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39화 (13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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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군드는 아르투르와 시선을 마주본 채,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줄 거라고 믿겠어.”

그녀의 눈동자는 푸른 보석처럼 맑았다. 이렇게 강인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아르투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돕겠어. 네가 만약 야만스런 관습에서 벗어나 우리의 일원이 되겠다면, 못해줄게 없지.”

“아니, 아니야. 너희의 일원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워보고 싶은 거야. 내 고향이 진저리가 나니까. 착각하지 마. 나는 여전히 북구인이고 그 땅의 사람들과 살아가는 방식은 존중해. 너희 방식은 너무 약하고, 거짓말만 가득하지.”

아르투르는 그녀의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그런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다짐했다. 지금은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 자체가 소중했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게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만약 그녀에게 야만스런 풍습을 완전히 버릴 수만 있게 만든다면, 이런 기분은 영원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답을 줄 일이었다. 어느 사이 동이 터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밤을 새었지만 여전히 거뜬했고, 서로 애정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한 차례의 사랑을 더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애정 어린 목소리로 거친 대화를 나누며 야영지로 돌아왔다. 그들을 반겨준 것은 에쿠잘루스의 갈기를 닦아주는 케이의 모습이었다. 소년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두 분, 아침부터 어디 다녀오세요?”

아르투르는 어색한 표정으로 답했다.

“할 이야기가 조금 있었지.”

힐데군드는 소리 내어 웃으며 아르투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른 한 손으론 허리를 감은 채.

“그으으래. 이야기 말이야.”

케이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아르투르는 뭐하냐는 듯한 무언의 압력을 보냈지만 힐데군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남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입을 맞추었다. 결국 연인 관계를 숨기고 싶던 아르투르의 의사와는 달리, 조만간 두 사람의 연애 행각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힐데군드의 애정 행각은 노골적이었고, 남들의 시선은 전혀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처음엔 난처해하던 아르투르도 결국 열정에 몸을 맡겼다.

“아르투르. 목숨은 덧없고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고.”

결국 사생아 왕자가 북방에서 온 여전사와 연인 관계를 맺었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아는 소문이 되어 퍼지게 되는 건 시간문제가 되었다.

***

아르투르 행렬은 주교구가 있는 “타르나”라는 이름의 소도시로 향했다. 인구수는 만 명 남짓이므로 도시치고는 큰 편이 아니었지만, 인구의 대다수가 농촌에 머무르는 걸 생각하면 도시가 형성되었다는 일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스무 명이 넘는 중무장한 사람들이 들어오면 도시가 어수선해질 법도 하지만, 일행이 성문을 통과한 뒤에도 별 다른 주목은 받지 못했다. 주민들은 길거리에 삼삼오오 모여, 사방에서 모여든 불길한 소식들을 전하고 있었다.

전쟁과 기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겨울 같은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불길한 소식들이 쉬지 않고 들려왔다. 사람들은 어째선지 날이 서 있었다. 사소한 일로도 시비가 붙어 고성을 높이는 일은 아주 흔했고, 그 중 몇몇은 진짜 폭력 사건으로 이어져서 경비병이 몰려오고서야 상황이 진정되었다.

“아주 어수선한데.”

사건자체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아르투르 일행이 도착해서 단 세 시간 만에 이 모든 풍경을 본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시장을 지나던 아르투르의 눈길은 사람들을 모아두고 연설하고 있는 수도승에게 향했다.

“하늘이 피를 흘린 까닭을 아십니까? 그것은 모두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의 통치자들이 죄악을 저질러서 신께서 노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러고도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신께서 우리를 직접 벌하실 것입니다!”

수도승의 모습은 꾀죄죄했으나 신념이 깃든 눈은 단호했다. 아르투르는 저런 종류의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배운 것은 없지만 믿음이 깊은 이들은 아주 용감했고, 언제나 강한 의지를 가진 이들은 우유부단한 이들의 마음을 끌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저희가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몸과 마음을 모두 정갈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신을 경외하지 않는 영주에겐 세금을 바치지 말고, 신의 이름을 사칭하는 성직자들에겐 돌팔매를 던지십시오.”

서부 대륙 어디에서나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저런 말을 내버려 둘 통치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하지만 선생님, 그러면 저희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려움에 떨면서 묻자, 수도승은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께서는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영원한 겨울로 벌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곳에선 가난한 자가 부유해지고 고귀한 자가 비천해질 것이며 약했던 자가 강했던 자를 억압할 것입니다.”

레오폴트는 아주 불쾌한 표정으로 수도승을 바라보았다.

“이곳 참사회는 저딴 놈 안 잡아가고 뭐하나 몰라. 상위 영주나 교회가 개입하면 크게 경을 칠 노릇인데. 내 영지였다면 저 수도사도, 저런 걸 듣고 있는 놈들도 모조리 목을 베었을 거다.”

하지만 아르투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저 수도사야 미치광이일지 모르겠지만, 모여든 사람들은 단순히 종말론에 이끌려서는 만은 아닐 거야. 행색을 봐라. 대부분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이야. 그들의 삶엔 어떤 희망도 없으니 스스로 의지할 걸 만들어내었을 뿐이라고.”

레오폴트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러. 많이 물러졌어. 아르투르.”

아르투르는 태연히 답했다.

“어쩌면 네가 잔인해진 걸 수도 있지.”

“흠. 아마 둘 다 일지도.”

두 사람은 한번 웃고 넘어갔지만, 점차 서로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그들은 서로를 동료로서 존중하고, 형제로서 사랑했다. 하지만 점점 길이 나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일행은 시장을 지나 성당 구역으로 향했다. 도시의 성당은 주교가 거처하는 곳답게 멋진 자태를 뽐냈다.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잘 깎여진 대리석이 돋보였다. 대도시의 성당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볼 폼 없는 도시의 민가들과는 오히려 부조화를 이루어, 흉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도시에는 겸손한 성당이 더 어울릴 텐데.’

일행이 성당으로 말을 몰며 나아갈 때, 창을 든 병사 무리가 먼저 다가왔다. 무리를 이끄는 중년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나리(Milord), 안타깝게도 오늘의 미사는 끝났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르투르가 일행을 대표해서 말했다.

“소개 고맙지만, 미사를 드리러 온 것이 아닐세. 주교님을 굉장히 긴급한 용무로 뵈러 온 걸세. 나는 백인을 벤 아르투르고, 옆의 내 친구는 슈토벤 백작 레오폴트지. 전하면 알아들으실 걸세.”

“알겠습니다. 나리.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중년의 병사는 공손한 자세로 돌아선 후, 교회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갔다. 슈토벤 백작이나 아르투르는 잘 몰랐지만, 아르투르의 태도와 억양을 통해 평생 한번 말 나눠보기 힘든 대단히 높은 신분이라는 점을 직감했다.

‘조금이라도 트집 잡힐 행동을 했다간 경을 칠 지 몰라.’

아르투르는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경비대장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신분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며 난동을 부렸던 일은 부끄러운 과거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혈통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누군가 신분에 걸맞은 대접을 해준다면 즐겁게 받아들일 생각은 있었다.

달려갔던 병사는 도로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그는 야단을 맞을까 대단히 두려운 표정이었다.

“나리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돌아 가주셔야 하겠습니다. 주교님께서 긴급한 손님을 뵙고 있어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고 하십니다.”

레오폴트의 부관, 고드프루아가 앞으로 나서서 호통을 쳤다.

“이분들이 누구인 줄 알고 그런 이야길 하느냐? 이런 시골 주교가 만날 사람이라 봐야 촌구석 귀족일 텐데, 이분들은 교황 성하와 함께 일을 하시는 분들이다. 일개 주교가 감히 면담을 거부하느니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 내가 직접 전할 테니, 당장 길을 열어라!”

고드프루아가 거칠게 앞으로 나서자 병사들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이도저도 못했다.

“고드프루아. 물러나라. 네 주군을 교회 병사들을 때려눕히고 문을 부수고 들어간 불경한 군주로 만들 셈이냐?”

고드프루아는 레오폴트를 바라봤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결국 뒤로 물러났다. 아르투르는 도로 고개를 돌려 안도하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알겠네. 주교 각하께서 내일 아침에라도 만나주신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반드시 뵈어야하는, 긴급한 임무라는 걸 다시 전해드리게. 자네들은 퇴근하면서 이걸로 자식들 줄 빵이나 하나 사가라고.”

아르투르가 품 안에서 주화 한 닢을 꺼내 중년 병사를 향해 튕겼다. 그는 힘겹게 그것을 낚아챈 후 당황했다. 피오레 금화로, 자신의 세 달치 월급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나, 나리, 빵 값으로는 너무 많습니다만…”

“요즘엔 자네 같은 고귀한 이에게 예우를 갖출 줄 아는 자가 드물지. 나는 귀족답게 포상했을 뿐이네. 자, 다들 돌아가지.”

일행은 결국 말머리를 돌려 성당 지역에서 벗어났다. 케이는 카밀과 함께 도시를 돌며 일행이 머물 곳을 찾았고, 결국 평소에 아르투르의 명성을 듣고 그를 흠모하던 평민 부호가 저택에 그들을 초대했다.

“보상은 필요 없습니다. 아르투르 공께서는 저희 평민들을 위하여 고귀한 이들과 싸워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분에게 이런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큰 영광입니다.”

몇 번 더 보상을 하겠다는 입장과 과분하다는 부호의 실랑이가 오간 후, 결국 보상을 받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아르투르 일행은 부호의 환대에 감사를 표하며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만찬을 즐긴 후, 뜨거운 물로 목욕을 했다. 그 뒤에는 푹신한 깃털 침대가 있는 접객실을 하나씩 배정 받았다.

일행은 모두 몇 주간 야영과 노숙을 반복했던 터라 피로가 몸에 가득 베여있었다. 때문에 불침번 인원을 제외한 모두가 금방 잠들었다. 달이 가장 높게 떠오른 자정 무렵, 아르투르는 잠에서 깨어났다.

“야. 야. 일어나봐.”

자신의 품에 안겨있어야 할 힐데군드가 일어나서 옷을 차려 입고 있었다.

“뭐야, 아침은 아직 멀었잖아? 한 번 더 하자고?”

“나쁘진 않지만 때가 안 좋아. 도시에 소란이 났어. 방금 전 누가 저택을 찾아왔고.”

옷을 다 차려입은 힐데군드는 가죽 갑옷을 착용한 뒤, 도끼와 검을 허리춤에 찼다. 아르투르는 그녀의 판단을 신뢰했기에 마찬가지로 일어나 옷을 입고 무장을 시작했다. 벽걸이에 걸어둔 판금 갑옷 세트를 시간이 많이 들더라도 입을 지, 아니면 별 일이 아니기를 기대하며 입지 않기를 고민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마스터. 일어나셔야 합니다. 중요한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들어갑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케이는 이미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다.

“일어나계셨군요.”

“내가 미리 깨웠지.”

힐데군드가 빙긋 웃었다.

“난 이 도시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오밤중에 어떤 손님이 찾아온단 말이냐?”

“마을 주교님이 찾아와서 서둘러 마스터를 뵙길 바랍니다. 아, 시내에선 폭동이 났던데. 그것과 관련이 있던 것 같더군요.”

케이는 판금 흉갑을 집어서 아르투르에게 내밀었고, 아르투르는 그것을 입은 뒤 곧장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제기랄, 가는 곳마다 사건이 끊이질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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