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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36화 (13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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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가 억지로 눈을 뜨자 가죽 막사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의식이 흐릿해서 잠결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자기 뺨을 재차 때렸다.

“야, 빨리 일어나라고.”

아르투르는 오른쪽 뺨을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키곤, 짜증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만 때려. 그만.”

일어나 옆을 보니 자기 옆에서 다급한 표정을 짓는 힐데군드와 걱정스런 표정을 짓던 케이가 눈에 들어왔다.

“말로 하지, 왜 때리고 난리야.”

힐데군드는 오히려 성을 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지금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라고. 지금 잠이나 자게 생겼어? 빨리 나와. 갑옷 필요 없으니까.”

힐데군드가 그렇게 막사에서 나갔다. 케이의 행색을 보니 오래 자기 곁을 지킨 모양이었다. 아마 악마를 쓰러뜨리고 긴 시간 쓰러져있었으리라. 하지만 아르투르는 일부러 근엄한 태도를 취했다.

“수고했다.”

케이는 입가에만 살며시 미소 지었다.

“네. 마스터.”

“야, 사내놈들끼리 낯 뜨거운 짓 그만하고 밖에 좀 따라와라. 지금 이 광경 놓치면 평생 아쉬워할 거라고.”

아르투르는 여전히 잠결에 빠진 채, 떠밀리듯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아르투르는 뭐 그리 대단할 일이여서 그러는지 짜증이 났다. 방금 악마를 죽이고 여신과 말다툼을 하고 온 참인데 별 일이 있겠냐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놀랄만한 일이었다. 하늘 전체가 달아올라 빛을 발하며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천둥과 벼락이 쉬지 않고 내리쳤다. 다른 일행들도 막사의 주변에 있었는데, 그들도 넋을 놓고 이 광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엘라카르시스가 악마가 죽으면 고대의 신비를 막아둔 봉인이 해제될 것이라고 했지. 그 말인가 보군.’

“신이시여,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시라노는 탄식을 내뱉었다. 종말이 다가왔다며 수군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무언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모두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늘이 완전히 붉게 물들게 되자, 하늘에 유리창처럼 금이 가더니,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그 사이로 각양각색의 빛을 내는 혼령들이 물결치며 내려왔으며, 세상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치 그 광경을 하늘이 피를 흘리는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일행은 공포에 질려서 엎드리거나, 피할 곳을 찾아 숨어들었다. 역전의 전사들도 대적할 수 없는 적과 이해할 수 없는 공포 앞에서는 움츠려들기 마련이었다.

아르투르는 피 흘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꿈의 내용을 곱씹었다. 더욱 많은 신비가 풀려날수록, 성검의 힘도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그처럼 자리를 지키고 서서 상황을 지켜보는 건 단 다섯 명뿐이었다. 레오폴트는 냉정한 눈빛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주시했으며, 카밀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젠 놀랄 것 없다는 태도였다.

두 북구인 전사의 태도도 색달랐다. 힐데군드의 눈동자는 흥미로움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토르스탄은 전율을 느꼈지만, 비교적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신비가 세상 전체로 퍼져나간 후, 끝을 모르는 어둠이 찾아왔다.

햇빛도, 달빛도, 별빛도, 심지어 인간들이 만든 불꽃마저 그 빛을 잃었다. 오직 성검의 광휘만이 번득이는 가운데,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달빛과 별빛이 돌아왔다. 영원히 세상이 어둠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던 모두가 침묵을 깨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레오폴트는 가장 먼저 아르투르에게 고개를 물었다. 그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조금 묻어나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침착함은 잃지 않고 있었다.

“아르투르. 이 일에 대해 뭔가 알겠지. 설명해봐라.”

자뭇 진지한 레오폴트의 목소리에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확신하는 선에서만 이야기할게. 고대의 신비가 풀려 난거야. 마법과 옛 존재들이 돌아오게 되겠지. 용이 깨어날 거라는 징조이기도 하고.”

레오폴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대항할 방법을 모색해야겠군. 성직자놈들이 쓸모가 있을까?”

“아마도. 발타리아에 대한 신앙은 다가올 시련에 맞설 때 도움이 될거야”

힐데군드는 대화에 흥미를 느끼며 끼어들었다.

“이건 세상의 황혼이 온다는 뜻이야! 우리 신화에서 예언한 세상의 최후가 오는 거라고. 이제 공기가 차가워지고 대지가 눈으로 뒤덮이게 될 거야. 그렇게 모두가 굶주리고 약해졌을 때, 마지막 용이 날아올라서 모든 도시를 불태우며 새로운 세상이 올 거야.”

힐데군드는 뭐가 재미있는 지 쾌활하게 웃었고, 그것이 토르스탄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는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힐데군드, 좋아할 일은 아니다. 세상이 더 추워지고 도시가 불타올라도 우리 북구인들은 살아남겠지만 새로운 세상은 훨씬 더 가혹한 곳 일거야. 네가 첫 희생양이 될 수도 있지.”

“그게 뭐 어때? 변해가는 세상은 지금처럼 정체된 세상보다는 훨씬 흥미로울 거야. 이런 시대에 살아간다는 건 축복이지. 절대 무료할 일은 없을 거니까. 그리고 정말로 용이 세상을 불태울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는 지점 아니겠어?”

토르스탄은 그녀의 말이 대단히 못마땅한 지, 표정을 구기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신들의 예언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는 종말의 선고자께서 돌아오시면 그분을 도와 세상을 멸해야만 한다.”

“흐음. 내가 부수는 건 지금은 별로 내키진 않는데, 왜?”

“나도 지금의 세상이 무너지길 바라진 않는다. 하지만 우린 용의 후손이야. 신들에게 선택받은 것이지. 당연히 그들의 은혜에 보답해야만 한다.”

힐데군드는 짜증나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쓸데없이 분위기만 잡기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신들조차 모르는 거야. 운명 같은 고리타분한 게 정해져있다 한들 무슨 상관이야? 우린 우리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돼.”

두 사람은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슬며시 무기를 손으로 옮겨가던 도중, 아르투르가 개입했다.

“잠깐만. 둘 다 진정 좀 해라. 너흰 방금까지 같은 적을 상대로 분투했잖나. 서로 죽이려 들 이유는 없다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두 사람은 모두 못마땅한 눈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이게 우리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니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여긴 우리 문명인들의 땅이지. 그러니 우리 방침에 따라라. 이곳에선 그런 사소한 일로 무기를 뽑진 않아. 그게 싫다면 내가 없는 곳에 가서 싸우든가. 싸움이 벌어지면 나도 개입하겠다.”

결국 토르스탄이 혀를 차며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르투르가 분명 힐데군드의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더 이상 충돌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아르투르는 주변을 향해 말했다.

“끝났다. 다들 나와라.”

그제야 공포에 떨고 있던 다른 일행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아르투르는 그들을 다독인 뒤, 충분히 진정이 되자 행선지를 논의하기 위해 불러 모았다. 아르투르 일행의 경우엔 갈 곳이 분명했다. 교황청으로 가서 상황을 전하고, 이 기이한 일에 대해서도 물어야했다.

“너희 북구인들은 어디로 갈 생각이냐? 잠깐, 그 전에 베오릭은 어디 간 거야? 아까부터 보이질 않는데.”

베오릭은 아르투르 일행과 함께 하며 그야말로 초인적인 용맹을 선보인 바 있었다. 아르투르는 그에게 호감이 가던 편이었다. 무엇보다, 성검의 소유권을 두고 결투하기로 약속했었고. 힐데군드가 아주 짤막히 답한다.

“떠났어.”

아르투르 일행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문명 지역의 한복판에서 일행들을 모두 놔둔 채로 갑자기 떠나버렸다는 말은 여러모로 이상했다. 힐데군드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고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도 정말 모른다니까.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잘 있으라고 인사하고는 갑자기 사라져버렸어. 아르투르, 너와는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을 하던데.”

아르투르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사라졌다고?”

이번에는 토르스탄이 답했다.

“그래. 그를 붙잡으러 뒤따라 가보니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있었다. 심지어 그 녀석의 짐은 캠프에 그대로 남아있었지. 식량조차 안 챙겨갔어.”

아르투르가 토르스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설령 숨기고 있는 게 있다고 한들 그건 북구인들의 문제기도 했고.

“좋아. 아무튼 그럼 베오릭은 그렇게 떠난 거고. 너희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행선지가 같다면 동행하자. 이런 일이 생겼으니 민심이 흉흉해 질 거야. 그러면 너희끼리만 있으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쪽이 현명해.”

북구인들은 아르투르의 말에 오히려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은 네가 우리의 보호자 노릇이라도 해주겠다는 말이야?”

특히 힐데군드는 불쾌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투르는 북구인들에게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그보다 약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임을 파악했다. 이들은 독립심과 서열에 아주 민감했다. 그러니 말을 좀 돌려서 할 필요가 있겠지.

“오해하지 마라. 그냥 친구로서 약간의 도움을 제공하겠다는 의미다. 위험하다는 말은 너희에게 시비를 걸어올 녀석들에게 위험하다는 거고.”

그러자 북구인 전사들의 표정은 조금 누그러졌다. 실은 위험한 게 맞았다. 물론 북구인들은 시비를 거는 놈들은 다 죽이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현지인들을 죽이고 다니다보면 추격대가 붙겠고, 결국 중과부적으로 죽으리란 건 뻔한 일이었지만 굳이 덧붙이진 않았다. 토르스탄은 거기까지 간파한 지 피식 웃었다.

“이 친구, 말을 영리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도움을 주겠다면 기꺼이 받으마. 어차피 나는 교역을 위해 와서 불필요한 분란은 피하고 싶은 입장이다. 무엇보다 너희와 같이 다니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후려치는 놈들은 없겠군.”

힐데군드는 기분이 금방 풀렸는 지,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그래도 같이 갈 생각이었어. 너랑 있으면 심심하진 않을 것 같거든. 너희 문명인들이 궁금하기도 했고.”

베오릭이 떠난 지금, 리더는 두 사람이었기에 다른 북구인 전사들도 그들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아르투르와 힐데군드는 내심 즐거운 표정을 보이며 눈을 마주쳤다.

***

그 날 있었던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하늘이 피를 흘린 날”이라고 불렀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에 이런 광경을 보자 공황 상태가 빠져들었고, 맹목적인 공포가 번져나갔다. 당장 종말이 올 것이라며 떠들고 다니는 선동가들이 나타나고 삶을 포기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심각성을 느낀 통치자들은 전력을 다해 상황 파악에 나섰다. 이게 무슨 일이든 경쟁자보다 먼저 알아야만 했다.

“왕국의 모든 학자와 성직자, 장수한 노인들을 모아 이 상황을 규명하라!”

그들은 갖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성직자들은 인간의 죄를 깨우치게 하려는 신의 준엄한 경고라는 서사를 좋아했고, 부정적인 자들은 종말론을 늘어놓았다. 간혹 천문학자들 가운덴 그냥 자연 현상에 불과하니 신경 쓸 것 없다는 자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얻어진 합의는 이랬다.

“불길한 일을 예언하는 징조는 맞으며, 어쩌면 옛 예언들이 말하는 종말과 연결되어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는 확증은 없으며, 그런 종말이 언제 올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자 군주들은 일단 이 안건에서 관심을 떼었다. 종말은 언제 벌어질지 모르지만, 전쟁 위험과 반역 음모는 항상 주변에 도사리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런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야했다. 처음에는 세상이 망했느니 하던 백성들도 생업으로 돌아갔다.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자식들이 배를 곪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빵, 빵을 구해야했다!

진지하게 이 문제를 언급하는 이들도 미치광이로 여겨지거나, 유력한 가설 정도로 여겨질 뿐이었다. 누구도 임박한 위험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혹은 그렇게 느낀 개인이 있더라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들조차 확신하지는 못했으니까 말이다. 여전히 귀족들은 전쟁을 했고, 성직자들은 기도했으며, 평민들은 계속 생산에 전념했다.

처음에 공포가 빠져든 몇 주가 지나자,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변화가 없던 것 역시 아니었다. 미개척 지대에서는 괴수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제보가 급증했으며, 마법사들의 기이한 행동들은 실제로 효과를 보았다. 그들은 쓸모없는 것에 매진하는 괴짜들에서 군주들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 되어갔다. 기적을 체험했다는 신앙 간증도 크게 늘어났다.

이 모든 정보를 한 눈에 받아볼 수 있는 군주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점을 느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그런 직감을 외면했다. 어차피 안다고 해도, 신의 계획일 텐데 인간인 자기들이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앞을 다투어 외쳤다.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짐은 한 뼘의 땅을 더 차지하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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