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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와 그를 찾아온 청년은 한적한 골목을 걸었다. 청년은 정말이지 평범하다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자였다. 키와 체격, 복장, 말의 억양 모두 어느 도시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동네 청년이었다. 그대로 과일 장수나 종업원을 해도 모자람이 없으리라.
“자네가 이단심판관이라니, 믿기질 않는데.”
이단심판관들은 계층을 막론하고 존경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교황의 비수이자, 이단들의 공포였으며, 간혹 나타나던 불가사의한 공포에 대적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활동 내역은 왕궁 내에서도 극비로 처리되어, 아르투르조차 어렴풋이 소문만 들었을 뿐 정확한 실상을 알지는 못했다.
“진홍십자가가 새겨진 순백의 옷을 입은 채,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는 광기 어린 성직자를 생각하셨나보군요.”
“부정하진 않겠어.”
아무도 없는 한적한 새벽의 골목길을 따라 걷는 두 사람.
“짐작하시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시겠지요. 저희는 직업 특성상 많은 증오를 받고, 특히 권력자들의 눈 밖에 보기 좋습니다. 신원을 드러내봐야 표적 밖에 되질 않는걸요. 그러니 의심할 수 없는 모습으로 움직여야지요.”
“마냥 애먼 사람들만 죽이는 모습도 사실과는 멀 것 같긴 하군.”
“정확히 보셨습니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기죠. 그러니 완전히 틀린 인상은 아닙니다. 아무튼, 지금은 교황 성하의 명을 받아왔을 뿐입니다.”
발걸음을 멈추는 이단심판관.
“제가 성혈기사단의 성채를 방문해보니 잿더미와 이교도의 주술이 사용된 흔적만 남아있더군요.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아르투르 역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네는 숨겨진 신비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혹은 얼마나 아는 것이 허락되는가?”
“흠. 저희는 세상에 신비가 풀려나기 전부터 마법과 기적을 쫓아다니던 이들이란 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왕자님의 아버지를 비롯해, 군주들이 저희의 초법적인 활동을 묵인하던 건 단순한 이단 색출 때문이 아닙니다. 아직 마법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고, 그에 대응할 사람들이 필요한 까닭이었죠.”
아르투르는 그의 눈동자와 목소리에서 기만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자네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을 수 있겠군. 필요한 만큼 알려주겠어.”
아르투르는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는 모두 말해주었다. 기사단은 악마에 홀려 타락해있었으며, 그들이 악마를 소환해내서 자신이 처치한 것, 그를 처치하자 신비의 봉인이 풀려난 것까지 모두 말이다. 이단심판관은 이야기를 듣고는 그저 문제의 심각성에 인상을 찌푸릴 뿐, 말이 되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렇게 되서 마법이 도로 강해진 것이었군요. 더 이상 마법을 두고 미신이라고 속이긴 더욱 어려워 질 겁니다.”
“그렇겠지. 옛 신화나 전설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의 숫자도 많아질 거고, 그렇게 되면 종말의 예언을 믿는 자들도 늘어 날거야.”
이단심판관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아까 보신 것 같은 사태가 사방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신의 뜻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며, 썩어빠진 세상을 부수고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야한다는 자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있지요. 이대로라면 정치적 혼란 때문에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대처가 불가능 할 겁니다.”
아르투르 역시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흥분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 귀족과 성직자들이 신의 이름하에 부조리를 정당화해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정말로 신비한 일이 벌어짐에도 제대로 해명을 못하니 믿음이 흔들리는 건 당연하지. 그렇지 않아도 불만이 가득 쌓이고 있었으니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지. 이번 기회에 크게 달라질 필요가 있어.”
아르투르의 대답을 들은 청년은 의중을 알기 힘든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부분의 군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소요 사태로 인해 질서 유지가 버거워진 지역의 군주들은 벌써 전통적인 방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칼과 교수대를 돌려 말하는 것이렷다.
“당장은 민심을 억누르는 효과가 있겠지. 하지만 결국은 종말론자들이 득세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는 일이 될 거야. 이번 도시에서 본 것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겠지. 우리들이 자주 잊는 게 있다면, 땅 파먹고 사는 농민들도 사람이란 걸세. 그들도 생각을 할 줄 알고 믿음을 가질 줄 알지.”
“교황 성하께서 우려하시고 계신 지점도 동일합니다. 최대한 힘을 써보고 계시지만, 교회의 힘만으론 한계가 뚜렷한 상황이어서요. 특히 요즘 이교도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습니다. 북방에선 강력한 전사 여왕이 나타나 통합을 진행 중이고, 동쪽의 대초원에선 유목민 무리가 준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아르투르가 턱을 괸 채 답했다.
“절대 좋은 소식은 아니군. 특히 북방의 위협은 아주 실질적인 문제야. 우리는 서둘러 평화를 이룩하고 모두가 힘을 합쳐야만 하네. 더군다나, 내 생각엔 진짜 큰 싸움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어.”
차가운 웃음을 흘리는 이단심판관이 날카롭게 빈정거렸다.
“식견이 있는 지배층이라면 말씀하신 것에 모두 동의할 겁니다. 문제는 방법입니다. 왕들은 전쟁 중이고, 교회는 탐욕으로 제 기능을 잃었습니다. 왕족부터 농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로를 불신하며 자신의 안위만 챙기려드는데, 어떻게 통합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단호한 목소리로 답하는 아르투르.
“희망이지. 언젠가는 이 고통이 끝날 거라는 희망만이 그들을 다시 하나로 모을 수 있을 거야. 그걸 위해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걸세.”
아르투르의 대답을 들은 이단심판관은 경쾌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하하. 그래요. 이 시기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겠지요. 더 이상 공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교황 성하의 전언을 전하겠습니다. 공께서는 고귀한 혈통과 업적,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교회의 축복 아래 레무리아의 왕으로서 즉위하여 서부 대륙의 혼란을 끝내주십시오.”
순간 아르투르의 마음은 날아갈 듯이 기뻤지만, 무표정한 태도를 유지했다.
“정치판에서 대가 없는 호의란 없지. 조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만.”
“물론입니다. 교회의 독립성을 존중해주시고, 정통 신앙의 확립을 약속해주시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대관에 앞서 지금 레무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들을 종식시켜주십시오.”
아르투르는 조건을 듣고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건 교황 성하께서 그저 방랑기사에 불과한 나를 왕으로 대관시켜주는 조건치고는 너무 후한 것 같은데.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닌가?”
“저는 정치가가 아니기에 자세한 점은 모릅니다. 단지 성하께서 그만큼 공을 높이 평가하고 계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아르투르는 그의 말이 터무니없다고 여겨 슬쩍 웃었다, 되도 않는 소리다.
“일단은 그렇게 믿겠네. 분명히 교황 성하께서 그런 판단을 내리신 이유도 있고, 상황이 달라지면 조건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아네만, 나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는 좋은 제안이거든. 좋아. 구체적으로 혼란을 어떻게 종식시켜주면 되겠나?”
“우선 피오렌치아로 가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있습니다.”
이단심판관은 품 안에서 한 장의 봉투를 꺼내 건네주었다. 열어보니 금실로 봉인된 편지가 있어 즉각 읽어 내려갔다. 아르투르는 미사어구를 뺀 채 대략적인 내용을 살폈다.
‘피오렌치아에서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이비 교주가 대중을 선동해서 집권했고, 빈번한 유혈 사태를 벌이고 있으니 와서 자신이 정권을 잡을 수 있게 도와 달라. 이전에 호의를 베풀었으니 이제 너도 호의를 베풀 때다. 네 친구 샤를로트가.‘
마지막 구절을 읽은 아르투르는 편지를 접어 봉투에 도로 넣었다.
“자넨 교황 성하를 위해 일한다고 하지 않았나? 왜 피오레 가문 사람 편지를 가져온 건가?”
“성하를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제 활동을 지원해주시는 후원자분들의 작은 부탁을 들어드릴 순 있지요. 그 정도는 성하께서도 눈감아 주시는 부분입니다.”
어차피 피오렌치아의 혼란을 수습하지 않고는 레무리아의 안정을 가져올 수는 없을 터였다. 이건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단심판관이 가져온 안건을 우선순위를 위로 올리는 정도였다. 겸사겸사 샤를로트에게 받았던 도움도 갚을 수 있다면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하는 셈이었다.
판단을 마친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날이 밝는 대로 피오렌치아로 출발하지. 샤를로트에게 진 빚이 있으니 가능한 한 우호적으로 처리하겠지만, 내 목적은 피오레 가문의 권력 사수를 돕는 일이 아니라 혼란을 진정시키는 것 자체니까 말이야. 이번 사건처럼 민중들의 편을 들어 해결할 수도 있지. 괜찮겠나?”
“그 부분은 샤를로트 아가씨와 해결하시지요. 저는 편지를 전달해드리는 것으로 그분의 호의에 보답했습니다. 아, 그 돼지 새끼 같은 주교는 제게 넘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르투르는 팔짱을 끼며 되묻는다.
“주교가 저지른 비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 있겠나? 이단심판관은 곧 교황 성하의 대리인이지. 자네가 약속하면, 나는 성하의 약속이라고 생각할걸세.”
“물론입니다. 피오레 가문이 이 도시를 지배하려고 임명한 사람이니, 그들이 실각한 지금은 굳이 앉혀둘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결정할 사항은 아니지만, 성하께서도 선처하실 이유가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그러고도 처벌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성하와 직접 이야기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르투르는 미꾸라지처럼 책임을 피해가려는 청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래. 어차피 성직자를 세속 법으로 재판할 수도 없는 일이고, 교회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니 따라야겠지. 하지만 성하께는 내 의사를 잘 전달해드리게. 나는 누구에게나 처음에는 믿음을 준다네. 하지만 그게 한번 깨진다면 굉장히 까칠하고 완고하게 굴거든.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청년 역시 알 수 없는 미소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이름도 밝히지 않은 사람의 약속을 믿을 수 있을까?”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청년,
“저희는 누구에게도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이 알려지면 저주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희 이단심판관들은 서약으로 묶인 형제자매들이자, 죽을 때까지 맹세를 지키는 자들이니까요. 교회의 적이 아니라면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아르투르.
“흠. 어쩐지 교회와 대적하지 말라는 경고로 들리는 걸.”
“공께서도 약속을 저버리지 말라는 경고를 하신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서로가 필요하고, 같은 정치적 이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경고는 경고로 그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아르투르는 쓰게 웃었다.
“이 능구렁이 같은 친구 같으니. 한 마디도 지지 않겠다는거군.”
“교회는 오직 신의 말을 떠받드는 곳입니다. 군주에게 고개를 숙일 이유는 없지요.”
“그래. 하지만 군주 역시 교회에 고개를 숙일 이유는 없고.”
“지당하십니다. 그러니 서로의 영역을 존중한다면 교권과 왕권은 세상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이 되지 않겠습니까?”
“동의하네.”
아르투르는 내심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는 여러 군주들이 교회와의 관계에 많은 힘을 쏟고, 때로는 뜻대로 되지 않아 격분하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왕이 된 뒤에나 따질 일이다. 상대 역시 그걸 아는 지, 도로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피오렌치아로 도착하실 때쯤에는 저희 요원들을 통해 현지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게 조치해두지요. 더 말씀하실 사항이 있으십니까?”
아르투르는 또렷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자네가 마음에 드네. 당당하게 내게 맞서던 이들은, 적어도 친한 척하다가 뒤에서 칼을 꽂는 비열한 수를 쓰진 않거든. 그러니 가명이라도 알고 싶네.”
“저도 공이 마음에 드니 특별히 말씀 드려야겠군요. 혹시 다시 뵙게 된다면, 그 때는 피데스라고 불러주십시오.”
“신앙이란 뜻이군. 그렇게 하지. 피데스. 자네의 여정에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다음에 뵐 때는 공이 아닌, 폐하로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피데스는 말을 남긴 후, 문자 그대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르투르는 자신이 기적, 혹은 마법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드러내는 것이 신뢰의 뜻인지, 위협의 뜻인지 고민했다.
‘둘 다겠지.’
원래 교회의 역할은 왕권을 견제하여 폭군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것 아닌가.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터였다. 아르투르는 숙소로 돌아가 일행들과 상황을 공유했다.
“왕위 제안이라, 아주 좋은 걸 받았군. 그렇다면 내가 기꺼이 도와야겠지.”
“고맙다. 레오폴트. 언제나 날 지지해주는 건 너뿐이다.”
두 사람은 간만에 진심어린 미소를 지으며 서로 포옹했다. 북구인들은 금전적 보상도 약속 받았고 피오렌치아가 무역 도시로 유명한 곳이었기에 따라갈 동기가 충분했다. 그들은 정비를 마친 후, 새벽바람을 쬐며 피오렌치아를 향한 여정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