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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37화 (13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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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일행은 도로를 따라 계속 남하했다. 여정을 시작할 때는 잘 익은 곡식들이 무성히 자라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였지만, 추수절이 지난 지금은 텅 빈 채 삐쩍 마른 나무들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일행이 지나갈 때면 농부들이 신기한 시선을 내보냈다. 그때마다 일행은 식량을 돈 주고 구입하거나 밤중에 머물고는 했다. 기사들과 북구인들 사이에 존재하던 긴장은 전투 이후 다소 누그러졌다. 특히 성채로 들어갔던 기사들은 모두 북구인들의 존중을 받았다.

“당신 같은 이는 우리 북구인들 사이에서 드무오. 아르투르 경. 당신이 우리들의 일원이 아니라는 게 아쉽군.”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군나르조차 아르투르에게 찬사를 건넸다.

“당신 북구인들 또한 역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더군. 단순히 피에 미친 광전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 기쁘오.”

아르투르를 비롯한 젊은 기사들은 이제 북구인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서로에 대한 호기심을 지니고 서로에 대해서 알아갔다. 아르투르 일행은 북구인들도 크게 두 일행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왜 여기 내려왔냐고? 그냥,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서 왔어. 우리 고향은 아주 심심한 곳이거든. 싸우고, 떡치고, 사냥하는 것 외엔 별 다른 재미가 없거든. 여긴 놀 게 많더라고. 돈 받고 싸워주면 돈도 많이 줘서 좋고,”

힐데군드와 그녀를 따라온 이들의 경우 채 서른이 되지 않은 젊은이들로 문명에 대한 호기심이 넘쳤다. 시라노가 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때면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으며, 현지 관습을 흉내 내며 문명어를 익히는데 열심이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지역 출신으로 막연히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다가 합류한 경우라고 했다.

“먹고 살려고 왔지. 힐데군드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 동네에선 농사도 못 짓는 곳이 더 많아. 얼음 깨먹고 살다보면 굶어죽는 놈들이 나오니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반면 토르스탄의 무리는 모두 같은 부족 출신이었고, 목적도 뚜렷했다. 교역을 위해 질 좋은 가죽들을 챙겨왔으며 좋은 값을 내다판 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들은 아르투르를 비롯한 용맹을 증명한 기사들에겐 깊은 존중을 내보였지만, 필요 이상으로 현지에 대해 알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 땅에 쳐들어와서 그렇게 잔인한 노략질을 한거냐? 먹을 게 없어서 뺏으러 온 건가 보군.”

카밀은 토르스탄을 보며 빈정거렸다. 하지만 토르스탄과 그의 부족민들은 이런 반응이 익숙한지 참아 넘겼다. 아르투르가 무언의 압력을 보내자 카밀은 조용히 행렬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나이 많은 기사들은 카밀의 행동에 동조하는 태도를 내보였지만 레오폴트가 엄중히 경고해둔 탓에 침묵을 지켰다.

“너희 보고 저놈들이랑 친하게 지내란 이야긴 안하겠다. 싫으면 그냥 조용히 떨어져 있어. 분위기 박살내지 말고.”

일행은 그렇게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계속 전진했다. 큰 마을을 이틀정도 남겨둔 시점에서 그들은 민가를 발견할 수 없어 길가에 야영지를 치기로 했다. 주변에 바람을 막아줄 수단이 없으니 정면으로 바람과 부딪칠 벌판 위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일행들은 서둘러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워 야영을 준비했다. 해가 저물자 겨울바람이 찾아와 그들을 괴롭혔다. 기사들은 추위에 떨며 불을 피운 반면 북구인들은 얇은 여름옷을 입어 자신들의 강인함을 드러내보였다.

“니들, 그렇게 쎈 척 하더니 추위 앞엔 약하구만?”

힐데군드를 비롯한 북구인들은 껄껄 웃었다. 토르스탄이 거들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살 길이 있는 거 아니겠어?”

기사들을 위한 변명을 하자면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운 편이었다. 아무튼 일행들이 야영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르투르는 북구인들과 마찬가지로 추위를 거의 타지 않았고, 때문에 앞장서서 장작을 구하러갔다. 반면 레오폴트는 여우 가죽을 뒤집어쓴 채 모닥불 옆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힐데군드가 신기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데 넌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네? 그래도 되는거냐?”

레오폴트는 악의가 없음을 알았기에 화를 내지 않았다.

“원래 이런 허드렛일은 아랫사람들을 시키고 윗사람들은 편히 쉬는 게 우리 쪽에선 맞아. 내가 쉬고 있어야 다른 고참 기사들도 농땡이를 부리거든.”

“아르투르 쟤는 앞장서서 일하는데? 쟤도 너와 같은 왕자 아니야?”

힐데군드는 눈짓으로 나무를 베고 있는 아르투르를 가리켰다.

“그건 녀석 성격이 좀 독특한 면도 있는 탓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아르투르는 왕자(Prince)는 아니야. 왕의 아들(King’s son)로 인정받고 있을 뿐이지. 두 신분은 엄연히 다르고,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지.”

힐데군드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게 뭔 이상한 소리야? 왕의 아들이면 다 왕자 아니야?”

같이 일하던 북구인들도 신기한 관습이라고 생각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레오폴트는 열성적인 태도로 설명해줬다.

“그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 우리 관습에선 적법한 결혼을 통해 낳은 자식과 사생아는 완전히 경우가 달라. 결혼은 한 사람과만 할 수 있는 것이고. 왕자나 공주는 그런 적법한 결혼에서 얻어진 왕족들에게만 붙는 칭호라고. 왕위 계승권을 정당하게 가진 것도 왕자나 공주뿐이고.”

힐데군드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럼 여기 왕들은 평생 한 여자와만 잔다고? 그게 말이 되냐?”

“아니, 아니. 그건 또 다른 이야기지. 일반적으론 여러 여자와 사랑하는 게 보통이지. 하지만 지위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적법한 자녀들뿐이란 거야.”

“그러니까 점잖 떨면서 한 사람만 평생 사랑하겠다고 맹세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안 지킨다는 거네. 하지만 다들 그런 척 해야 한다는 이야기고?”

레오폴트가 엄지를 척 추켜세웠다.

“정확한 정리네. 이해가 빨라.”

북구인들은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문명인들이 늘 그렇듯 겉과 속이 다르군! 강인한 사내라면 여러 여인을 품는 걸 자랑스러워해야지! 자식이라면 누구나 공평히 대해줘야 하고.”

힐데군드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쟤들은 그걸 야만이라고 부르나봐.”

그 때, 뒤편에서 불쑥 아르투르가 나타나 타오르던 모닥불 옆에 장작을 내려두었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들 있나?”

어느새 모닥불을 중심으로 모여들어있던 사람들 사이에 아르투르가 참가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에 쏠렸다. 레오폴트는 토르스탄이 따라주는 술잔을 받으며 답했다.

“이 북구인 친구들이 너같이 위대한 전사가 왜 아버지의 왕위를 물려받지 못했냐고 묻고 있길래 답해주고 있었지.”

토르스탄도 고개를 끄덕였다.

“난 페르넬이 직접 싸우는 모습도 봤었다. 하지만 이번에 교역을 하며 그 아들들을 만나보니 다 그 아버지의 위용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더군. 너 만한 전사는 없던데. 어떻게 된 일이냐?”

힐데군드도 짐짓 궁금한 지 아르투르에게 시선을 보냈다. 두 사람의 눈길이 슬쩍 마주쳤고, 아르투르는 토르스탄에게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레오폴트가 설명했겠지만 나는 공식적으로는 페르넬의 아들이 아니다. 그저 이방인 여인이 남겨두고 떠난 고아가 내 법적인 지위지. 귀족 신분은 아버지가 궁정에서 길러주시며 하사했기 때문에 생겨났을 뿐이다. 그러니 왕위를 계승할 자격은 전혀 없지.”

아르투르는 일부러 자기 어머니의 정체인 북구인 용병은 숨겼다. 진짜 북구인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굳이 꺼내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도 어머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단지 자신이 아는 건 북구인 용병대장으로서 한때 아버지와 함께 싸웠다는 것뿐이었고,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인 것이 중요하지 어머니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함구했다.

“하지만 네가 가장 잘 싸우는 거 아냐? 네 형들이 더 뛰어난가?”

힐데군드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고, 아르투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큰형이나 작은형이나 무예로나 지휘관으론 내 상대가 못돼. 둘째형이라면 모르겠는데, 그나마도 솔직히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하지만 우리 쪽에선 왕위를 얻을 권리는 군사적 능력과는 무관한 거다. 혈통과 태어난 순서가 중요한 거지.”

아르투르는 그의 형제들도 무예가 자신보다 떨어질 뿐, 왕으로서 자신보다 모자란 점은 없다고 생각했다. 북구인들에게 그런 점을 이해시키기가 불가능해보였기에 말하지 않았을 뿐.

“하지만 넌 왕이 되길 바란다고 했잖아. 그리고 형제들을 칠 기회는 분명히 있었을 거고.”

힐데군드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아르투르에게 되물었다. 아르투르는 주변을 살폈다. 케이에겐 어떤 말도 해도 좋았고, 레오폴트는 결정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일만 아니라면 최고의 친구이자 형제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으리라.

“글쎄. 우리 세상에선 그런 식으론 왕이 될 수 없지. 자, 이제 너희 이야기를 해봐라. 다양한 곳을 항해하고 여행했다니 진짜 궁금한 것이 많거든. 혹시 동방에 있는 열사의 사막에 가본 적이 있나?”

“잠깐만. 이거 중요한 질문….”

힐데군드가 되물으려 했지만, 아르투르는 강렬한 눈빛을 보내 그녀를 제지했다. 개인적으로 답해주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토르스탄은 아르투르가 화제를 지속하길 원하지 않는 것을 알고 눈치 빠르게 화제를 넘겼다.

토르스탄은 자신이 항해했던 다양한 지역들의 풍습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입담이 괜찮은 편이어서 다들 금세 빠져들었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술과 고기를 나눌 수 있었다.

“겨울서리부족으로 토르스탄과 그의 친구들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기를 빌면서 건배!”

“으하하하! 악마를 베어 넘긴 아르투르의 명성이 퍼지길 바라며 건배하겠다!”

술잔을 돌리고 돌리다보니 그들은 속에 있던 이야기마저 거리낌 없이 터놓았다. 그들은 함께 지옥 같은 싸움을 이겨낸 자들이었고 서로의 목숨을 지켰던 경험을 토대로 깊은 교류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른 신을 모시고, 다른 지역에서 살지만 지금만큼은 하나가 되었군.”

힐데군드가 깔깔 웃었다.

“이런 게 여행의 묘미 아니겠어?”

그들은 어떤 화제들에 대해서 목청을 높이고 주먹을 쥐며 격론을 벌이곤 했지만, 끝은 항상 잔을 부딪치며 끝났다.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를 죽이겠다고 으르렁거리던 레오폴트와 토르스탄도 화해를 했다.

“좋아. 너희는 내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전사들이다. 일전의 무례에 대해서 사과하지. 너희가 이곳에 손님으로서 머무르는 한,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하, 보기보다 남자답구만. 도련님. 좋아. 나도 사과하지. 너희가 우리를 손님으로 대접한다면, 우리는 너희를 집주인에게 걸맞는 예우를 보이겠다.”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잔을 들이키며 기탄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와 나는 모두 각자의 무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결국 언젠가 우린 다시 싸우게 되지 않을까?”

토르스탄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지.”

“멍청한 질문에 현명하게 답 하는군”

모든 이들이 쉴 새 없이 잔을 돌리며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마시었고, 레오폴트는 막시밀리안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갔고, 토르스탄도 완전히 벌개져서는 비틀거리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아르투르가 그를 돌려보내려고 할 때, 힐데군드가 손을 내저었다.

“내버려 둬. 저놈은 좀 터프해서 내버려둬도 알아서 잘 일어나.”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들거나 술에 꼴아 제정신이 아닌 중에서도, 조금 취했을 뿐 말짱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했다.

“못 다한 이야길 마무리하자고.”

말을 마친 힐데군드는 방패를 챙겨서 야영지에서 슬쩍 빠져나갔고, 아르투르는 피식 웃고는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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