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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가 에쿠잘루스의 옆구리를 걷어차기 직전,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을 느끼고 뒤돌아보았다. 샤를로트였다.
“잠깐만. 떠나기 전에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어.”
“하긴, 나도 물을 부분이 여럿 있기는 했지. 좋아. 걸으면서 이야기하자고.”
두 사람은 야영지에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들과 충분히 멀어지자 이야기를 재개했다.
“대화를 직접 보아서 알겠지만, 레니에 대장은 이상주의자야. 행동이 필요한 시간에 이상만 따지는 사람이지. 좋은 사람이고 판단력도 뛰어하지만, 마음이 약해.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자기가 살던 도시의 사람들에게 창칼을 겨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샤를로트는 날이 선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알쏭달쏭 해보였다.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야 진짜 괜찮은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던데. 어쩌면 사람을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는 우리가 너무 멀리 온 걸지도 모르지.”
명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목숨을 뺏어왔는가. 눈앞의 이 차가운 여자는 권력의 열망에 이끌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것인가.
“지금 그런 감상적인 이야기가 할 때가 아니야. 레니에 대장이 좋은 사람이란 건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동의해. 중요한 건 그가 한 세력을 이끌기엔 모자란 사람이란거야.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지도자가 될 수는 없어.”
아르투르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네 말대로 군대를 동원해서 가로 막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도시를 정복하란 말이냐? 수천이 죽을 지, 수만이 죽을지 모르는 일을?”
샤를로트는 발걸음을 멈추고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단호함이 깃든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올려다보았다.
“날 봐.”
아르투르는 샤를로트의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부정할 수 없이,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을 외적으로, 내적으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게 만드는 데 굉장히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건 누군가의 판단력을 흐리고, 의지를 꺾는 그녀의 오랜 무기였을 것이다. 그러니 항상 경계해야했다.
“지금 상업 지구에는 아타나시우스를 따르지 않는 도시의 자유민들이 고립되어 있어. 피오렌치아의 건립과 함께 해온 명문가의 자손들과 도시를 대표하는 예술가와 장인, 은행가들이지. 도시를 위대하게 만드는 사람들이야. 외국인 거류구도 상업 지구에 있어. 그들은 동방에 있는 사막의 제왕들의 친척들이고, 세상 끝에서 부를 찾아서 온 거상들이지. 이들이 죽으면 그 뒷감당은 피오렌치아가 해낼 수 없는 수준일거야.”
팔짱을 끼는 아르투르.
“그러니 아타나시우스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일단 쳐들어가서 전부 죽이고 보라, 그런 이야기야? 나는 분명히 무력 진압도 염두 해두고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이런 제안을 꺼내는 저의가 뭐지?”
날 섞인 아르투르의 말에 샤를로트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어떤 민중 봉기가 상류층을 좋아해? 그것도 종말론자면 말 다했지. 지금 피오렌치아의 시민들은 제정신이 아니야. 자, 정리해줄게. 기이한 천체 현상 때문에 도시 시민들이 다들 미쳐버려서, 광신도 수도사의 지시에 맹종해서 애꿎은 사람들을 죽이고 도시를 파괴하고 있어. 그런데 치안을 바로잡아야 할 군대는 사람을 죽이기 무서워서 그걸 주저해. 이 시국에 도시에 도착한 교황의 특사가 해야 할 일은?”
샤를로트의 말에는 분명한 호소력이 있었지만, 아르투르도 고집 세기로는 대륙에서 제일가는 사람이었다.
“가능한 한 평화적인 방법을 찾아보는 거지. 무력행사는 그 다음이다. 그게 싫다면 네가 직접 해결하던가.”
샤를로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이틀 후면 만프레드가 이끄는 금괴 기사단이 도착할거야. 그들을 잘 알 테지. 돈 주는 고용주의 의뢰는 철저하게 지키지만, 그 외에는 오직 돈만 노린다고. 그들이 도시에 투입되면 네가 직접 진압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피가 흐를 거야.”
아르투르는 만프레드와 금괴 기사단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사생아 출신의 귀족, 만프레드가 이끄는 몰락한 기사들로 이뤄진 용병 기사단. 그들이 얼마나 절박할 지, 출세를 위해선 뭘 할 수 있을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자신이었다.
고용주인 피오레 가문의 군사력이 박살난 지금, 그들은 용병들에 대한 통제력이 거의 없을 것이다. 거상들은 가진 것을 지켜야하기에 본능적으로 안정을 지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위험한 야심가들을 불러들이는 건…
“네가 불러들였구나.”
아르투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즉, 넌 내게 지원요청을 해두고 금괴 기사단도 부른 뒤에, 말 안 듣는 쪽을 다른 한 쪽으로 통제하려고 한 거네. 나는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힐 수 없는 사람에게 휘둘리는 기분을 좋아하지 않아. 내가 널 무시하고 바로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해주겠어?”
샤를로트 역시 날선 목소리로 답했다.
“변호부터 할게. 난 확실하게 지원해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너건 만프레드건 제때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었어. 그러니 손에 쥔 모든 카드를 써봐야지. 운 좋게 둘 다 통한 것일 뿐이고. 다음, 날 사람들을 학살하려는 쌍년이라고 불러도 돼. 그건 사실이니까. 난 내가 필요하다고 믿는 걸 할 거야. 하지만 내가 내 손에 피를 묻힐 수 없는 사람이라곤 부르지 마.”
마지막에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올라가더니, 꾹꾹 참고 있던 흥분을 드러냈다.
“용병대를 불러다가 민란을 진압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어. 그게 나라고 내킬 줄 알아? 이 도시는 너에겐 공적을 쌓기 위해 지나가는 곳일지 몰라도, 나한텐 고향이야. 내 선조들이 살아온 도시고. 내가. 너한테. 당장. 군대를. 움직이라고. 촉구하는 건.”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가 내뱉었다.
“그게 가장 사람들이 덜 죽는 방법이기 때문이야. 큰 악행과 더 큰 악행 가운데 골라야할 게 있다면, 큰 악행을 고를 뿐이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너와 내가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기 때문이야.”
아르투르는 조용히 팔짱을 꼈다.
“무슨 이해관계 말인가?”
샤를로트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네 고고함은 존중하지만, 가끔은 가식이 지나쳐. 하기야, 대놓고 쌍년이 되어가는 나보단 훨씬 평판 관리를 잘하고 있는 거지. 박수칠 만해. 내가 본받아야지. 비아냥거리는 거 아니야. 칭찬이야.”
아르투르는 그녀의 지적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계속 듣기로 했다.
“그래서 네가 말하는 우리가 공유하는 이해관계가 뭐란 말이냐?”
“가능한 한, 피오렌치아가 멀쩡한 상태에서 네 근거지가 되길 바랄 거 아니야, 아타나시우스가 집권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도시는 치명적으로 파괴 될 거야. 나 역시 이곳이 내 고향이자 세력 기반이니 구해야 할 동기가 있고. 잘 생각해. 피오렌치아를 없이 레무리아의 통일을 완성할 수는 없어. 이번 기회에 순순히 네 힘으로 아타나시우스를 몰아내면, 넌 피오렌치아 권력 구도에 굉장한 지분을 가지게 돼. 네가 왕위에 오르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지.”
아르투르는 그녀가 자신을 떠보는 건가 싶어, 시선을 한층 강렬히 마주했지만 지금 그녀의 눈동자는 아주 맑았다. 하지만 왕위에 관련된 제안은 분명히 극비로 알고 있었기에 경계심이 들었다.
“왕들도 성하의 측근까지 정보망을 확보하진 못한다고 들었다. 그만큼 네가 대단한 거냐? 아니면 교황청의 명성이 이전만 못한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군.”
“내가 바로 그 교황 성하의 측근이니까. 너에 대한 정보를 교황에게 알린 것도, 주시하라고 조언한 것도, 레무리아의 왕으로 추천한 것도, 전부 나였지.”
아르투르는 뭔가 속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찝찝했다. 특히 그녀가 슬며시 미소 짓는 모습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리로는 분명히 이해가 되건만, 무언가 불편했다. 이런 종류의 계책에는 자신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를 테지만, 불편한 감정은 숨길 수 없는 짜증을 피워낸다.
“하기야, 이상했지. 항상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 딱 나타나서 내게 필요한 걸 제공해주고, 답례는 제대로 받지 않는 게 우연일리가 없지. 이제라도 말해라. 무얼 원하는 거냐? 날 꼭두각시로 두고 조종이라도 할 셈이었나?”
반면 샤를로트는 누그러진 목소리를 취했다.
“진정해. 아르투르. 나는 항상 네게 도움을 제공하고, 그만큼 내가 다른데서 이득을 거뒀지. 원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이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라고 하지 않아? 그런 관점에 동의할 수 있다면, 나는 너와 신뢰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야.”
“그 말을 믿으라고?”
천연덕스럽게 답하는 샤를로트.
“믿지 못할 건 뭔데? 난 네게 해가 되는 행동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이번 일도 마찬가지야. 난 네가 피오렌치아에서 영향력을 얻길 바라고, 그 토대로 왕이 되길 바래. 그렇게 되면 내가 노려볼만한 이득이 굉장히 커지거든. 보답은 안받아도 그만, 받게 되면 아주 좋게 될 뿐이야. 이건 나중에 설명해줄게. 본론으로 들어가자. 아타나시우스 말이야.”
아르투르는 심기가 여전히 불편했지만, 틀린 말이 없었기에 넘어갔다. 모르지. 어쩌면 자기가 너무 순진했던 걸지도.
“…그렇게 하지.”
“자, 원점으로 돌아와서. 이제 네가 왜 내 도움을 받아서 병력들을 확보하고, 곧장 아타나시우스를 쳐야하는 지 이해했을거야. 금괴 기사단이 도착해서 혼란을 진압하는 것도, 그가 벌인 난장판으로 피오렌치아의 귀빈들이 죽는 것도 네겐 큰 손해니까.”
아르투르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주 좋은 조언이었어. 내가 왜 지금 행동해야하는 지 잘 알려줬네. 취지도 명확하고, 틀린 말도 없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샤를로트.
“그렇지?”
하지만 아르투르 역시 씩 웃어 보였다.
“그런데, 정말로 네가 말하는 대로 아타나시우스가 그런 개자식이라도 네 도움을 받아서 정치적 부채를 더 쌓을 필요는 없겠네. 광신도들을 해치우는데 ‘군대’ 씩이나 필요하진 않거든. 이곳에서 안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말이 통하는 놈이면 협상을 해오고, 네가 말하는 것 같은 미치광이면 목을 가져오마.”
샤를로트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지금 시내에 아타나시우스가 거느린 군중은 수만 명이 넘어! 그걸 병력도 없이 어떻게 대적하겠다고? 네가 아무리 강한 기사라도 무리야. 그게 말이 되냐?”
“얼마 전엔 대악마도 잡고 오는 길이야. 그건 말이 되냐?”
아르투르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
아르투르는 소수의 인원만 대동하고 도시로 향하기로 했다. 데려가기로 결정한 일행은 케이와 힐데군드, 카밀과 시라노로 총 다섯 사람이었다. 레오폴트 일행과 북구인들은 별도의 지원 요청이 있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평화 회담에 그렇게 많은 인원은 필요 없다.”
너무 위험하다는 샤를로트의 우려와는 달리 일행 중 누구도 거기 토를 달지 않았다. 키득 키득 웃는 레오폴트.
“너 인마, 솔직히 말해. 전투가 벌어져도 그 인원이면 충분하다는 거지? 반면에 우릴 데리고 가봐야 싸움밖에 안 날거라는 거고?”
아르투르도 피식 웃었다.
“잘 아네. 넌 기분 나쁘면 칼부터 뽑잖아. 그래서야 될 회담도 안되는데.”
“아니, 무지렁이 새끼들이 맞먹으려드는데 어떻게 참냐고. 말이 돼? 큭큭.”
나머지 북구인들도 좋게 말하거나 모욕을 참는 건 자기들 소양이 아니니 전투가 벌어지면 그때야 불러달라고 했다. 다섯 사람은 일행들의 배웅을 받으며 피오렌치아의 성문 앞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