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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48화 (148/248)

148화

탑 위에서 군중을 내려다보고 있는 수도사, 아타나시우스는 외적으로 돋보일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의복은 단조로운 백색 옷과 나무 지팡이가 전부고, 외모도 특출 난 게 없었다. 하지만 눈빛에 흘러넘치는 힘과 기괴한 위압감이 내뿜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수 만명의 군중들이 모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광장 중앙에선 연기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짚단을 가득 쌓아둔 수십 개의 장대가 그 정체였다. 다름 아닌 화형대였다. 이미 몇몇은 시꺼멓게 그을렸고, 불쾌한 냄새와 연기만을 가득 풍겼다.

“흐으음. 애들 화끈한데? 산 채로 사람들을 태워 버렸나봐.”

힐데군드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와 달리, 아르투르는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전장을 겪어온 그에게 냄새 자체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이런 광신적인 분위기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게 했다.

그 사이, 화형대 근처에 묶여서 무릎 꿇려져 있던 수십명의 사람들은 아타나시우스가 있는 탑을 향해 빌었다.

“예언자시여! 제 잘못된 날을 반성합니다! 모든 재산을 기부하고 조용히 떠나겠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저는 마술을 쓴 적이 없어요! 살려주세요!”

수십 명의 내지르는 아우성과 제각각 외치는 비명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가 조용히 지팡이를 들어 올려 바닥을 몇 번 두들기자, 경비병들이 죄수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주변이 고요해지자, 예언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히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들으라! 나의 성도들이여!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이대로면 영원한 겨울이 우리를 모두 휩쓸어버리고 말 것이다. 신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셨던 계시를 떠올려보라. 하늘이 피를 흘리고, 태양이 사라졌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영원한 암흑 속에 빠지지 않을 유일한 기회!”

“유일한 기회! 유일한 기회!”

군중은 아타나시우스의 경고에 공포를 느끼며 숙연한 태도로 뒤따라 외쳤다. 그들은 완전히 선지자의 말에 매료되어있었고, 한 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아니, 가질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티를 내었다간 신변의 위험을 느낄 상황이었다.

“그동안 우리 인간들은 신의 은총을 잊고 너무나 많은 죄악을 저질러왔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이 까닭을 생각해보라. 죄인들을 우리 스스로 솎아내라는 뜻이 분명하다! 이제 타락했던 세상은 멸망하고, 새로운 시대가 오리라. 고귀한 자가 하찮게 되고, 낮은 자가 높아질 것이니라. 형제자매들이여! 회개하라! 이를 거부하는 자들은 영원한 암흑 속에 갇히게 되리라!”

예언자의 말이 끝나자 이 수많은 군중들은 엎드려 절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진심이 담긴 눈물을 글썽이며 가슴을 쳤다. 아르투르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풍경에 경악했지만, 몸은 이미 화형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를 저지해야 할 경비들조차 저런 상태였기에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도로 들리는 아타나시우스의 목소리.

“죄인들은 들으라! 너희는 신께 죄를 지었기에 나는 너희를 사면하거나, 벌할 수 없다. 그저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너희 죄인들이 깨끗한 상태로 구세주를 뵐 수 있도록 중재해주는 것뿐이다. 고통으로 생전의 죄악을 씻게 한 뒤, 불로서 너희를 정화하겠다.그리하면 너희는 깨끗한 상태로 천국의 법정에서 신의 판결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불쌍한 너희들을 위해 기도해주겠다.”

눈물마저 글썽이는 아타나시우스의 모습은 군중을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보라! 예언자께서는 저 죄인들마저 걱정해주고 있지 않으신가?

“집행관, 형벌을 재개하라.”

모두가 숙연해진 가운데, 집행관은 남몰래 히죽 웃으며 채찍을 들고 죄수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어려서부터 동물들을 고통스럽게 죽이는 취미가 있었다. 때문에 자라서는 고문기술자가 되었고, 삶의 보람을 느꼈다.

아, 사람의 비명과 몸부림이 얼마나 자신을 황홀하게 만드는가. 저 사이비가 진짜 예언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일들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

‘나는 정말 축복 받았어!’

집행관이 죄수들에게 성큼, 성큼 다가설 때마다 그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이미 고통스럽게 죽은 다른 이들을 보아온 죄수들은 몸부림치거나 혼절했지만, 경비병들은 무자비하게 그들을 제압하거나 물을 뿌려서 깨웠다.

“저런, 이쁜이. 잠들면 안되지. 널 먼저 귀여워 해줄 테니 깨어있으라고.”

집행관은 거품을 물고 쓰러진, 멋쟁이 장발 청년의 뒷덜미를 잡아서 끌어냈다.

“아, 아악! 나한테 이러지 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집행관이 이죽 거렸다.

“남색가 놈이 말 많기는. 예언자께서 말씀하시지 않느냐. 네놈 때문에 신께서 화가 나셨다고. 네게 시범을 보여주면 모두가 조용해지겠지.”

집행관의 등 뒤로 들리는 싸늘한 목소리.

“그래. 네놈이 시범타로 좋겠어.”

“어느 놈이 감히….”

쾅 - !

집행관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건틀렛을 찬 아르투르의 주먹을 얻어맞고 뒤로 쓰러졌다. 그의 안면은 철퇴에 얻어맞은 것처럼 흉하게 뭉개졌다. 그는 쓰러진 뒤에도 일어나려 했지만, 숨만 몰아쉬다가 의식을 잃어버렸다.

“싱겁기는. 죽지 말라고 살살 때렸는데, 바로 뻗어버리냐?”

아르투르는 싱겁다는 듯이 웃더니, 양손에 각각 성검과 여명을 뽑아들었다. 그의 두 자루 검이 석양빛을 받았다. 그는 아타나시우스를 향해 두 자루의 검을 겨누었다.

“당장 이 엉터리 재판을 멈춰라. 내가 허용할 수 없다.”

노기에 띈 아타나시우스.

“감히 신의 판결을 가로 막는 자가 누구냐!”

아르투르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며 군중과 수도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들어라! 이 판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으로 진행되었으므로 아무런 효력이 없다. 나는 백인을 벤 아르투르이며, 지금은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 우르비누스 2세 교황 성하의 전권 대사로 너희들 앞에 서 있음을 알린다.”

교황의 전권 대사란 말 때문인지, 혹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 군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들을 죄인이라고 우기고 싶은 자가 있다면 정당성을 증명할 기회를 주겠다. 이들에게 죽음이 합당하고자 믿는 자, 앞으로 나와서 겨루자. 결투 재판을 통해 상고할 권리를 주겠다는 말이다.”

아르투르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군중은 아무러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백 명에 달하는 무장 경비병들은 아르투르를 포위를 개시했다. 아르투르가 먼저 치려는 그 때, 아타나시우스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일제히 멈춰버리는 광장. 단 한 사람의 말이 가진 힘이라기엔 믿기지 않았다.

“교황의 특사라고 했는가?”

아르투르는 그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제발 말이 통하길 마지막 소망을 유지한 채.

“그렇다. 지금부터는 신중하게 답하라. 아타나시우스, 우리의 모든 대화는 교황 성하는 물론, 대륙의 모든 귀족들과 주교들이 듣게 될 일이다.”

아타나시우스는 근엄한 태도를 잃지 않은 채 아르투르를 내려다보았다.

“흠. 좋다. 그렇다면 논리로 따져보자꾸나. 그곳에 있는 자들은 남색, 이교숭배, 마녀 행위, 부의 축적, 불륜, 외설 행위, 신성 모독, 종교집회출석 거부 같은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그런데도 저자들을 감싸겠다는 말이냐?”

코웃음을 치는 아르투르.

“모두 사형에 처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죄목이다. 게다가 어떤 증거도 없는 재판이 아니냐. 그럼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무기를 들고 앞으로 나와라. 결투 재판으로 시비를 가리자.”

“흥. 너희 오만한 기사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신의 위엄을 더럽혀왔지. 재판이란 신의 뜻을 구현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결투 재판이라고 했느냐? 그런 미개한 방식으로 무엇을 가릴 수 없단 말이냐? 싸움을 잘하는 자가 옳다고? 그것이야말로 북구 야만인들이나 가질 법한 생각이.”

아르투르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고려해보려 했지만, 본능적으로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기사이지, 법학자는 아니었다. 이런 궤변 섞인 대화에서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은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오랜 전통이지.”

아르투르의 대답에 슬쩍 웃는 아타나시우스.

“오래 되었다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아르투르는 문답무용으로 싸울까도 생각했지만, 군중들이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말로 그들을 해산시킬 수 있다면 훨씬 적은 피를 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재판관 마음대로 판결하는 것보단 훨씬 공정하게 대해주고 있지. 재판관의 인격 따위에 의존하는 체제보다는 훨씬 않더냐? 특히 너 같은 미치광이가 있을 때는 말이야.”

비웃음을 머금는 아타나시우스.

“그래. 너희 기사 놈들이 가진 거라고 해봐야 칼을 들이대는 게 전부지. 반면 나의 판결은 우리의 경전에 기반하노라! 예언서 5장의 12번째 구절을 보면….”

그때, 힐데군드가 도끼를 뽑아들며 아타나시우스를 향해 날렸다. 화형대에서 탑의 정상은 닿을 수 없는 거리였지만, 놀랍게도 도끼는 아타나시우스의 머리를 향해 정확히 날아갔다. 마지막 순간, 그가 두꺼운 성서를 들어 올려 막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놈은 끝장났을 것이다.

“….”

아르투르는 무슨 짓을 한 거냐는 표정으로 힐데군드를 바라보았지만, 오히려 그녀는 사납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멍청아. 그냥 입 닥치고 싸워. 앞을 가로 막는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라고.”

하기야, 명예란 원래 힘으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던가.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 보이고, 스스로의 믿음을 무엇보다 앞세울 수 있는 것. 기사도의 길이란 그것 뿐 이었다.

“잡아! 저놈들을 산 채로 잡아라! 놈들을 꼬챙이에 꿰어서 사흘 간 죽지도 못하게 한 다음, 그 뒤에 친히 불로 정화하리라! 놈들을 잡아!”

아르투르는 몰려드는 적들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덤-벼-라! 쓰레기들아!”

양손의 검을 쉴 새 없이 휘두를 때마다 적들의 진영이 헤집어졌다. 여섯 명이 넘는 적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쓰러졌다. 그는 마치 소용돌이치듯 적진을 가르고 지나갔으며, 가는 곳마다 시체가 가득 쌓이고 잘려나간 사지들이 나뒹군다.

“형편없는 놈들 같으니! 숫자만 많지, 싸울 줄은 하나도 모르는구나!”

아르투르는 기세를 이어나가며 끓어오르는 분노에 몸을 맡겼다. 많은 병사들이 쉼 없이 몰려들었지만, 그가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뒤편에서는 힐데군드가 따라오며 서로의 등을 보호해 주고 있었고, 접근하는 적들은 잡초가 제거되듯이 쓱쓱 제거되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맹렬한 기세와 직감이 그를 보호했다. 적군이 파도를 이루며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르투르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정면으로 맞섰다. 어느샌가, 오른손에 들린 성검은 강렬한 황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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