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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38화 (13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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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군드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더니 앙상한 나무만이 가득한 숲 속을 달렸다. 번득이는 별빛의 인도를 따라 아르투르가 그녀를 뒤따라갔다. 한 밤중의 추격전을 벌인 끝에, 아르투르는 힐데군드를 거의 따라잡았다. 아르투르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붙잡기 직전, 도끼가 날아들었고 아르투르는 급히 옆으로 굴러 피해내야만 했다. 도끼날이 뺨을 스쳐지나가며 긴 흉터를 남겼다. 표정을 찌푸리는 아르투르.

“젠장. 뒈질 뻔 했잖아.”

하지만 오히려 도발하듯 미소를 지어보이는 힐데군드였다.

“날 자빠뜨리려면 그만한 자격이 되는 지는 봐야지.”

아르투르는 찌푸린 표정 그대로 고개를 절레절레저었다.

“좋은 생각이 아니야. 우리 둘 다, 지금 취했어. 손목 한번 삐끗하면 목 치는 거야. 꼭 이래야겠어? 말로 하자고.”

하지만 힐데군드는 세차게 검을 뽑아들면서 아르투르를 향해 내리쳤다.

“날 안고 싶으면 목숨은 걸 줄 알아야지, 쫄리면 튀시던가.”

아르투르 역시 번개 같이 여명을 뽑아들며 공격을 받아냈다. 아르투르는 반격을 가했지만 방패에 부딪치는 둔중한 소리가 나며 튕겨 나왔다. 방패에 힘껏 힘을 주어 여명을 밀어낸 그녀는 이번엔 아르투르의 복부를 누리며 횡으로 베었다.

아르투르는 잽싸게 뒤로 물러나면서 재차 받아쳐냈지만, 또 방패가 날아들었다. 몇 차례 공방이 이어지지만 아르투르는 갈수록 수세에 몰리며 뒤로 물러났다. 힐데군드는 자신보다 몸놀림이 날렵했을 뿐더러, 검을 다루는 기교에 있어서도 조금 우위였다.

깡 - !

재차 여명과 그녀의 검이 부딪쳤다. 울려퍼지는 칼날의 충돌소리에 아르투르는 술기운이 깨면서 점차 날카로운 정신이 되돌아왔다. 전투 의지가 몸과 정신을 달아오르게 했다. 힐데군드의 공격을 머리를 젖혀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간발의 차이로 쳐낼 때마다 아주 짜릿했다. 그녀는 전혀 인정사정 보지 않고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방심하면 죽인다.”

으르렁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르투르는 오히려 화색이 돌았다.

‘진짜로 목숨의 위협을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

이런 짜릿한 느낌은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지금 자신은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즉, 한번이라도 급소를 맞으면 죽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죽음의 공포가 떠올랐다. 기량이 절정에 이른 이후, 자신은 인간들과의 싸움에서 질 거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지 않았는가. 항상 자신보다 약한 다수의 상대를 처치하는 게 전부이다가 대등한 싸움을 하니 정말 즐거웠다.

힐데군드가 우측 상단에서 내려친 공격을 피해내자마자 그녀는 한발자국 내디디며 곧바로 올려베었다. 이번에는 검을 양손으로 잡아 막아냈지만 아슬아슬했다.

‘네가 더 빠를지는 몰라도, 힘으로 밀어 붙일 수만 있으면 내 승리다.’

힐데군드는 아르투르의 계산을 정확히 읽었는 지, 힘 싸움을 할 여지는 주지 않고 항상 빠르게 치고 빠졌다. 아르투르의 체격이 더 커서 사정거리가 길었지만, 힐데군드는 그 점도 노련하게 이용해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간격을 유지했다.

‘얼마나 많이 싸웠으면 저 정도로 능숙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아르투르 역시 전투 감각은 타고난 편이었다. 갑옷을 입고 싸우는 방식에 익숙해져버린 습관을 고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미 아르투르의 감각은 평복 전투에 적응하고 있었다. 행동은 좀 더 빨라졌고, 감각은 훨씬 민감해졌다. 위력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보단 제때 감지해서 정확히 받아내는 게 중요했다.

‘오른쪽!’

챙 - !

이번에는 힐데군드의 일격을 정확히 읽어내서 검을 부딪쳤다. 그녀가 재빨리 검을 때기 전에 팔과 어깨에 힘을 주어 밀어붙였고, 힐데군드는 점차 뒤로 밀려났다. 이번에도 그녀의 방패 치기가 날아들자 아르투르는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아하하! 제법이구만.”

아르투르는 입김을 내뿜으면서 힐데군드를 쳐다봤고, 힐데군드도 짜릿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땐 네가 이길 것 같더니, 이젠 내가 좀 유리한데. 계속 막기만 할 거면 항복하고 무릎을 꿇어.”

힐데군드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검을 쥐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아르투르는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달려오는 힐데군드를 향해 일부러 엉성한 일격을 날려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거리로 들어오는 걸 허락했다.

힐데군드가 잇달아 속공을 가하자, 아르투르는 그때마다 조금의 차이로 받아내며 한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짜증나는 듯이 외쳤다.

“언제까지 막기만 할 셈이야? 얼른 끝내자고!”

힐데군드는 아르투르의 비어있는 오른쪽 넓적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르투르는 재빨리 여명을 들어 막아냈고, 힐데군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더 가깝게 들어와 방패로 아르투르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르투르는 굉장한 충격을 받은 지 비틀거리며 간신히 균형만 잡았다.

“방금 한 실수는 용납 못해.”

힐데군드는 성을 내면서 살의를 담아 아르투르의 심장을 향해 칼날을 내찔렀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아찔한 정신 속에서도 여명을 놓치지 않은 채 그녀의 검을 받아냈으며, 충분히 가까워진 거리였으므로 그녀의 오른발을 걸어 자빠뜨렸다

“!”

힐데군드는 자신의 몸이 뒤로 기우는 것을 느끼자마자 양손에서 쥔 칼과 방패를 놓으며 땅을 짚고 뒤로 폴짝 뛰어 넘어지는 걸 피했지만, 어느새 아르투르가 눈앞에 있었다.

“잡았다.”

아르투르는 웃더니 칼날의 손잡이로 힐데군드의 머리를 후려쳤고, 그녀는 고통 속에서 재빨리 일어서려했지만 두 번째 일격이 날아들자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아르투르는 달려들어 그녀와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몇 차례 주먹이 오간 뒤, 싸움은 결판이 났다.

“내가 졌어. 졌다고. 네 마음대로 해.”

힐데군드는 힘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아르투르를 바라보았고, 아르투르는 땀을 흘리며 방패 위에 쓰러진 그녀의 모습의 빠져들었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뻗어 그녀의 백금발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거친 욕설을 귓가에 속삭였다.

***

“평소엔 점잖게 굴더니만. 아하하.”

힐데군드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방패를 베게로 삼고, 가죽 망토를 이불로 삼아 같이 뒤집어쓴 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둘 다 꽤 나른한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눈동자엔 욕망의 불꽃이 아른거렸다.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킨 채, 행동으로 하는 대화를 아주 길게 했다. 이따금 교성이 들렸지만 들을만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 두 사람 모두 피곤한 표정으로 뻗어있었다.

“아주 재밌었어. 겪어본 것 중에 최곤데.”

“그건 나도 동감이야. 이런 곳에서 해본 적은 없는데, 재밌네.”

두 사람은 낄낄 소리 내어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 하늘은 맑아서 참 좋아. 낮에는 언제나 햇빛이 들고, 밤에는 별과 달이 모습을 드러내잖아.”

힐데군드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하늘에 별과 달이 떠 있지, 뭐가 있는데?”

갸우뚱한 표정을 짓는 아르투르에게 힐데군드는 유쾌하지 않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태어난 곳에선 구름 사이로 햇빛이 드는 날이면 모든 사람과 짐승들이 밖으로 나와서 일광욕을 즐기지. 그나마도 얼마 안 가 사라지지만 말이야. 평소에는 우중충한 먹구름과 안개만이 가득하고, 일년의 반은 겨울인데 내내 눈폭풍이 내리는 곳이야.”

“그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가 있나? 아니, 거기서 왜 살고 있는데?”

힐데군드는 덤덤하게 답했다.

“갈 곳이 없으니까. 다른 양지바른 지역들은 이미 다른 부족들이 다 차지하고 있거든. 숫자가 부족해서 싸워봐야 승산도 없으니 정복하겠다고 나설 수도 없어. 결국 거기서 평생을 지내야 하는 거야. 서른을 채우고 죽으면 운이 좋은 편이고, 여섯 살이면 부족의 일원으로 한 명의 몫을 해내야 해. 아니면 버려지던가.”

아르투르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상황에 몰입한 채, 그런 상황을 떠올려봤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혀오는 지경이었다. 그런 곳에서 자랐다면 기사도는 말도 안되고 평범한 도덕심조차 가질 수 없을 터였다.

“…그랬군. 그래서 너희들이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였어.”

힐데군드는 피식 웃었다.

“무슨 개소리야. 우리가 괴물인 줄 아니? 나는 진짜 죽기 싫어. 명계에 앉아서도 눈 폭풍을 불러오며 죽도록 못 살게 구는 놈들인데, 그놈들 곁에 가면 뭘 얼마나 시달리겠어? 단지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야.”

아르투르는 눈꺼풀이 감겨왔지만, 의식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서 맨 몸으로 잠들었다간 얼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사실 이 순간이 정말 좋기도 했다.

“나는 네가 사제라고해서 너희 신들을 공경하는 줄 알았는데. 좋아하지 않는구나.

힐데군드는 쓰게 웃었다.

“좋아한다고? 우리의 신들은 너희들의 신들처럼 살갑지 않아. 그들은 얼음보다 차가운 존재이고 의심을 품는 자들에겐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아. 시시때때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눈 폭풍과 부족의 터전 전체를 쓸어가는 눈사태가 발생하지. 얼음을 파먹고 사는 괴물들이 나타나는 일도 있어. 그때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신들에게 비는 거야.”

힐데군드의 표정은 아주 섬뜩했다. 아르투르는 그녀가 공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인간, 적어도 문명인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범주의 공포를 목격했기에 그것보다 못한 것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두려움을 주지 못할 뿐이었던 모양이다.

“신들은 절대 대가 없이 사람들을 돕지 않아. 온화한 신이건 냉정한 신이건 반드시 대가를 받지. 그러니 그들에게 빌 때는 반드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바쳐야만 해. 진심이 아니라면 오히려 그들의 분노만 사게 될 테니 말이야.”

아르투르는 구태여 그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기로 했다. 지금 자신 옆에 누워있는 야성적인 여전사는 자신이 만났던 어떤 귀족 여인들보다 아름답고 매혹적이었지만, 가장 위험하고 잔인한 자라는 점이 실감이 되었을 뿐이다. 그녀는 피에 굶주린 고대의 신들에게 살아있는 인간들을 바치는 사제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교도 여자가 내게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져. 아르투르. 조심해. 그녀는 네가 추구해온 모든 가치에 반대되는 삶을 살아온 자야.’

아르투르가 내면에서 스스로에게 경고하고 있을 때, 힐데군드는 무엇인가 결정을 한 단호한 결의에 찬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아르투르. 나 좀 도와줘.”

“? 뭘 말이야?”

“너희들의 풍습과 문화에 대해 알고 싶어. 이곳에 적응하고 싶거든.”

아르투르가 벙 찐 표정으로 힐데군드를 보았지만, 그녀는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 깨달았거든. 고향땅을 오래도록 증오해왔다는 걸. 얼음보다 냉혹한 신들과 그들의 은총만을 바라는 피에 굶주린 광신도들, 눈을 파먹고 사는 괴수 놈들이 모두 지긋지긋해. 그런 곳에선 진정으로 내 삶을 살 수 없어. 더 이상 그곳의 삶은 어떤 즐거움도 내게 주지 못할거야. 확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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