했다. 죄수들에게 상황을 전달받은 자경대원은 아르투르도 받아들인 후, 현지 지도자에게 안내했다.
“오오! 교황 성하께서 용맹한 기사 분을 특사로 보내주시다니, 정말로 반갑습… 아니, 네놈이 왜 여기 있어?”
현재 상업 지구의 지도자인 젊은 귀족은 악수를 청하려다가, 피를 씻어낸 아르투르의 얼굴을 보며 표정을 찌푸렸다. 그가 손을 거두려할 때, 아르투르가 건틀렛을 낀 손으로 덜컥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웃었다.
“성하의 특사를 보며 그렇게 무례하게 굴어서야 되겠나? 굴리엘모 델 피오레.”
굴리엘모는 불편한 표정으로 연달아 팔을 빼려들었지만, 그의 빈약한 힘으로는 아르투르의 악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이거 놔! 네놈 따위에게 협력할 것 같으냐! 도시가, 우리 가문이, 내가 이 꼴이 된 게 다 너 때문이다! 경비병! 당장 이놈을 쳐라! 우리의 원수다! 아르투르 놈이 왔단 말이다! 두라노의 독재자 놈 말이다!”
아르투르라는 이름에 병사들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 그들이 칼자루에 손을 얹히려는 찰 나였다.
“나는 지금 교황 성하의 특사로, 이번 사건에 대한 전권을 쥐고 왔다는 것을 기억해라. 게다가 방금 너희 동료 시민들을 구해왔고.”
아르투르는 그들의 눈을 차례로 마주 보며 말했고,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무기에서 손을 떼었다. 굴리엘모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아르투르.
“자, 다시 말해봐라. 내가 누구라고?”
굴리엘모는 모멸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결국 예를 차려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르투르 공. 피오레 가문의 대표로서 교황 성하의 특사를 환영하는 바입니다. 필요한 안건에 따라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아. 그 정도는 되어야 넘어가줄만 하지. 단, 교황 성하께서 이번 일에 대해 내게 전권을 내리셨음을 기억하고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