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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너머에 펼쳐진 광경은 일행의 극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아르투르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케이는 헛구역질을 했다. 심지어 문명인들이 보기엔 잔인하기 그지없는 두 북구인 전사, 힐데군드와 토르스탄마저 굉장히 역겹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발타리아 맙소사.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늘 상 신앙에 회의적이던 카밀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절로 신의 가호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 펼쳐진 광경은 악마적이란 말 외엔 다른 표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예배당의 정중앙에선 진홍빛 불꽃이 천장까지 세차게 타오르고 있었고, 수백 구의 시체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시체들은 하나 같이 아주 고통스럽게 죽어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피와 가죽으로 만들어진 기이한 문양들은 예배당의 벽과 바닥, 기둥마다 새겨져 있었다. 레오폴트도 넋을 놓은 채 중얼거렸다.
“신성 모독이군.”
아르투르는 충격에서 헤어 나왔다. 이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킬 때가 아니란 걸 알았다. 이런 끔찍한 일을 행한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르투르는 깨끗한 빛을 발하는 성검을 진홍빛 불꽃을 향해 겨누었다. 불꽃에서는 유황냄새가 가득 풍겨져 나왔고,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리 나와라. 비겁한 놈아. 널 섬기던 자들의 피가, 무고하게 희생당한 이들의 영혼이 복수를 원한다!”
예배당의 벽면에 놓인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어두운 빛이 들어와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불꽃은 아르투르의 말에 반응한 듯 더욱 세차게 타오르다가 그 안쪽에서 늑대의 모습을 드러냈다.
- 환영식은 마음에 들었느냐? 파멸의 검의 선택을 받은 자야. -
아르투르는 성검의 손잡이를 꽉 붙잡은 채, 늑대의 형태를 한 그림자를 향해 다가갔다.
“당장 너를 베어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지금 말해라.”
- 건방진 필멸자 같으니. 할 수 있다면 해보아라. 그 전에 네 검에 남은 발타리아의 힘을 삼키고, 영혼까지 집어삼켜주마. 그 전에, 네 동료들부터 차례로 죽여줘야겠군. -
늑대는 고개를 돌려 아르투르 일행을 바라보다가, 북구인 삼인방에게서 시선이 멈추었다.
- 너희는 용의 자손들이 아니냐. 어찌하여 배신자의 사도와 같이 왔느냐. 온 이상, 너희는 내 편을 들어야만 한다. 나는 너희 조상들이 섬기던 신이며, 부활한 뒤에는 다시 너희들의 신이 될 것이다. -
토르스탄은 혼란스런 표정으로 힐데군드와 베오릭을 바라봤다.
“맞는 말이냐? 정말로 우리의 신 중에서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이 있었다고? 저 악령이 한때는 용이었고?”
건성으로 답해주는 힐데군드.
“힘을 잃고 추락한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봤어. 그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말을 끊은 그녀는 검과 방패를 앞세우며 늑대를 노려봤다.
“그렇다고 우리가 저놈을 도와야 할 이유는 없지. 아무튼 지금은 우리 신이 아니잖아. 옛날에 그랬을지는 몰라도. 우리의 신 중 살아남은 자는 단 하나, 종말의 선고자 뿐인걸.”
- 이런, 너흰 문명인을 자처하는 발타리아의 추종자들처럼 배은망덕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은총을 기억해라. 원시의 추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불을 내려준 것이 나고, 사냥감을 잡을 수 있도록 지혜를 가르쳐 준 것도 나다! -
“그거 미안하게 되었네. 하지만 난 누군지도 모르는 내 조상이 받은 은혜에는 관심 없어. 난 너한테 빚 진 것이 없으니 별로 살려둘 이유가 없는데.”
- 저들을 죽이고 파멸을 불러오는 검을 가져와라. 그렇게만 한다면 부활한 후에, 상상하지도 못할 은총을 내리겠다. -
“내게 거들먹거리면서 자길 섬기라고 말한 놈들은 많았지. 신이건 악마건, 자길 섬기라고 하는 놈들에게 해줄 대답은 하나야.”
힐데군드는 비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조-옷-까.”
그녀의 손동작은 아주 빨랐다. 허리춤에 매어둔 손도끼 자루에 손을 내뻗는 것이 눈꺼풀을 한번 깜짝할 사이, 그것을 뽑아드는 게 두 번째 깜짝임. 세 번째 깜빡임이 끝날 때 이미 손도끼는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 아주 끔찍한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신의 징벌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
불꽃은 날아드는 도끼를 집어삼키며 손도끼가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했음을 과시했지만,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상대는 난처해하는 토르스탄 따위 고려하지 않고, 이 불손한 필멸자들을 모두 고통스럽게 죽이기로 결정했다.
피어오르던 불꽃은 더욱 강렬히 타오르며 용솟음치는 불기둥으로 변했다. 예배당의 지붕이 폭발하듯 터져나갔고, 건물의 불붙은 파편들이 일행들을 향해 떨어졌다.
“모두 예배당 밖으로 피해라!”
아르투르는 눈앞의 악마가 분노했음을 직감했다. 성검은 이전보다 더 강렬한 빛을 내며 악마의 힘에게 맞설 힘을 주었지만, 여전히 상대의 것에 비하면 작은 힘에 불과했다. 불기둥은 건물 전체를 집어삼키는 화마로 변했고, 불꽃의 파도가 일행을 휩쓸기 위해 몰려왔다. 빠져나가고는 있었지만 사람의 발걸음보단 몰려드는 불꽃이 빨랐다.
"빛이여!"
아르투르가 몰려오는 화마에 성검을 내밀며 정면으로 맞섰다. 성검의 빛이 만들어낸 반원형의 장벽은 몰려오는 화염의 물결을 저지하며 오히려 반대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악마는 그것을 더욱 거센 불꽃으로 바꾸어 돌려보냈고, 같은 일을 세 차례 반복하자 충만하던 성검의 힘조차 사그라들며, 빛의 세기가 약해져갔다.
‘제길. 이놈은 여기서 힘이 무한 한 거야. 예배당 안은 놈이 가진 성소니까.’
아르투르는 주변에 널린 시체와 제단에서 끊임없이 악마를 향해 흘러드는 힘을 보고는, 재빨리 예배당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 아르투르는 간발의 차이로 몸을 날려 빠져나왔다.
“콜록, 콜록. 죽을 뻔 했군.”
아르투르가 땅을 딛고 일어났을 때, 눈앞의 케이는 멍한 표정으로 예배당 위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화마는 갈수록 거세졌고 요새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지만, 단지 그 이유는 아니었다.
레오폴트조차 질린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예배당 위를 가리켰다.
“저, 저거 말야. 잡을 수 있는 거 맞냐?”
소용돌이치는 불기둥 속에서, 사람의 형상을 한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불기둥 속에서 그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존재는 사람의 네 배는 될법한 크기였다. 피부는 마그마처럼 붉은 색이었고, 얼굴은 늑대의 형상이었으며, 날카로운 뿔과 긴 꼬리를 지녔다. 오른손에는 공성 무기로 사용해도 손색없을 크기의 화염검이, 왼손에는 번득이는 기다란 불의 채찍이 들려있었다.
몸에서는 유황 냄새를 가득 풍겼으며 몸 전체가 화염에 감싸여있었다. 그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그림자가 드리웠고 불길이 치솟았다.
- 주제 넘는 놈들 같으니라고. 신을 앞에 두고 건방지게 혀를 놀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나는 불의 신이자 지혜를 전해준 자 펜하르키렐이니라! -
아르투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서서 성검을 겨누었다. 힐데군드는 여전히 킥킥 웃어대며 방패를 앞세우며 뒤따라갔다. 한편, 레오폴트는 동요한 감정을 최대한 줄이며 베오릭에게 물었다.
“야. 저런 놈에게 우리 무기가 통하긴 해?”
베오릭은 양손에 투척도끼를 하나씩 쥐면서 답했다.
“너희 사제들에게 축복을 받았다면 통하겠지. 발타리아의 힘은 저 녀석에겐 상극이니까.”
레오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운 물건을 구입할 때마다 축성을 받는 건 서부의 문화적 관습이었다. 무기엔 목숨이 달려있으므로 다들 특별히 신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하, 그냥 기분 좋자고 하는 건줄 알았는데 정말로 사제의 축복이 악마를 찌를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런 거야? 살아 돌아가면 전속 주교에게 잘해줘야겠어. 구세주 발타리아시여, 들리십니까? 저희 모두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대성당 한 채를 지어 바치겠습니다.”
반면 카밀은 쌍욕을 내뱉으며 자기 무장들을 내팽개쳤다. 몸만 무겁게 만드는 것이니 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염병할. 사제들이 돈 뜯자고 돌팔이 미신이나 강조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로 효과가 있었단 말이지? 이런 망할 놈의 세상 같으니.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는거냐.”
카밀은 오래된 것들에는 모두 이유가 있으니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존중 받아야 한다고 씨 부리던 동네 사제를 떠올렸다. 아무리 귀족들에게 험한 꼴을 보아도 복종해야한다고 주장하던 개새끼였다. 그놈의 말에 사실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심히 불쾌했다.
‘이러다간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소리를 진지하게 믿겠는데.’
한편, 케이는 카밀에게 자신의 장검을 내밀었다.
“아저씨. 이거 써요. 두라노에서 구입하고 축성 받은 무기에요. 저보다는 아저씨가 가지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카밀이 손을 내밀어 검을 잡았다. 그 때, 악마의 화염검이 일행의 정중앙을 내리쳤고 다들 사방으로 흩어져 몸을 피했다. 그 사이 아르투르는 앞으로 내달려, 악마를 향해 돌격했다. 힐데군드가 뒤를 따랐다.
“너 엄청 즐거워 보이는데.”
“이런 싸움을 기대해왔거든. 마음껏 성검을 휘둘러도 될 만한 적수를 상대로 내 한계를 시험해볼 수 있는 싸움 말이야! 잔인하게 죽이고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싸움! 자랑스럽게 회상할 수 있는 싸움!”
아르투르는 빠르게 적의 움직임을 살폈다. 오른손의 화염검, 왼손의 화염 채찍. 화염검은 거둬들이는 중이니 화염 채찍만 조심하면 될 터였다. 그 때, 악마는 오른발을 들어 아르투르를 짓밟기 위해 내리찍었지만 아르투르는 바로 놈의 발바닥을 향해 성검을 내질렀다.
“영광스러운 승리를 - !”
빛나는 성검이 악마의 발바닥을 꿰뚫었고, 놈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놈의 상처에선 녹색 피가 콸콸 쏟아졌다. 쏟아진 피는 콸콸 끊어오르며 연기를 내보냈다. 아르투르는 연달아 반대편 발에 공격을 가하고자 했지만, 번쩍이는 불꽃 채찍이 자신을 향해 굉장한 속도로 날아왔다. 아르투르는 성검을 들어 그것을 받아쳤다.
채에엥 - !
성검의 빛과 불꽃 채찍이 부딪칠 때, 굉음과 함께 힘이 부딪치는 충격이 발생했다. 악마는 덩치가 워낙 커서 조금 흔들리는 정도에 그친 반면, 아르투르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 흠, 아직 그 검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나보군. 저승에 가서 발타리아에게 배워보거라. -
악마는 마무리 일격을 가하기 위해 아르투르를 향해 화염검을 내리쳤다. 그의 예상보다 너무 행동이 빨랐다.
‘제기랄, 피하기엔 너무 늦었어.’
성검을 내밀긴 했지만, 제때 보호막이 형성될 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아르투르를 확실하게 구해낸 건 사각 방패를 들고 끼어든 힐데군드였다. 그녀의 사각 방패에 화염검이 부딪치자 공성병기와 성문이 부딪친 듯한 굉음이 났고, 힐데군드는 방패만 챙긴 채로 바닥에 나자빠졌다.
“콜록, 콜록. 이놈 부하한테 가져온 건데 효과는 좋네.”
아르투르는 손을 내밀어 먼지 속에 파묻힌 그녀를 일으켜주었고, 두 사람은 악마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고맙다. 네가 대신 막아주지 않았으면 위험 했을 거야.”
짜증나는 표정을 짓는 힐데군드.
“아. 그딴 소린 나중에 하고. 어떻게 이길 거야?”
아르투르는 가벼운 표정으로 답했다.
“놈은 너무 강하고 빠른데다가, 지치지도 않아. 답이 없는데.”
“그건 나도 그렇다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염 채찍이 그들이 있던 자리를 내리쳤고, 두 사람은 황급히 양 옆으로 갈라져서 피했다.
“뭐, 싸우다보면 어떻게 길이 생기지 않겠어?”
“맞는 말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