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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45화 (145/248)

145화

군대의 수뇌부 막사 안에는 세 사람이 테이블에 함께 앉아있었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거구의 기사 아르투르, 관록이 느껴지는 태도로 관조중인 중년의 군인 레니에, 희고 기다란 모피 코트를 비롯하여 값비싼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는 장신의 미녀, 샤를로트였다.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세 사람은 침묵을 지킨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르투르가 먼저샤를로트를 보며 말을 꺼냈다.

“보아하니 두 사람이 완전히 입장이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우리끼리 했던 이야기를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건가?”

샤를로트는 거짓 한 점 없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레니에 대장은 신뢰할만한 사람이니까, 조금 위험하다 싶은 이야기도 해도 괜찮아. 오랫동안 피오렌치아와 시민들을 위해서 봉사한 명예롭고 명망 있는 분이셔. 정부가 실질적으로 붕괴된 지금 남아있는 도시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분이셔.”

“정말로 말인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샤를로트.

“물론이지. 레니에 대장은 모든 어려운 일을 병사들과 함께 하고, 가족들도 챙겨주시는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야. 이번에도 병사들의 가족 한명까지 데리고 나오신 분이고. 나 역시 피오렌치아 시민들의 안전을 바라는 거니까, 그런 분에게 숨길 건 없어.”

아르투르는 대답을 들으며 이번 대화에서 최대한 말을 적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기사라면 진실만을 말해야했다. 진실이 알려지는 게 손해가 되더라도 침묵을 지키는 것 정도가 할 수 있는 전부이리라.

“하려던 말을 계속 해봐. 기탄없이 말이야.”

민감한 이야긴 빼고 하란 이야기네.

“우선 정황이 어떻게 된 건지 부터 알고 싶군. 이단심판관 피데스에게서 네 편지를 받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상황을 판단하기엔 부족하거든. 내가 오는 사이에 상황이 변했을 수도 있잖아?”

“음. 일단 지금 상황부터 설명해줘야겠네. 지금 피오렌치아 정부를 자칭하며 시내를 장악하고 있는 건 아타나시우스라는 수도승의 무리야. 그런데...”

“잠깐만요. 아가씨.”

샤를로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대조되는, 굵직한 레니에의 목소리가 단호히 끼어든다.

“일단 저부터 여쭤보고 싶은 게 좀 많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저희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외부의 도움을 빌리겠다고 하셨죠. 제가 동의한 건 맞습니다. 그렇다고 외국 왕자를 데려오는데 동의했던 일은 아닙니다. 특히 얼마 전에 전쟁을 치룬 상대라면 더 그렇죠. 그게 저희 같은 자유 도시에 무슨 의미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레니에는 힐끗 고개를 기울여 아르투르를 잠깐 본 후, 샤를로트에게 해명을 바라는 강한 눈빛을 내보였다.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이전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했다.

“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건 제가 결정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희가 상황을 설명하고 지원을 청한 것은 교황 성하입니다. 우리 둘이 같이 서신에 도장을 찍어서 보냈잖아요. 따라서 아르투르 공은 외국 왕자의 자격이 아니라 교황 성하의 대리인으로 오신 분이지요. 성하께 도움을 청하는 판에 누구를 다시 보내 달라, 이런 사람은 안된다고 말할 순 없지 않습니까. 저라고 방금 전까지 전쟁을 치렀던 사람이 피오렌치아의 혼란을 해결하러 온 것이 편하진 않답니다.”

레니에는 조금은 급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샤를로트 아가씨. 정말로 동료 시민들을 죽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불편 하신 게 맞습니까? 정말로 아가씨께서 외국 왕자를 이 문제의 해결자로 불러오지 않으셨다고 약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레니에와 눈을 마주 보는 샤를로트.

“네. 저는 제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분의 동지이던 대장께서는 아주 정직한 분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죠. 저 역시 라이랜더 가문 사람입니다. 설마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할까요?”

“….”

대답을 들은 레니에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것으로 알지요.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아르투르 공,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피오렌치아 인들은 당신을 반기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청년들이 당신의 칼날 앞에 쓰러졌는지 잘 알기 때문이지요.”

아르투르는 격한 목소리로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할 지, 아니면 상대의 비겁함을 비난할 지 잠시 고민했다. 그가 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한번 쌓인 원한은 이유가 무엇이든 쉽게 사라질 리가 없는 것이 당연했고, 반감은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한숨을 쉬는 레니에.

“그렇지만 교황 성하께서 이번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보내주신 분이 당신이라면 협조할 수밖에 없겠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오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여러 확인되지 않은 정보 외에는 현지에 대해 아는 게 없네. 그래서 샤를로트에게 브리핑을 요청했던 것이고. 사전 조사를 게을리 한 건 아닐세. 그럴 시간에 직접 와서 살펴보고,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되물어보려고 했을 뿐이지.”

“….”

레니에는 고개를 아래로 내린 후, 깊게 한숨을 쉰 후 자신이 직접 현황을 보고했다. 레니에는 짧은 시간 안에, 주요한 정보들을 간추려서 제공했다. 본디 피오렌치아 정부는 피오레 가문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으나, 전쟁이 소득 없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평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여러 피오렌치아의 집단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피오레 가문을 퇴진시켰다고 했다.

“문제는 그 뒤였습니다. 피오레 가문이 차지하던 자리를 나누려했지만, 정파들 간의 이해관계 문제로 도저히 권력을 분배하지 못했지요. 아타나시우스의 일파 역시 그런 정파 중 하나였습니다. 빈자들과 신실한 이들의 지지를 받는 집단이었지요. 문제는 권력의 공백 상태가 벌어지자 다들 딴 마음을 먹은 겁니다. 석공 길드장이 단검에 맞아 골목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도시 곳곳에서 정파 간의 유혈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레니에가 한숨을 쉴 때, 아르투르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두들겼다.

“레니에 대장, 왜 도시가 혼란과 무질서 속에 빠지게 내버려 둔 이유가 궁금하군. 당신을 따르는 수천의 정예 병력들이 있지 않소?”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내가 도시를 장악했다면 그 뒤는 정말로 내전으로 이어졌을 겁니다. 같은 형제와 가족들끼리 죽고 죽이는 거죠. 그런 짓은 할 수 없습니다.”

아르투르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처럼 사이비 교주가 정권을 잡은 것보다는 차라리 당신이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은 쪽이 훨씬 나았을 것 같아서 하는 이야기요. 선동가 수도승보다는 검증된 군인이 믿을만했을테니까.”

레니에는 책상을 내리치며 분노 어린 시선을 아르투르에게 내보냈다.

“제기랄!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내가 외국 귀족들을 안 믿는 겁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차가운 시선으로 답할 뿐이었다.

“최소한의 피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때 나서는게 오히려 지도자의 덕목이라고 생각하오. 이제 와선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를 상대로 군대를 투입하기도 어렵게 된 거 아니오. 그것도 무정부 상태보다는 나았겠지만.”

레니에는 험악한 시선으로 아르투르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기 싸움을 교환하는 가운데, 샤를로트가 끼어들었다.

“자, 두 사람 모두 좀 진정할 필요가 있겠어. 우선 대장을 대신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 피오렌치아 인들에게 군대를 동원해서 정권을 장악한다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무엇보다 상황을 이렇게까지 악화된 건 하늘이 붉게 물든 이후지. 아타나시우스는 평소부터 회개하지 않으면 재앙이 올 것이라고 외치고 다녔거든.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의 심리가 한 곳으로 모여 들었고, 그렇게 놈이 완전히 도시를 장악하고 각종 만행을 저지르고 있어. 자, 상황은 이해가 되지?”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투르.

“너와 레니에 대장의 입장에 대해선 이해가 갔다. 하지만 행동에 앞서 아타나시우스와도 이야기를 해볼 참이다.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테니까. 꺼림칙하긴 하지만, 지금 피오렌치아를 그 자가 지배하고 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나도 가급적이면 조용히 상황을 처리하고 싶어.”

“아냐. 지금 이 시간에도 그 미치광이 종말론자는 사람들을 죽이고 있을 거라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상업 지구에서 몰려있어. 식량이 부족한 상황이니 오래 버티긴 어려울 거야.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제압해야 돼. 아르투르, 군대를 동원해서 아타나시우스를 제압하고 도시를 장악해줬으면 해. 동의한다면 군대는 내가 설득하지.”

레니에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샤를로트를 노려봤다.

“아가씨!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아직 시민들은 그 선동가의 말에 끌리고 있단 말입니다. 군대를 동원하면 대중 학살로 이어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 도시로선 끝입니다! 살아남더라도 참주정 같은 게 되겠죠. 그런 일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절대, 군대를 내어드리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요.”

“레니에 대장. 이제 인정하실 때가 됐습니다. 이유가 뭐건, 우린 제때 상황을 정리하지 못했고 갈수록 문제는 커질 거예요. 지금 그 미치광이는 피오렌치아의 가장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죽여서 도시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어요. 외국인 거류구가 있습니다. 그들의 신변에 해라도 생기면 그땐, 피오렌치아는 외교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맞이할 겁니다. 희생을 감수할 때에요.”

레니에는 단호한 표정으로 샤를로트를 노려봤다. 그에게선 정제된 분노가 느껴졌다.

“아뇨. 그렇더라도 군대가 나서서 시민들을 학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누구보다 보통 사람들을, 피오렌치아 민중을 사랑하신다면서요. 아가씨의 아버님이 지금 하신 말씀을 들었더라면 대단히 화를 내셨을 일입니다.”

지지 않고 팔짱을 끼며 싸늘한 표정을 짓는 샤를로트.

“덕분에 아버님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죠. 반면에 저는 아직도 살아있고요. 때로는 옳은 일보다 필요한 일을 할 줄 알아야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악한 일이 낫습니다.”

레니에는 허무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가씨는 아가씨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저는 결코 군대의 지휘권을 내어드리지 않을 겁니다. 병사들도 동조하지 않을 겁니다!”

“어떨까요? 라이랜더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인 제 말을 들어줄지, 아니면 대장의 말을 들어줄 지 짐짓 궁금해지지 않습니까?”

그들이 서로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기 직전, 이번에는 아르투르가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만. 기껏 교황 성하께 도움을 청해서 날 불러놓고, 당신들끼리 싸우면 어떻게 하란 말이오? 무엇보다 성하께서 혼란을 수습할 권한을 주신 건 나요. 그러니 지금부터 잘 들으시오. 나는 즉각 에쿠잘루스를 타고 아타나시우스를 만나러 가겠소. 그 사이비 종말론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직접 봐야겠군.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군대를 투입하는 일은 없을 거요. 기사로서 민간인들에게 칼을 겨누고 싶진 않소.”

레니에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가 아르투르 공의 중재를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때는 교황 성하께 위임 받은 권한을 휘두를 수밖에 없겠지. 그런 일이 없길 바라지만, 군대의 출동 준비를 내려두시오. 이건 교황 특사로서의 명령이오.”

말을 마친 아르투르는 곧장 막사를 나가 에쿠잘루스의 등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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