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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들은 쉬는 시간에는 이렇게 막힘없이 어울렸다. 각자의 생각과 신분, 문화는 모두 달랐지만 그들은 전사였고, 무예는 공통의 화제가 될 수 있었다. 무기를 이용한 대련과 하루가 끝날 때마다 벌이는 만찬은 몸과 정신이 모두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하, 도련님. 나를 이렇게 밀어붙인 건 칭찬해주지. 건방질만 해. 아주 좋다고!”
바닥을 나뒹구는 토르스탄은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씩 웃었다. 강적을 만났다는 희열감이 드러난다.
“덩치만 큰 근육 돼지인줄 알았더니, 제법이구나.”
“이제부터가 진짜다!”
초면에 서로 욕설을 내뱉었던 아르투르와 토르스탄 두 사람은 이제 친근한 사이가 되었고, 적의를 불태우던 카밀도 북구인들이 그의 궁술을 칭찬하며 친한 척해오자 식사 자리를 함께 하는 정도의 호의는 보여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식사 내내 말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금방 먹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힐데군드가 불쾌감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이. 전쟁에서 서로 죽고 죽인 거 가지고 뭘 그렇게 예민해?”
힐데군드의 얼굴엔 술기운이 붉게 달아올라있었지만,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응? 말해보라고, 궁금하다니까.”
아르투르가 그만하란 시선을 내보내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레오폴트만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보일 뿐.
“저기요…? 누나? 저희 땅에 오신 지 얼마 안돼서 그러신 것 같은데, 불편한 주제는 서로 꺼내지 않는 것이….”
카이의 조심스러운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힐데군드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럼 와서 분위기나 박살 내지 말든가. 난 오늘은 꼭 대답을 들어야겠어. 이 늙은이가 왜 항상 띠꺼운 눈으로 바라봐서 내 기분을 더럽게 하는데?”
그에 아르투르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힐데군드, 카밀은 내 부하다. 내게 보이는 존중만큼 그를 존중할 것을 요구….”
자리에서 일어나 따지려는 아르투르를 토르스탄이 붙잡았다. 그가 입모양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도련님, 일단 힐데군드를 믿어봐. 지금 끼어들어봐야 자기가 무시당했다는 느낌만 더 크게 받을 거야. 그럼 저 성질 더러운 년은 칼부터 뽑을 거라고. 이제 잘 알 거 아냐.’
아르투르가 머뭇거리는 새, 카밀이 힐데군드에게 답했다.
“꼭 알고 싶소?”
“그래야 네가 날 무시할 때마다 대가릴 쪼개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카밀.
“그럼 이것만 답해드리지. 내가 당신들을 보자마자 화살을 날리지 않은 것, 친한 척이나마 해보려고 했던 이유는 단 하나! 주군의 손님들이기 때문이오. 왜 화를 내냐고? 당신네 부모들이 우리 땅에 와서 뭘 했는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소리를 못하겠지.”
힐데군드는 시시한 듯,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뭐야,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희 또한 너무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았나? 너흰 전쟁에서 이겼고 우리를 많이 죽였지만 우린 아무도 너흴 미워하지 않아. 삶이란 원래 먹고 먹히는 거지. 당연한 것 아닌가?”
카밀은 뒤틀린 미소를 유지하며 신랄한 어조로 답했다.
“더 솔직해질까? 너희들은 용병이니, 상인이니 하지만 다 거짓말이지. 너흰 그냥 풍요로운 남쪽 땅이 탐나잖아. 그리고 우리에 대한 정보를 얻고 돌아가서 동족들에게 우리의 약점에 대해서 모두 알려주겠지. 응? 안 그래?”
카밀은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며 힐데군드를 노려봤다. 순간 엄청난 긴장감이 주변을 휘감았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먼저 공격을 하면, 곧장 주변으로 싸움이 번져나갈 것이 뻔했다.
“에이, 그런 싱거운 이유일 줄은 몰랐네. 진작 그렇게 말했으면 됐잖아.”
힐데군드는 기지개를 피면서 도로 시선을 돌렸다.
“꼬맹아, 우리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더라?”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치는 케이.
“집채 만한 짐승에 대한 이야길 하고 있었죠!”
“아, 맞아. 내가 살던 곳 근처에는 맘모스라는 짐승이 살았거든? 진짜 크다? 엄-어어엄청나게 커서 말인데….”
힐데군드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가서 도로 자신의 첫 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고, 둘러 앉아있던 사람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긴장감은 단숨에 해소되었지만, 카밀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와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아르투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레오폴트가 말했다.
“왜 네 부하가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허락해 준거냐?”
“카밀은 우리 아버지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주었고, 북구인들과의 싸움에 젊음을 바쳤어. 자기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지.”
“고드프루아나 내 부하들도 카밀과 다를 바 없는 심정이었을 거다. 내가 닥치라고 해서 조용히 있는 거지. 하여간, 네 방식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하지만 이런 싸움이 벌어질 만한 빌미는 없었으면 한다. 저 북구인들, 아직 쓸모가 많거든.”
되묻는 아르투르.
“저 북구인들, 카밀의 말대로 밀정일수도 있어.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레오폴트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몸매 좋은 야만인이랑 신이 내린 짝처럼 노닥거리는 게 누군데. 너야말로 그 여자한테 너무 깊이 빠지지 마라. 일찍 제거하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봐. 돌아가서 북구인들을 이끌게 놔두기에는 너무 똑똑하고 강한 여자야.”
아르투르는 조금 불쾌한 목소리를 드러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네 생각대로면 저들과 어울려선 안 되는 것 아닌가? 우리의 관습과 생각을 배워 갈 텐데.”
레오폴트는 자신의 머리를 툭툭 손가락으로 찔렀다.
“걔들이 우릴 배우는 게 빠를까? 우리가 걔들을 배우는 게 빠를까? 자신감을 가져. 형제. 우리가 재들보다 훨씬 머리 쓰는데 익숙하다고, 우린 제왕학도 배웠잖아. 만약 저 녀석들이 진짜 침공에 앞선 사전 답사를 하러 온 걸지라도, 우리도 놈들을 통해 배우면 그만이야.”
“맞는 말이야. 아무튼, 난 카밀을 좀 만나고 오겠다.”
재빨리 뒤따라가자. 카밀이 홀로 척후활동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카밀이 화살을 겨누었음에도, 아르투르는 천천히 나무 옆에서 걸어 나왔다.
“모닥불에 앉아서 편히 쉬고 있을 법도 한데, 자넨 늘 야간 경계를 자원하더군. 이유를 좀 알고 싶네.”
카밀은 조준했던 활을 아래로 내렸다.
“아, 주군이시군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만, 단지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질 않더군요.”
“아니지. 내가 수많은 병사들을 봤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로 야간 경계를 자원하는 사람은 자네밖에 못 봤어. 우린 친구가 아닌가? 말해주게.”
카밀은 한숨을 쉰다.
“그렇게 물어보시니 피할 도리가 없군요. 젊은 시절, 북구인들에게 하도 야습을 많이 받다보니 체득된 습관입니다. 놈들이 우리보다 밤눈이 훨씬 좋고, 용맹하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잘 움직이거든요. 그래서 신병들에게 일을 맡겨두면 항상 난리가 났지요.”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정말 고생이 많았군. 자네가 편협한 사람이 아닌데, 항상 거리를 두는 이유가 궁금했네. 어쨌든,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내가 북구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견디기 힘든가?”
카밀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친구로서 말하건대 나를 떠나있어도 좋네. 돌아오는 것도 자네의 선택이고. 자네는 내게 영원한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지만, 내가 그 맹세에서 자네를 풀어주도록 하지.”
하지만 카밀은 이번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참을 수 없는 건 제 원수들의 자손들과 주군께서 어울리시는 게 아니라, 주군께서 그들에게 놀아나시는 겁니다. 제가 옆에 있어야 그것을 막지요. 주군! 북구놈들을 단순히 무식한 야만인 정도로 생각하셔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아주 교활한 자들로, 계략과 임기응변에 모두 능한 자들입니다. 숱한 기사들이 그들을 과소평가하다가 미래를 잃었습니다. 주군께서도 예외가 아니실 수 없습니다.”
그의 말에는 아르투르도 진지한 태도를 취했다.
“우리와 동행중인 북구인들이 밀정으로서 왔다고 확신하는가?”
“문명 세계와 야만인들 간의 전쟁이 재개되면,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국 밀정이 될 겁니다. 그들이 누구 편을 들 지야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들 가운데 아군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니면 아예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함으로서 전쟁 자체를 막을 수 있을 수도 있겠지. 카밀, 한번 깊게 생각해보게. 그들과의 친교는 자산이 될 지도 몰라.”
아르투르의 열변을 들은 카밀은 오래도록 숙고하다, 덤덤한 목소리로 답변을 내놓았다.
“저는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피에 굶주린 신들을 섬기는 저 야만인들이 문명의 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르투르는 내심 실망했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저는 오십이 다 되어가는 옛날 사람이고, 배운 것도 없지요. 주군께선 젊고 영명하십니다. 저 같은 늙은이가 모르는 방법을 아실수도 있겠지요. 저는 북구인들은 절대 믿지 않을 겁니다만, 주군께서 가능성이 있다고 보신다면 그렇게 믿겠습니다.”
“믿어주어서 고맙네. 그 신뢰에 부응할 수 있는 결과물을 내놓겠네.”
“결과가 좋다면 모든 평가가 좋을 테지요. 군주란 무릇 결과에 책임을 지는 자리니까요.”
***
그 뒤로도 일행은 여정을 계속 했다. 그들은 해가 뜰 때 말에 올라, 해가 질 때까지 달렸는데, 중간 중간의 짧은 휴식 시간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북구인들은 처음에는 이렇게 말을 타고 쾌속으로 이동하는 걸 낯설어했지만, 쾌속마를 다루는 감각을 놀랍도록 빨리 배웠다.
아르투르 역시 자신의 곁에서 함께 말을 달리는 힐데군드를 보며 감탄했다.
“너, 이전에 말 타는 적 제대로 배운 적 없다며? 쾌속마들은 성질이 난폭해서 다루기 쉽지 않은데 벌써부터 몰 줄 아네?”
힐데군드는 피식 웃으며 말을 재촉해서 속도를 높였다.
“뭘, 온순한 초식동물을 모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맘모스나 다이어울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짐승을 다루는 방법은 그놈들이나 말이나 똑같아. 상대를 압도하고, 잘 달래면 되는 일이라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었다면 종자들이 승마술을 배우는데 애먹을 이유가 없었다. 승마는 말을 누를 힘과 의지, 무엇보다 말의 고충을 알아줄 섬세함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르투르는 귀족들도 오랫동안 공들여 배우는 기에를 몇 번의 시행착오만 겪은 뒤 해내는 북구인들이 놀라웠다.
‘이들은 원시의 자연에서 살아남은 거친 생존자들이고, 혈관을 따라 용들의 피가 흐르는 강한 자들이야. 어쩌면 내가 기사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도 이들의 피가 흐르는 덕일지도.’
힐데군드는 자신을 앞질러 질주해갔다. 휘날리는 그녀의 백금발 머리카락을 보며, 아르투르는 문득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듣기로는 힐데군드 같은 위대한 여전사였다고 했다. 지금은 어떨지 궁금했다. 죽었을까, 살아있을까. 살아있다면 언제나 자신을 낳아준 사람은 한번은 보게 되길 바랬다.
일행이 그렇게 말을 달려갈 때, 길가 반대편에는 한 무리의 짐마차 행렬이 나타났다. 행색을 보니 피난민들이 분명했다.
“당신들은 어디서 무슨 길이오?”
짐마차 무리의 선두에 있는 신사가 아르투르를 보며 모자를 벗어 인사한다.
“피오렌치아에서 오던 길입니다. 나리.”
“광신도 사이비 사제가 정부를 장악했다는 소식은 들었소. 하지만 고향을 버리고 도망쳐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한탄하는 신사.
“예. 그렇다마다요. 지금 피오렌치아는 미쳐 돌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