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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을 파악한 다른 기사들도 잠에서 깨어나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르투르는 먼저 바람처럼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려 저택의 현관에 이르렀다. 그곳에선 집주인 일가가 낯선 남녀들을 정중히 대우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살이 뒤룩뒤룩 찐 노인네와 진한 화장을 한 수려한 용모의 젊은 여인 두 사람이었는데, 모두 속옷만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더불어, 노인은 뭔가 가득 담은 자루도 가져왔다.
“당신이 아르투르 공이군! 드디어 살았어! 신이시여!”
뚱뚱한 노인은 아르투르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뚱거리며 아르투르에게 달려왔다.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반나체의 상태의 노인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걸 본 아르투르는 깊은 혐오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어깨로 들이받았다.
“떨어져라 이 혐오스런 놈아!”
“아아악! 사람 살려! 내 코, 내 코!”
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고, 힐데군드는 상황을 보며 깔깔 웃어댔다. 그런데 케이와 집주인의 표정이 실로 난처해보였다.
“마스터. 그, 그 분이 주교 각하신데요?”
“뭐? 이 돼지가?”
아르투르는 자신 앞에서 나뒹구는 볼 폼 없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보아온 주교들과는 단 하나의 공통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시대에 성직자들은 지식인이자 행정가로서 통치 계급의 일원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주교쯤 된다면 남들이 인정할만한 장점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자가 내비치는 자질은 주교는 무슨, 시골 성직자의 자리도 과분해보였다.
주교는 코피를 막으며 바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돼, 돼지라니! 예의를 갖추어라!! 나는 타르나의 주교다! 명성 높은 기사라고 들었건만, 어찌 이토록 큰 무례를 저지른단 말인가?!”
아르투르는 하도 어이가 없어 혼란스런 표정으로 이 사내가 들고 온 자루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했는데, 그중에는 미사 중에 사용되는 은제 식기와 금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딱 봐도 값나가는 성인들의 조각상이 있었다.
“주교의 재산을 훔쳐나온 도둑이 아니고?”
눈앞의 노인은 억울한 듯 손가락을 내밀었다. 주교의 인장 반지가 손가락에 딱 맞게 끼워져 있었다.
“자, 이제 되었는가?! 이제 신의 종으로서 명하니 나를 지키게!”
아르투르는 그의 말에는 콧방귀만 끼며, 불신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교를 노려보았다. 아르투르의 기세에 눌린 주교는 겁먹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당신이 주교라고 칩시다. 그러면 저 여자들은 뭐고, 왜 야밤중에 속옷만 입고 내게 도주해 온 거요?”
“그, 그건 저 자매들이 신앙에 고민이 있다고 해서…”
주교는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자, 말을 돌렸다.
“….성직자도 사람이야! 뭘 그런 눈으로 본단 말인가! 우리도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아무튼, 날 지켜주면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주겠네. 기사들은 서임을 받으며 정통 신앙과 교회를 수호하기로 맹세하지. 그걸 잊지는 않았겠지?”
아르투르는 모멸이 담긴 시선을 보내며 차분히 상황을 종합했다. 도시에는 폭동이 벌어지고 있다, 도시의 주교는 욕망에 찌들어서 아무런 도덕적인 권위가 없는 인물이다, 밤중에 매춘부들과 함께 재산만 가지고 도망쳐왔다.
세 가지 사실을 종합해보니 상황이 명확해졌다.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당신이 이곳의 주교가 맞나? 고위 성직자를 사칭하는 건 죽을 죄라는 건 알겠지.”
“내, 내가 이 도시의 주교가 맞소.”
이런 놈이 주교면 그냥 신실한 동네 소년을 데려다가 교황의 삼중관을 씌워줘도 될 판이었다.
‘이놈이 군중들에게 맞아죽게 내버려두면 나를 포함해서 관련자가 모두 곤란해지겠지. 마음 같아서는 그냥 몇 대 쥐어박고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고 싶은데….’
“눈 안돌려? 확 뽑아버린다?”
힐데군드의 짜증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다짜고짜 주교에게 다가가 뺨을 때렸다.
“컥!”
주교는 비명을 내지르며 부서진 이빨을 토해냈다.
“아, 아악! 살려줘!”
“씨발. 니 시선이 몸에 닿을 때마다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잖아. 내 기분이 좆같으니까 일단 좀 처 맞자.”
아르투르는 피식 웃고는 죽게만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고, 힐데군드는 그 말을 알아듣고 맞아도 티가 안 나는 곳만 골라 때렸다. 그 사이, 매춘부들은 아르투르의 눈치를 보더니 보물을 챙긴 자루에서 조심스럽게 금화 몇 닢을 챙겨서 빠져나갔다.
아르투르가 이 상황을 수습할 궁리를 하던 중, 카밀이 저택의 문을 거칠게 발로 차며 들어왔다.
“주군, 성난 군중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선두에는 빡빡이 수도사가 있더군요. 낮에 이상한 종말론을 외치던 사이비 놈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군중의 함성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저곳이다! 형제들이여! 거짓 선지자가 저택으로 들어갔다! 쳐들어가자!”
“끌어내라!”
“와아아아아!”
함성을 들은 아르투르를 재차 혀를 찼다. 얼마나 인망이 없고 원성을 많이 샀으면 이런 지경이 되었겠는가. 그는 다시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교를 바라봤다.
“주교 각하. 무슨 짓을 했는지 순순히 부시오.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 말이지.”
이미 힐데군드에게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은 주교는 울상이 되어있었고, 흐느끼듯 말했다.
“난, 난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남들이 다 하는 수준으로만 했다고! 돈 받고 사면해주고, 축복 좀 해주고, 윗선에도 올려야 되니까 헌금 좀 빡세게 거두고….”
아르투르의 표정은 단호했다.
“남들이 하는 만큼만 했으면 이 꼴이 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뭘 더 잘못했는지 말해보시오.”
힐데군드는 합을 맞추어 주교의 팔을 뒤로 꺾어버렸다.
“아아아악!”
“괜찮아~ 안 죽어. 안 죽어. 사람 목숨 질기거든?”
힐데군드는 아르투르가 계속하란 듯 손짓하자 이번엔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결국 주교는 한 대 맞을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하나씩 토해냈는데, 스스로 실토한 죄목만 여덟 개에 달했다. 모두 성직자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들이었다.
“이, 이곳에선 다들 그런단 말이다! 돈을 얼마나 주고 이 자릴 차지했는데 본전은 뽑아야 할 거 아냐!”
억울한 듯 외치는 주교를 보며 아르투르는 이제 혐오감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렇게 살 거면 성직자 말고 딴 직업을 찾았어야지. 혐오스러운 놈. 내 맹세만 아니었다면 직접 너를 죽였을 거다.”
군중들이 저택의 정원을 넘어 밀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투르는 그들을 남겨둔 채, 힐데군드와 시라노의 호위를 양 옆에 받으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케이와 카밀은 뒤를 따랐다.
“진압에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레오폴트의 말에 아르투르는 손을 내저었다.
“뭐, 됐어. 무력 없이 해결해볼게.”
북구인들은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듣고는 싱겁다는 표정으로 빠졌고, 레오폴트와 기사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대기하고 있었다. 아르투르를 따라 걸어 나가는 힐데군드가 말했다.
“야, 저 돼지, 그냥 재들한테 던져주자.”
아르투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저 돼지는 꿀꿀대다가 맞아죽겠지. 그럼 여러 사람 피곤해진다고.”
“뭐가 문젠데? 원래 원한이 있는 사람들끼리 풀어야 할 거 아냐?”
그녀에게 답해준 건 케이였다.
“음… 정말로 주교가 죽어버리면 마스터의 입장이 난처해지거든요. 어쨌든 기사는 교회를 지키기로 맹세했는데, 도움을 매몰차게 거절했다는 소식이 퍼질 테니까요. 더군다나 주교가 맞아죽으면 분명히 이 사건을 조용히 덮고 싶어 할 교회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시끄러워지고, 다치는 사람들이 여럿 나올 거예요. 마스터는 사전에 그걸 막으려는 거지요.”
시라노가 덧붙였다.
“겸사겸사 교회와 민중, 양측으로부터 명성도 얻으시고 말입니다.”
힐데군드에게 문명인들의 제도에는 낯설었지만 요점은 단순히 파악하는 재주가 있던 탓에 상황을 납득했다. 그녀는 상황을 이해하고 피식 웃었다.
“이런데서 자랐으니까 항상 복잡하게 보는구나. 뭐, 난 어느 쪽이든 재밌으니까 따라갈래. 싸울 일이 생기면 더 좋지만.”
케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건 좀. 상대가 기껏해야 군중들인데 무력을 쓰고 싶진 않아요.”
일행이 저택 밖으로 나서자 빼곡히 몰려든 군중과 그들을 이끄는 수도사 출신의 선동가가 보였다. 그들은 몽둥이와 횃불을 들고 있었고, 숫자로부터 자신감을 얻고 있었지만, 완전무장한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춤했다.
하지만 선동가는 의기양양하게 아르투르를 향해 소리쳤다.
“비켜서시오! 심판을 방해한다면 당신들도 신의 진노를 피해가기 어려울 것이오! 주교를 내놓으시오!”
“주교를 내놓으시오!”
성난 군중이 수도사의 말에 따라 외쳤다. 그 와중, 아르투르는 선동가가 아닌 다른 군중을 냉철히 살펴보았다. 그들은 흥분에 도취되어있었지만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었고, 분노가 느껴지긴 했지만 아직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어보였다. 그는 앞으로 나서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나는 백인을 벤 아르투르라고 한다. 지금 주교는 나의 보호 아래 있어 내어줄 수 없지만, 너희의 이야기를 듣고 가능하다면 청을 들어주러왔다.”
선동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주교를 내놓으시오!”
이번에도 일부의 군중이 따라서 소리를 질렀지만, 이전처럼 거세진 않았다. 몰려든 사람들은 아르투르의 이름을 듣고 웅성거렸다.
“저분이 가장 낮은 자를 위해 싸운 기사분이시라고?”
“위대한 왕의 아들이라잖아. 좋으신 분 아닐까?”
아르투르의 명성은 잇단 사건을 거치며 제법 널리 알려진 편이었다. 그에 대한 이미지는 단편적이었지만 민중들 사이에선 평판이 아주 좋았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무적의 기사가 정의의 실현을 위해 편력중이라는 이야기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미담이었다.
“남들보다 큰 체격. 금발. 두 자루의 검. 저 청년이 아르투르 공이 맞는 것 같은데?”
“그럼 경칭부터 해야지! 이 사람아! 왕의 아들 아니여!”
“그른디 참말로 땅 파먹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도 들어 주는 겨?”
아르투르로 화제가 바뀌어가는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던 선동가는 뒤로 돌아 군중들을 꾸짖었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지금 중요한 것은 저 귀족이 누구냐가 아니오. 가짜 성직자를 벌해 다가오는 종말을 막는 게 중요하단 말이오!”
아르투르는 군중들의 격렬한 호응을 예상했지만, 군중들은 예상보다 훨씬 싸늘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오히려 선동가에게 성을 내었다.
“거, 입조심하쇼잉? 인기 좀 얻었다고 높으신 분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먼. 귀한 분이 직접 오셔서 우리 이야길 들어 주시겠다는데 초 치지 말라고.”
“아저씨.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집시다. 당신 말이 속이 시원해서 고개를 끄덕인거지, 세상이 망한다는 당신 이야길 믿고 따라온 게 아냐.”
결국 아르투르의 명성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의 수가 연설가를 따르는 자들보다 많아지자, 그들은 무리에서 쫓겨났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겠다고 했지요? 참말이지요?”
아르투르는 미소를 지으며 홀로 그들 사이로 들어가, 자신에게 말한 사람의 손을 꼭 붙잡으며 눈을 마주쳤다.
“나는 내가 내뱉은 말을 어긴 적이 없네. 자, 말해보게. 자네들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말이야.”
그러자 군중들은 무릎을 꿇고 자신들이 몰려온 까닭을 상세히 고해바쳤다. 그들의 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우리 모두의 삶은 고되고 나아질 희망이 없는데 윗 놈들은 우리를 등쳐먹고 잘 먹고 잘산다는 말이었다.
“저 주교 놈이 그 주범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규탄한 주교의 악덕은 그가 털어놓은 것 이상이었다. 단순한 부도덕한 수준이 아니라 사악한 중범죄들에 연루되어있었다. 유력 집안의 살인자를 사면해주고, 범죄 조직들의 뒤를 봐주었으며, 그 이윤을 상납 받은 공범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피를 흘린 건, 분명히 신께서 저놈의 악덕에 분노하신 것일게 분명합니다! 공께서도 그렇게 믿으시지요? 악한 자들을 벌해야만 합니다!”
아르투르는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하늘이 피를 흘린 날은 단지 쌓여있던 분노를 표출시킨 구실에 불과해보였다. 이들의 말대로라면 주교를 비롯한 참사회의 횡포가 도로 터져 나왔을 뿐이었다. 그러니, 정치는 정치로 해결할 문제였다.
“그 건에 대해선 잘 모르겠네. 하지만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건데, 모든 노력을 다해 저 부정한 자가 합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힘쓰겠네. 부디 나의 약속을 믿고 돌아 가달라고 부탁하고 싶네. 그렇게 해주겠는가?”
군중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믿어도 될지에 대한 의견을 공유했다. 아르투르의 명성이 아니었더라면 애초부터 거부했겠지만, 그들은 풍문이 전하는 아르투르의 평판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자신들 한명 한명과 눈을 마주치는 귀족이라면 혹시 믿어볼만 할지도 않을까?
“알겠습니다요. 나리. 꼭 약속한 바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내게 명예는 목숨보다 귀중한 것일세. 믿고 돌아가도 좋네.”
결국 군중은 아르투르의 진심 같은 태도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하나둘 자진 해산했다. 끝까지 반발하는 이들은 있었지만 자신들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귀가했다. 영리한 자들은 이번에도 귀족들의 음흉한 연기에 넘어갔다고 생각하며 도로 체념했다.
아르투르가 마지막으로 떠나는 사람을 바라보며 돌아설 때,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그에게 다가왔다.
“기다려주십시오. 아르투르 공.”
고도의 훈련을 받은 것 같은 사내의 발걸음을 본 아르투르의 몸은 본능적으로 긴장도를 끌어올렸다. 자객일지도 모르니 만반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좋았다.
“무슨 일인가?”
청년은 입가에 미소를 띈 채,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각도로 오른손바닥을 슬쩍 보여줬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지 않으십니까?”
진홍빛으로 도금된 십자가를 본 아르투르의 표정은 잠시 굳었다. 저것은 교황의 명령만을 따르는 이단심판관, 혹은 그에 준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에게만 내려지는 상징이었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침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던 참이었소. 따라오시오. 산책하며 이야기를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