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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어두컴컴한 공간 속이었다. 눈앞에는 녹색의 호수가 펼쳐져있었다. 아르투르는 자신의 감각이 희미한 것을 느꼈고, 이것이 꿈속이란 것을 자각했다. 호수의 수면 위에는 녹색빛 광채를 발하는 순백의 옷을 입은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라카르시스. 정말 오랜만입니다.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네가 쓰러진 사이 기억을 좀 읽었다. 왜 이렇게 호수로 찾아오는 게 늦었나 했더니, 재밌는 일을 하고 다녔더구나. 특히 방금 쓰러졌을 때 말이야. 펜하르키렐을 잡아낼 줄은 몰랐다. 어쨌든 이번에도 너는 내 개입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성검이나 나의 가호,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넌 죽었을 거야.”
아르투르는 담담히 고개만 끄덕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과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전 이미 송장이 되어 파묻혀 있겠지요. 아니면 생존을 위해 신념을 저버리고 있었겠죠. 이제껏 명에를 지킬 수 있게 도와주신 점은 한없는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엘라카르시스.”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늦을만한 이유들은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네가 아직 검의 힘에 취해서 판단력을 잃지 않은 것 같아서 기쁘다. 대부분의 소유자들은 처음에 성검을 손에 넣은 뒤에 힘에 취해서 스스로를 잃고는 하거든. 그런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구나. 하지만, 이번 일은 좀 성급했다. 더 신중했어야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는 아르투르.
“악마를 잡아낸 건 칭찬해주실 줄 알았는데요. 당신 같은 존재와 대척점에 있는 자가 아닙니까?”
엘라카르시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선 굉장히 깊은 회한이 엿보였다. 그것은 지나간 세월들에 대한 아쉬움이자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향수였다.
“그의 죽음을 내가 기뻐할 거라곤 생각하지 말 거라. 우리는 가까운 사이였다. 특히 펜하르키렐과의 관계는 내게 각별했지. 우리 둘 다 너희 인간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걸 좋아했고, 그들에게 숭배 받는 것도 좋아했으니까. 그와 나는 정말로 많은 시간을 보냈어.”
엘라카르시스는 작은 미소를 지었지만, 아르투르는 그저 침묵을 지켰다. 추억에 빠진 사람을 두고 당사자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아 좋은 소리를 들을 순 없을테니까. 자신은 알지 못하는 일이었고, 안다 해도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칭찬은 해주마. 어차피 사라져야할 운명이라면 추하게 남아있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죽는 게 나은 선택이겠지. 용기를 내어 놈을 막는 건 잘한 일이다. 아르투르. 하지만 놈을 치러 가기 전에 더 자세히 알아보면 좋았을 거란 말이다. 펜하르키렐이 죽은 이상, 옛 신비를 가둬둔 봉인은 더욱 빠르게 풀려 날거야.”
아르투르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악마의 죽음이 무슨 봉인을 풀어서 세상을 더 어지럽게 만들 수 있다니, 들어본 적 없는 비밀이군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엘라카르시스.
“당장은 말이다. 특히 인간들이 새 시대에 적응할 때까지는 꽤 고생할거야. 그렇지만 널 탓 할일은 아니지. 너는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했고, 용기를 내어야 마땅한 일에 용기를 냈다. 그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신중하란거야. 너보다 지혜로운 조언을 귀담아듣고, 잘 모르는 분야는 공부하란 뜻이다.”
아르투르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글쎄요. 신들이야 영원히 살 수 있으니 이야기가 다른가 봅니다만, 짧은 삶을 사는 저희들은 성격이 급해서요. 신중만 기하다가는 영원히 아무것도 못할 겁니다.”
엘라카르시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가르치고 키워봤는데 그런 이야길 하느냐. 하기야, 너처럼 뜨거운 가슴을 지니고 살고 싶다면 어쩔 수 없겠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내 힘이 닿는 대로 도와줄테니.”
고개를 꾸벅 숙이는 아르투르.
“감사합니다. 지금은 봉인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군요. 옛 신비가 풀려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지금은 용들이 거의 남지 않았고, 신비에 대한 지식들도 인간들이 대부분 잊어버린지라 극적인 변화는 없을 거다. 기껏해야 가끔 괴물들이 나타나고, 마법을 쓰기 좀 더 쉬워지는 정도겠지.”
아르투르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성직자가 진짜 기적을 행하고 마녀가 저주를 내릴 거라는 거란 말 아닙니까? 어딜 봐서 그게 극적인 변화가 아닙니까?”
“생각보다 마법을 쓰는 건 훨씬 까다로운 일이다. 여전히 대부분은 못 쓸 거야. 다만 쓸 수 있던 소수의 사람들이 더 강한 힘을 얻겠지. 뭐, 그래봐야 상처나 좀 치유하고 손에서 불덩이 나 좀 쏘는 귀여운 수준일거다. 운석을 불러내고 평범한 검이 오라를 내뿜는 정도는 되어야 극적인 변화지.”
아르투르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지금에야 식자층은 마술이니 기적이니 하는 걸 농민들이나 믿는 미신으로 취급하거나, 가능하더라도 별 다른 힘이 없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된다면 꽤 많은 것이 변할 터였다. 사람들의 믿음, 사고방식, 사회 체제.
…
아무리 봐도, 인간 기사 입장에선 일생을 바꿀 큰 변화였다. 엘라카르시스는 그의 생각을 읽은 양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래서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 내가 더 적극적으로 세상일에 개입할 수 있으니, 널 직접 도와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엘라카르시스는 아르투르의 반응을 보며 말을 멈추었다. 아르투르 역시 그녀를 올려다본 채 무언으로 답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엘라카르시스.
“말해보아라.”
“당신이 왜 내게 이토록 호의를 베푸는지 알고 싶습니다. 요즘 북구인 친구들을 몇 명 사귀었는데, 제 성검을 두고 파멸을 불러오는 검이라니,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니 하는 알 수 없는 소리들을 좀 하더군요.”
아르투르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이젠 확실히 알겠습니다. 옛 신화들은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지역 전설 같은 게 아니라, 그런 사건들이 과거에 있었고 지금도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요. 때문에, 저는 당신은 누구고, 이 검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나를 돕고 있는 지에 대해 모두 알고 싶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엘라카르시스.
“긴 이야기지만 알아야할 때가 되었지. 우선 너는 종말의 선고자라고 불리는 용을 만났고, 그가 세상에 종말을 불러오겠다고 선포한 것도 들었을 거다.”
“들었지요. 이름이 안칼라타르라고 하던가요.”
“나와 발타리아가 그와 같은 용족이었다는 것도, 우리 용족들이 인간들을 멸하기로 했을 때 같이 동족을 배신했던 것도 알고 들었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투르.
“좋아. 필요한건 모두 알고 있구나. 지루하겠지만 옛 이야기를 가급적 짧고 간결하게 해주마. 세상이 형성될 때, 우리 용들이 있었다. 우린 처음부터 다른 모든 종을 능가했어. 영원히 살았고, 무척 강했지. 그래서 우린 단 한 가지 질문에 집중했다. 우린 무엇을 위해, 어떻게 태어났는지,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르투르는 용들이 너무 한가한 질문에만 몰두한 것 아닌가하는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다. 너무 강해서 생존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되니 그런 추상적인 질문에만 몰입하던 것 아닌가.
“거기엔 우리 중 누구도 거기 답을 내지 못했어. 나도 아직 모르겠다. 그냥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었다는 것만 아는 거지. 우리의 기준으로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우린 그 질문에 답하는 걸 포기했어. 대신, 우리 용들은 모두 세상의 특정한 분야에 대한 강력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예를 들어, 나는 생명을 다스리는 힘이 있다. 용의 말로 선언만 하면, 만나는 인간을 죽이거나 살릴 수도 있지. 지금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이 힘도 권능의 일부이고.”
아르투르는 악마가 저주받은 언어를 내뱉던 걸 떠올렸다. 검은 불길을 내뿜고, 인근을 모두 불태우던 것이 그의 권능이었던 모양이다. 엘라카르시스는 아르투르가 아직 관심을 보이는 걸 보고 말했다.
“그걸 깨달을 쯤, 만나게 된 것이 너희 인간들이었다. 우리 모두, 너희를 정말 반가워했다. 모자라긴 해도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생명체는 너희가 유일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엘라카르시스는 천사 같이 새하얀 미소를 지으며 당시의 기쁨이 드러냈다.
“그래서 우리는 권능으로 너희를 돕고 지식도 전해주었지. 많은 용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가서 아예 후손들도 남겼어. 아직 세상에도 그 아이들의 후예들이 남아있지. 그렇게 보면 네게도 우리 종족의 피가 흐르긴 하는구나.”
엘라카르시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르투르를 내려다보았다.
“북구인들을 말하는 거군요. 그렇다면 당신과 발타리아가 인간들의 편에 섰던 이유도, 그런 것 때문입니까?”
“둘 다 혈육은 남기지 않았어. 내 경우엔 혈육을 잃는 고통을 알고 싶지 않아서였다. 늙어 죽는 것만은 나도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문제였어. 반면, 발타리아는 조금 기괴한 망상에 빠져들어, 자신이 만인에게 공정한, 완벽한 재판관이 되어야한다는 강박 관념에 빠져있었거든.”
엘라카르시스가 말을 덧붙였다.
“그는 자기가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라고 생각했어. 인간들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지만, 우리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어. 발타리아는 분명히 우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였고, 훌륭한 지도자였지만 스스로가 생각하는 전능하고 결점 없는 존재는 아니었어. 하지만 그의 자존심을 존중해서 다들 어느 정도 맞춰주었었지.”
“계속 하십시오.”
아르투르의 얼굴엔 따분해 보이는 기미가 보였지만, 당장은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어 계속 했다.
“아무튼, 인간들의 수가 불어나서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자 모든 게 완벽해보였어. 인간들은 끝없이 자손을 낳으며 번성했고, 우리들에게 받은 지식 덕분에 문명을 발전시켰지. 그렇게 되자 우리는 완벽한 신들로서 숭배 받았어. 세상 어디를 가나 인간들은 우리에게 절을 하며 찬미했고, 자진해서 산 제물이 될 정도로 우리를 사랑했다.”
아르투르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느끼는 감정을 최대한 돌려 말했다.
“그건…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관습이군요.”
“아직 북구인들은 사람들을 제물을 바치지 않느냐. 너도 그들의 관습에 이끌렸던 만큼, 당시에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는 해볼 수 있을 게다.”
“….”
엘라카르시스는 표정을 풀면서 아르투르를 달래듯 말했다.
“나무라려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와 인간들 간의 사이가 좋았다는 점을 알리고 싶은 거다. 또 혹여나 내가 네게 그런 걸 시킬까 걱정하지마라. 난 그때도 산 제물을 좋아하지 않았고 요구한 적도 없다.”
아르투르는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다행이군요. 그렇다면 왜 갑자기 신들이 우리를 멸하려고 했던 겁니까?”
한숨을 쉬는 엘라카르시스.
“그 이야기 때문에 설명을 길게 했구나. 우리 가운데 첫 번째로 죽은 자가 나오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엘라카르시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인간들의 문명이 성장하는 한, 우리들은 결국 사라지는 운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