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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는 자신을 피오렌치아에 살던 지주라고 소개하며, 자신이 보고 온 일들을 늘어놓았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두라노 원정이 실패한 이후, 피오렌치아는 기존 지배 세력, 피오레 가문 반대하는 여론이 끓어올랐다. 그러다 유혈 충돌이 벌어져 분노한 군중에 의해 정부가 전복되었다.
그런데 뒤에 벌어진 일이 조금 달랐다. 정부가 전복된 후, 군중들이 새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평소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뉘어 각축전을 벌이다가 아예 뿔뿔이 나뉘어서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이런 시기에 재산이 있는 자들은 공격당하기 좋지요. 그래서 안전을 위해 도시를 떠나오는 길입니다. 많은 재산을 잃긴 했지만, 목숨 값보단 싸겠지요.”
“광신도 교주에 대한 이야긴 들은 바가 없는가?”
“아, 피오렌치아에 닥친 모든 재앙이 신의 진노를 받은 탓이라는 수도승이 한 명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떠나올 때까지는 그렇게 큰 호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고맙네. 신께서 그대의 여정을 보우하시길.”
“나리께서도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아르투르 일행은 그 뒤로도 이런 피난민 무리를 몇 차례 더 만났다. 그들은 하나 같이 피오렌치아 쪽에서 오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도시의 혼란에 대해 증언하며 원인으로는 각기 다른 집단들을 지목했다.
‘뭐, 이들이 말하는 걸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겠지. 모든 정보를 듣고, 교차로 확인할 수 있는 일만 따져보자고.’
핵심저인 정보를 추려 내보니 피오렌치아 정부의 권위는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고, 자기가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는 여러 세력들이 나뉘어있는 모양이었다. 두라노가 그랬듯, 피오렌치아도 내부에서 겪던 오랜 갈등이 터져 나온 게 분명했다.
‘샤를로트는 서신에서 사이비 선동가 한 명이 모든 걸 장악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었지. 정황을 보니 그녀도 지금 이 혼란을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일 가능성도 배제하긴 못하겠군.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레오폴트가 자신의 옆에서 흑마를 몰았다.
“피오렌치아의 상황이 네가 들었던 것보다 더 안 좋은 모양인데, 어떻게 할 셈이냐?‘
“무엇을?”
웃음을 짓는 레오폴트.
“피오렌치아가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잘 알고 있잖아. 곡창 지대의 중심지에 위치한 서방 대륙 최대의 무역항이고, 30만이 넘는 인구수가 사는 곳을 내버려두고, 레무리아의 왕이 될 수는 없다는 건 뻔하잖아. 이번 기회에 어떤 식으로건 네 손에 넣어야지. 생각해둔 바가 있을 텐데.”
“그런 말이었군, 일단 도시를 둘러보고 그들에게 내가 무슨 도움을 제공할 수 있을 지 봐야지. 그 다음엔 마음을 얻어야 할 거고. 그러고서도 충성을 맹세 받는 건 한참 뒤가 되는 수밖에 없겠지.”
“하하하하. 진심이냐? 피오렌치아는 자유 도시야. 게다가 이미 대대로 내려온 명문가들도 있지. 그런 곳을 순진하게 손에 넣을 수는 없다고 보는데. 용병들을 모아서 정복하는 게 훨씬 쉽고 빨라. 네 명성이라면 내가 힘을 써서 전쟁이 끝나고 급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도 모집해 볼 수 있을 거다.”
아르투르는 자신을 도우려는 사촌의 마음이 느껴져 간만에 웃고 말았다.
“제안은 고맙다. 하지만 난 조금 다르게 접근할 생각이야. 처음부터 군대를 몰고 가서 위협적인 정복자가 되기보다는, 그들이 필요한 걸 들어주는 친구가 되고 싶은데. 군신의 관계는 그 다음이겠지.”
레오폴트는 담담히 물었다.
“정복자로서 증오 받는 게 두렵기 때문인가?”
고개를 젓는 아르투르.
“그건 아니다. 무기를 휘두르는 기사로 살다보면 증오를 받지 않을 순 없지. 오히려 증오를 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아르투르의 왼편에서 말을 몰며, 잠자코 지켜만 보던 힐데군드도 끼어들었다.
“그러면 왜? 그냥 용병들을 모아서 털어버리자고. 피오렌치아라는 곳이 돈이 그렇게 많다니, 털어보면 뭐가 나올지도 궁금해. 설마, 사람을 죽이는 일은 너희 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던가 하는, 따분한 이유는 아니겠지?”
힐데군드는 강렬한 시선을 보내며 자신을 압박했다. 타인의 목숨 같은 ‘시시한 이유’로 원하는 걸 하지 않는다면 아주 한심한 사내라는 무언의 힐난이었다.
“내가 수도 기사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 훨씬 더 원초적인 이유야. 왕좌를 빠르게 차지하는 방법은 오래 권좌에 군림할 수 있는 방법과는 달라. 피정복자들의 증오를 사서 아군이 될 수 있던 자도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내 조력자, 못해도 중립으로는 만들기 위해서야. 자유 도시 사람들이니 더더욱 정복자에겐 예민 할거야. 우선 내가 피오렌치아에서 영향력을 얻으려면 도시 주민들도 인정할 수 있는 명분을 얻어야겠지.”
콧방귀를 끼는 레오폴트.
“하, 그런 이유였냐. 명분, 그깟 명분이라. 그런 건 힘으로 만들면 그만이고, 인정받는 명분은 들이미는 칼보다 명확한 게 없지. 대의란 결국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야. 그런 거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아르투르. 명분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결투 재판에서 이겼던 네가 왕국에서 쫓겨날 이유가 없잖나.”
아르투르는 레오폴트의 눈동자를 마주쳤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시선이 충돌하며 서로 누구의 의지가 더욱 강한 지 시험했다. 누구도 물러설 것 같지 않자, 아르투르가 먼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건 큰형님의 실수지. 결국 그분은 신성한 결투 재판의 대의를 저버리시고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내신거야. 당장은 도움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론 해가 될 거라고 본다. 나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거다.”
“그래? 나 없이는 기사 한명 갖지 못한 네가 그렇게 말해도 우습게 들리는 건 알고 있지? 반면, 루이스 형은 벌써 나머지 형제들을 거의 다 제압하고 왕좌의 통합을 눈앞에 두고 있어. 루이스 형이 상황을 정리하면 널 체포하러 사람들을 보낼 거다. 그때는 네가 아무리 강해도 힘들 것이란 것도 알 거고. 지금 장기적인 그림을 볼 때가 아니야. 훗날 문제가 있더라도 빠르게 세력을 다지는 게 먼저지.”
두 사람의 시선은 다시 충돌했지만, 이번에도 아르투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합리적인 조언이야. 논리적으로 흠잡을 데 없군.”
“오, 그렇다면 기사들을 시켜 용병들을 모으러 보낼까?”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아르투르가 재차 답했다.
“나는 충성을 바라는 것이지, 복종을 받고 싶은 게 아니다.”
“두 가지는 같은 말이야.”
“아니지. 복종은 강자에게 하는 것이지만, 충성은 내게 바치는 것이지. 시간을 들여 얻을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정복자로서 비춰지고 싶진 않아. 적어도 아직은.”
두 사람은 다시 한동안 시선을 교환하다가, 레오폴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까지나 이번 원정은 주역은 너니까, 네 기준에 맞추도록 하마. 어디 한번 네 계획대로 될 수 있나 보자고.”
얼마 뒤, 일행은 드높은 언덕에서 피오렌치아를 내려다보며 그 풍경에 감탄하고 있었다. 도시는 청색의 지붕으로 덮인 주택들로 다닥다닥 이어지며 군집을 이루고 있었는데, 굉장히 넓게 펴져있는 지 시야에 간신히 도시 전부를 담을 수 있을 정도였다.
“우와, 정말 크고 아름다운 도신데요. 이 정도면 왕국 수도보다 큰 것 같은데요? 아저씨가 보기에도 대단하지 않나요?”
케이는 감탄사를 내뱉은 반면,
“내 눈에는 겉만 번지르르한, 민중들의 고혈을 빤 결과물만 보이는군. 지금 살짝만 봐도 난장판이군.”
한편, 아르투르의 냉철한 눈은 피오렌치아의 전략적 가치를 다시 셈해보고 있었다. 지리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볼 때 이보다 완벽할 수 없는 장소가 아닌가. 이런 곳을 중심으로 할 수 있는 왕조가 있다면, 능히 천년도 갈 수 있으리라.
‘이곳을 수도로 삼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곳 사람들의 충성을 받아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 터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반대편 언덕에 주둔하고 있는 한 무리의 군대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 깃발도 내걸고 있지 않아 소속을 알 수 없었다. 아르투르는 우선 그들과 이야기해 볼 필요성을 느끼고,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보초병들은 느긋한 태도로 다가오는 기사들을 맞이했다.
“댁들은 뉘쇼? 기사 나리들인 것 같은데, 이 피오렌치아 공화국에는 어쩐 일이신지?”
아르투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는 백인을 벤 아르투르다. 교황 성하의 명을 받아 도시의 혼란을 잠재우고 이단을 창궐시킨 자들에게 그 책임을 물으러왔다. 이제, 너희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군.”
그런데 그가 앞으로 나서자마자, 경비병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뒷걸음질 쳤다.
“사생아 왕자, 사생아 왕자가 나타났다!”
보초병이 다급히 소리치자 북소리가 울리며 근방에서 카드놀이를 하던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감히 아르투르에게 다가올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다른 동료들이 모여들길 기다렸다. 일행들은 먼저 공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아르투르가 손을 내저어 그들을 저지했다.
“워, 워, 워. 다들 진정해라. 나에 대해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문이 아니라 진짜인 걸 우리 눈으로 봤다! 이 괴물아! 대장님께 얼른 지원 요청해!”
아르투르 일행은 처음에는 무기를 뽑아들고 똑같이 경계했지만, 그들을 조금 주의 깊게 살핀 뒤로는 긴장이 풀려 웃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도저히 싸울 준비가 된 군인이라고 볼 수 없던 까닭이었다. 녹슨 무기를 들고 대열을 흐트러뜨린 채, 손발을 부르르 떠는 자들이 얼마나 많건 자신들의 상대는 못될 터였다.
힐데군드 역시 긴장감 없는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도끼 던져도 돼?”
“아니,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기다려. 애들이 뭔 지나 알아보자고. 어차피 싸워도 이길 것 같은데.”
“그러지 뭐. 애네 랑은 싸워봐야 별로 재미도 없어 보이네.”
일행은 적들을 비웃으며 모두 모여들길 기다렸다. 얼마 뒤, 중무장한 중년의 사내가 비교적 정예 티가 나는 수십의 중장 보병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누구의 습격이냐! 안토니오!”
장교의 말에 앞장서던 보초병이 답했다.
“아르투르, 기사 아르투르가 나타났습니다!”
보초병은 바르르 떨면서 아르투르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고, 달려온 장교는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반갑소. 교황 성하의 명을 받아서 온 아르투르라고 하오. 당신들이 누군지 알고 싶은데.”
사내의 눈빛에는 적의와 당혹스러움이 뒤섞여있었다. 아르투르는 그가 자신에게 원한이 있으리란 걸 직감했다. 중년 사내는 자신과 일행들을 살펴본 후, 함성을 질렀다.
“제 1 백인대! 모두 무기 내려!”
오합지졸같던 병사들은 사내의 명령에 모두 일사분란하게 무기를 내렸다. 그러자 아르투르 일행도 칼날을 아래로 내려 화답했다.
“쯧, 우린 피오렌치아 정부의 잔존병력들이오. 무기부터 뽑은 건 사과드리겠소. 하지만 공에게 죽은 동료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 거니 양해해주시오. 사실 공을 뵌 게 썩 기분이 좋진 않다오.”
아르투르는 자신이 두라노의 독재관으로 있을 시절, 피오렌치아 군대와 몇 번 접전을 벌였던 것을 떠올렸다. 피오렌치아 병사들의 숫자는 정말 많았지만, 깃발을 빼앗기고도 꿈쩍하지 않는 굼뜨고 겁 많은 군대였던 것이 기억났다.
“자네의 입장을 이해하네.”
“이해하신다고? 정말로?”
레니에는 냉소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뭐, 되었소. 교황 성하의 사절이라고 하셨으면 증거는 가져오셨겠지?”
“증거랄 것은 없다만.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명예에 걸고 맹세할 수는 있다.”
레니에는 삐딱한 자세를 취하며 아르투르를 노려보았다.
“나리. 그건 이 동네에선 아무도 안 믿소. 사람 말을 믿는다면 그건 바보지. 증거를 보여주시오. 없다면 우리랑은 관련 없는 분이니까 썩 떠나시고.”
아르투르는 자신이 정중한 태도를 취했음에도 쌀쌀맞게 행동하는 레니에의 행동이 무례하다고 여겼지만, 적어도 그런 기분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쩌겠는가. 자신이 그의 부하들을 여럿 죽인 게 분명한데. 모두가 전쟁의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르투르 공은 교황 성하께서 보내신 게 맞아. 레니에 대장. 들여보내줘.”
도중에, 병사들 사이에서 장신의 젊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녀의 대답에 레니에는 눈쌀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썩 내키진 않지만… 샤를로트 아가씨께서 저희에게 거짓말하실 리도 없겠지요.”
레니에는 눈을 내리깔더니, 뒤로 돌아서 진지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들어오셔도 좋습니다. 다시 소개드리지요. 저는 가장 아름다운 도시, 위대한 피오렌치아의 정규군단의 제 1 백인대장, 레니에라고 합니다. 현재 연락이 닿는 피오렌치아 군의 최선임 장교로서, 임시 군 통수권자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즉, 지금은 피오렌치아 정부의 대표자 역할도 겸하고 있습니다. 들어오시지요. 논의드리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