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아르투르는 엘라카르시스의 이야기를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알아두면 쓸 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우리들 가운데 처음으로 죽은 자는 야생을 다스리는 권능을 가진 용이었다. 원래부터 인간들을 싫어했는데, 아마 자신의 존재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본능적인 직감을 느꼈던 것 같다. 다른 용들의 간섭이 아니었다면 인간들을 전부 죽이려들었을지도 몰라.”
엘라카르시스는 옛 일을 회상하는 지, 조금 쉬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인간들은 항상 그 자를 피했지만, 동시에 두려워했어. 원시의 인간들에게 야생이란 그런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지식을 전해받자 상황이 달라졌다. 불과 강철을 얻게 된
인간들은 숲은 태우고 짐승은 보이는 족족 사냥한 후 씨앗을 뿌렸지. 더 이상 야생은 이해할 수 없는 공포의 장소가 아니라, 정복해야 할 터전에 불과해졌다.”
“그래서 혹시 인간들이 그 야생을 다스리는 용을 공격해서 죽인 겁니까?”
엘라카르시스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아이야. 그건 너무 오만한 이야기구나. 하기야, 네가 본 신적인 존재라고 해봐야 잔챙이들뿐이지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온전한 상태의 권능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다른 권능뿐이다. 아무튼, 인간들이 야생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때부터 야생의 권능은 약해지더니, 결국 힘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어. 권능을 잃은 신은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늙어갔고, 마침내는 죽어버렸지.”
엘라카르시스는 기억을 떠올리는 게 고통스러운 지 침묵을 지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몇 차례 주저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기엔 우린 너무 지혜로웠지. 우리의 권능은 인간들의 경외가 섞인 신앙으로부터 나왔던 거야. 인간들이 우리의 권능을 신비롭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의 권능은 사라지고 영원을 살던 불멸성도 사라지는 거였지.”
아르투르는 이런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지 자뭇 궁금해졌다. 신들이 인간들의 숭배로부터 힘을 유지한다니, 그건 발상조차 떠올리기 힘든 일이었다. 자신들의 유일신과 이교도의 신들을 막론하고, 인간들은 신들을 자신들의 이해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보고 있었다.
“네 표정을 보니 어떻게 보는지 알겠구나. 그래. 우리는 너희들이 숭배하는 그런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던 거야. 너희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엎드려 경외할 때만 초월적인 존재였을 뿐, 신앙의 대상이 아니게 되면 그냥 입에서 불을 뿜는 날짐승에 불과했던 거였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아직 힘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세상 어디에도 당신을 섬기거나 숭배하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까?”
엘라카르시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삶과 죽음, 그 자체는 아직 숭배하지 않느냐.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지만 어떻게 하면 그걸 피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 만약 너희가 그런 비밀마저 파헤친다면 나도 사라지고 말 거다. 그건 북구인들의 신들도 마찬가지야.”
아르투르는 의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알려주는 거지요?”
“널 설득하는데 필요하니까. 어차피 네가 이런 이야기를 해봐야 다른 이들이 믿어주지 않으리란 건 알겠지. 아무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인간들이 우리를 영원히 경외하게 할 수 있을지 알아차렸다. 자연 상태에 영원히 머무르게 하는 거지. 불은 원소의 일부가 아니라 신의 선물이여야만 했고, 벼락은 기상 현상이 아닌 우리들의 분노로 남을 때만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었으니.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인간들에게 문명을 포기하라는 신탁을 내리기로 합의했다.”
“잘 되지 않았겠군요. 분명히 반발하는 자들이 나왔겠고, 그래서 옛 신들이 인간들의 문명을 멸하기로 결정한 것이고요.”
아르투르는 두 종족이 피할 수 없는 입장의 충돌을 겪은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 사실 네 생각과는 좀 달랐다. 당시의 인간들은 그들 사이를 거닐던 우리를 진심으로 경외하고 사랑했거든. 우리 모두가 그런 지시를 내렸더라면 대부분은 따랐을 거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배신자가 나왔지. 우리의 지도자이던 발타리아는 합의를 거부하고 정 반대되는 내용의 신탁을 내렸다. 그러자 문명을 지키고 싶던 인간들은 발타리아만이 진정한 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발타리아의 지도하에 우리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그 뒤는 모두가 아는 고대의 전쟁으로 이어진 거지.”
각 종교나 전설마다 전하는 바는 고대의 전쟁에 대해 전하는 바는 달랐지만, 마무리는 항상 똑같았다. 최후의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신은 죽었고, 찬란한 번영을 누리던 고대의 국가는 흔적만 남긴 채 파괴되었다는 것 말이다.
“발타리아는 우리 중 가장 강한 자였고, 인간들도 제법 강해진 시기였기에 일단 우리와 싸워볼 만은 했지. 하지만 그는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자신이 죽으리란 걸 내다봤다. 그래서 자신의 권능과 당시의 모든 기술을 집대성해서 인간들의 희망이 되어줄 수 있게 했지. 그게 네가 가진 성검이니라.”
“내 앞에 있다면 그에게 정말로 감사해야겠군요. 그의 유산이 혜안대로 쓰이고 있는거니까요.”
엘라카르시스는 고개만 끄덕여보았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중요한 문제로 돌아오죠. 그럼 당신은 어떻게 된거고, 내게서 무엇을 바랍니까? 앞으로 제가 당신의 조언을 들으려면 신뢰를 구하는 게 우선입니다.”
“우선 나에 대해 말해줘야겠지. 나도 처음엔 다른 신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하지만 내 혈육이라는 아이들을 죽이고 나니 회의감만이 몰려오더구나. 그렇다고 동족들을 배신할 수도 없었어. 내 선택은 전쟁 막바지까지 외딴 섬에 숨어서 지내는 것이었다.”
한숨을 쉬는 엘라카르시스.
“양측 모두 나를 표적으로 삼았고, 결국 협공을 받아죽었지. 하지만 나를 죽인 내 자매들과, 성검을 가져온 자식들끼리 내가 쓰러지자마자 서로를 죽이더구나. 그들은 최후의 한명까지 모두 죽었고, 그렇게 나의 시체도 성검도 방치된 채 긴 세월이 지났어. 의식이 들어보니 내 시체는 호수를 이루고 있었고, 남은 혼은 성검과 연결되어있더구나.”
공중에 떠 있던 여신은 계단을 타듯 허공을 내려와 아르투르를 마주보았다.
“내가 네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했지.”
그녀의 말이 끝나며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여신의 눈동자에서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고, 주변의 들풀과 모든 물길이 그녀의 의지에 호응해서 움직였다.
“나는 엘라카르시스, 최초의 용이며 모든 산 자를 보살펴온 생명의 어머니다. 옛 전쟁을 끝내러 올 마지막 용에게서 너희를 구해줄 수 있는 신이기도 하지. 어린 기사야, 내가 너를 선택했으니 엎드려 절하며 나를 찬미해라. 어떤 의문도 가지지 말고 내게 복종 할 것을 언약하여라. 그것이 네게 요구하는 바다.”
여신의 목소리에는 굉장한 권능이 담겨있었다. 목소리의 힘에 이끌린 아르투르는 황홀경에 빠져들었고 그녀의 말이 대단히 타당하다고 여겼다. 어찌되었건, 인간들을 쉬지 않고 보살펴온 위대한 권능이 아닌가? 그녀의 도움이 없다면 결코 용의 분노를 어찌 막을 것인가? 무엇보다, 자신은 이 여신에게 목숨을 두 번이나 빚지지 않았던가? 자신은 되갚아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아르투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억 하나가 지나갔다. 불의 검을 든채 자신에게 덤비다 죽은 사내의 모습이었다. 한때는 신실하고 명예롭던 수도 기사였을 그가 처음부터 인신 공양을 받는 악마를 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악마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사내를 점차 조종해나갔겠지.
용의 분노를 막아내자고, 세상 전체를 다시 자기 발아래 두려는 다른 초월적 존재의 꼭두각시가 될 수는 없었다. 아르투르가 그 점을 자각하는 순간, 그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던 여신의 권능이 약해졌다.
“잠깐! 그만두십시오! 마법으로 내 마음을 조종하려 들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많은 걸 빚졌지만 그렇다고 당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르투르의 완강한 의지를 느낀 엘라카르시스는 힘을 거두어들었다. 안광이 사그라들자, 여신은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뒤로 물러섰다.
“흠. 이걸 거부할 줄은 몰랐는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아르투르는 숨을 몰아쉬면서 여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 허공에 조금 떠오른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찌하여 그렇게까지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이냐? 나는 다른 용들과 달리 너희를 아끼는 신이란 걸 들려주었지 않느냐.”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에선 약간의 힐난과, 많은 아쉬움이 느껴졌다. 아르투르는 숨을 몰아쉬며, 비교적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도로 부활해서 신으로 숭배 받고 싶은 것이군요. 발타리아와 안칼라타르처럼 말입니다. 혹은 펜하르키렐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여신은 기분이 불쾌한 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섭섭한 비교는 하지 말거라. 나는 단지 내 도움을 받는 것만이 종말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니라. 그 점에서 우리 목표는 같다. 아르투르.”
아르투르는 여신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그녀가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인간이 신의 표정을 보며 기분을 짐작하는 일이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은혜를 입은 것은 반드시 갚을 것이고, 조언 해주실 게 있다면 그것도 귀담아듣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판단을 당신에게만 의존할 순 없어요.”
여신은 억울한 감정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나는 너희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함께 했다! 엄청나게 많은 것을 베풀었고, 결국 너희를 위해 동족마저 저버린, 누구보다 너희를 사랑하는 신이다!”
그녀의 말을 들은 아르투르는 무언가 깨닫고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당신께서는 분명히 은혜로운 신이십니다.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조상들의 신 말입니다.”
아르투르는 다음 말을 힘겹게 내뱉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신은 아니시죠. 설령 발타리아께서 돌아오시더라도 그 시절과 같은 복종은 받으실 수 없을 겁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배우고, 서로를 가르치며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시대는 우리에겐 너무나 먼 옛날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입니다.”
엘라카르시스는 차가운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내려다보았다. 한 겨울의 추위가 엄습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희가 나의 자녀이길 거부한다면, 나도 너희를 도울 이유가 없구나.”
“당신의 판단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대화도 필요 없겠군. 어디 한번 내 도움 없이 잘 해보아라. 썩 사라져라.”
냉소로 가득 찬 여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투르는 꿈속에서 추방당했다. 아르투르를 뺨이 얼얼한 채로, 점차 밝아오는 시야를 보았다. 귓가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꼬마, 이 새끼 다시 숨 쉰다. 그만 처자고 일어나. 새끼야. 밖에 난리 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