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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일행은 꼬박 하루하고 반나절을 행군한 끝에, 성혈 기사단의 본부인 나스리온 성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채는 가파른 산을 등 뒤에 진 채 우뚝 솟아 주변을 내려다보는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장기간의 공성전에 대비하는데 최적화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만약 군대로 함락시키고자 한다면 정말 어려운 일이 될 터였다.
하지만 아르투르 일행은 야음을 틈타 소수 인원이 내부에서 성문을 열고, 나머지가 덮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여전히 북구인들과 기사들은 서로를 불신했지만, 적어도 실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서로를 확고하게 신뢰하게 되었다.
“일단 주변 상황부터 알아보지. 정찰대를 구성해서 요새의 방비 상태 및 주변 마을을 탐문해야하네.”
북구인들은 모두 뛰어난 사냥꾼이어서 잠입 임무에 적합했지만, 기사들은 단 한 사람도 비겁한 은밀 기동 따위는 할 줄 몰랐다. 결국 정찰 대원으로는 카밀과 명사수 군나르라는 북구인 궁수가 선택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체구는 적당하지만 아주 날래고 빠른 이들이었다. 나머지 일행은 인근 숲에서 몸을 숨긴 채 기다렸다. 날씨가 추웠지만 불을 피울 수는 없었기에 몸으로 버텨야했다. 아르투르는 케이가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모피 망토를 벗어주었다.
“마스터! 그러시면 제 입장이 뭐가 되요?! 그러지 마세요. 고난도 훈련의 일종이라고 하셨잖아요.”
고개를 젓는 아르투르.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앓아누우면 그게 더 문제니까 그냥 받아라. 토 다는 일은 허락하지 않겠다.”
케이는 뭐라고 말하려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망토를 둘러썼다. 레오폴트의 종자인 막시밀리안도 혹시 하는 기대감을 지니며 여우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두른 레오폴트를 바라봤다. 그는 나무에 기대서 졸고 있었다.
“아, 역시 비싼 게 돈값을 하네. 정찰병들 돌아오면 깨워라.”
“…넵.”
레오폴트는 눈을 크게 뜨고 막시밀리안을 바라봤다.
“목소리가 뭔가 못마땅해 보이는데, 혹시 케이 녀석과 비교하는 헤이해진 정신 상태는 아니겠지? 재는 따로 챙겨줘야 되는 평민 출신이고, 넌 기사 가문 출신이잖아. 그치?”
막시밀리안은 기합을 넣어 답했다.
“무, 물론입니다! 추위를 견뎌내는 것도 모두 훈련 아니겠습니까?”
“목소리 낮춰. 짜식. 지금 네가 걸친 싸구려 망토라도 고마운 줄 알아. 나 때는 말이야. 종자 시절엔 망토도 못 걸쳤어. 알아?”
막시밀리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마스터는 가끔 이상한 부조리를 관습이라며 정당화하곤 했다. 물론 챙겨줄 때는 확실하게 챙겨준다는 점에서 갈구기만 하는 성질 나쁜 기사들보단 훨씬 나았다.
‘내 아버지는 마스터의 아버지를 섬겼고, 나도 기사 서임을 받고도 평생 마스터를 섬기지. 아주 오만한 분이지만, 대륙의 왕좌에도 도전할 수 있는 혈통의 사람이라면 그건 미덕이 될 지도 몰라. 충성심은 항상 높게 여기시는 분이니까, 진심을 다하다보면 언젠가 보답해주시겠지.’
얼마 뒤, 망을 보던 막시밀리안은 카밀과 군나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일행들에게 알렸다. 돌아온 두 사람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마치 보지 못할 것을 본 것 마냥.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 아르투르.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카밀? 자네가 그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보네.”
카밀의 표정에는 혼란스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는 기억을 되새긴 후, 아르투르를 직시하며 말했다. 군나르는 일행들에게 북구어로 설명했다.
“본 적이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성채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머무르던 것이 분명한데, 말 그대로 모두 사라졌습니다. 모든 귀중품은 남아있었고, 화덕에는 굽다 만 빵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항의 흔적은 물론, 발자국조차 전혀 없어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르투르는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 머리가 아파왔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게 분명했다.
“불가능한 일이네. 성채 안은 들어가 보았나?”
성채를 언급하자 카밀이 애써 억눌러왔던 두려움이 역력히 드러났다.
“…주군, 우선 상황을 말씀드리기 전에 간언부터 드리겠습니다. 이번만큼은 신중하게 대처해주십시오. 그곳은 저주 받았습니다. 교회의 성자건, 동방의 마술사들이건 신비를 다루는데 익숙한 사람들을 먼저 데려오셔야 합니다.”
“알겠으니 상황을 보고하게.”
“성채의 성문은 활짝 열려있고, 보초병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깃발마저 내려가 있더군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성 안에는 피 냄새가 가득 진동했고, 저 같은 촌놈도 알 수 있을 정도의 불길한 기운만 느껴졌습니다.”
카밀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혹시 내부는 확인해보았나?”
“용서하십시오. 주군,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천 명의 정예병들이 지키고 있었다면 방법을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평생, 저렇게 기이한 곳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악령이 다스리는 곳이 분명합니다.”
한편, 군나르의 설명을 들은 북구인들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오직 베오릭만 빼고. 아르투르는 그의 태연한 표정을 기억해두었다. 이야기를 들은 토르스탄과 시라노가 말했다.
“내가 한번 다녀와 보지. 이 친구들이 뭔가 잘못 보았을 수도 있잖아.”
“저희 일행에선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어떤 풍경인지 궁금하네요.”
하지만 그들은 이전 사람들보다 더 섬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저긴 저주 받았어! 악령이 사는 곳이라고! 저기서 죽으면 신들의 곁으로도 가지 못 할 거야!”
“토르스탄의 말이 맞습니다. 아무리 성검의 주인이신 아르투르 공이시지만 이번만큼은 피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레오폴트와 힐데군드는 이쯤 되자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너희들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뭐가 있나 궁금한데. 아무튼 적병은 없단 이야기니 직접 가서 살펴보자고. 말보다는 직접 보는 게 빠르겠어.”
“처음으로 잘 생긴 도련님 말에 공감. 가보자!”
아르투르도 두 사람의 말에 동의했기에 일행은 기사단 성채로 향했다. 아르투르는 부담스런 시선이 느껴져서 뒤를 보니, 베오릭이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자신의 표정 변화를 살피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일부러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모르는 척 했다.
성채의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쯤, 성검은 진동하며 칼집과 부딪쳤고 아르투르는 성검을 꽉 움켜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 때 성채에서 검붉은 광채가 번득였다.
“저, 저건 뭐냐?”
성채 전체에 저 불길한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것은 생명체에 대한 한없는 증오와 악의를 담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깊어보여서 어찌 할 도리가 없어보였다. 아르투르의 정신마저 움츠려들었고, 주인의 감정을 전해 받은 에쿠잘루스조차 두려움에 휩싸여 나아가길 거부했다.
“히히히히히힝 - !”
에쿠잘루스는 성급히 앞발을 들어올리며 멈추었고, 아르투르는 침착히 그를 멈춰 세운 후 도로 통제 하에 넣었다.
“옳지. 괜찮아. 괜찮아.”
에쿠잘루스를 달랜 아르투르는 안장을 딛고 하마했다.
“뭐야, 네 말, 겁쟁이였냐?”
힐데군드를 시작으로 일행 모두의 시선이 아르투르에게 몰렸다. 아르투르는 자신이 느낀 공포가 드러나지 않도록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지도자는 언제고 침착해야한다는 무의식적인 판단이었다.
“다들 저거 안 보이나? 성채에서 검은 빛이 번득이잖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아르투르, 너 괜찮냐?”
의아하게 답하는 레오폴트를 본 아르투르는 자신에게만 저 광경이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그 때, 머릿속에 베오릭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너는 오랫동안 신이 만든 물건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느냐. 평범한 인간들보다 영적인 세계를 보는 감각이 훨씬 탁월해진 탓이다. 사제인 힐데군드도 아직 느끼지 못하고 것이 그 증거다. -
뒤를 돌아보니 베오릭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을 뿐, 입가는 닫혀있었다. 분명히 말이 아니라, 생각 속에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 전체가 숨김없이 그에게 드러나는 것 같았다. 이런 발가벗은 느낌을 받은 적이 단 한번 있었다. 호수의 여신, 엘라카르시스와 꿈속에서 만났던 시점이었다.
- 너는 대체 정체가 뭐냐?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엔 너무 많은 걸 같은데. -
- 내 정체는 필요한 때가 되면 네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신들이 거닐던 시대를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란 것 정도만 알아둬라. 지금 중요한 건 저 성채에 잠들어있는 옛 존재가 너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지. 불의 신, 펜하르키렐 말이다. -
- 악령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신이라고? -
- 지금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쇄락했지만, 한 때는 그랬다고 하더군. 옛 전승에 의하면 인간들에게 최초로 불을 나눠준 자였다. 배신자 발타리아에게 패배하고 육신을 잃었지만 아직 혼은 남아있던 게지. 그런 와중에 네가 그의 눈에 들어온 모양이구나. -
- 척 봐도 별로 좋은 신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
- 궁금하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봐라.-
그 전언을 마지막으로 베오릭은 답해오지 않았다. 남들이 볼 때는 아르투르와 베오릭이 멈춰서, 서로의 시선을 마주본 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힐데군드가 빈정거렸다.
“니들 왜 이렇게 느끼하게 쳐다보냐? 사랑에라도 빠졌어?”
“아, 무슨 끔직한 소릴.”
아르투르는 끔찍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간혹 남색가들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드러내놓을 수 있는 사실은 되지 못하는 시대였다. 힐데군드는 깔깔 웃었다.
“뭘 그리 진지하게 답해. 뭐, 다행이네. 진짜로 남자 좋아하는 건 아니라니까.”
기사들과 북구인들도 깔깔 웃었다. 행렬은 다시 전진했는데, 성채에 다가갈수록 아르투르의 발걸음은 무거워졌다. 성채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오의 기운은 갈수록 선명해졌으며, 자신을 향한 적대감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아까부터 계속 어딘가 아프신 것처럼 보여서 걱정이 됩니다.”
“성채에서 날 지켜보는 놈이 있어. 하지만 아직은 견딜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거든 말씀주세요. 마스터.”
성채 근방에 이르자 힐데군드도 무언가를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사제도 겸하는 지라 남들보다는 영적인 세계에 민감했다.
“존나 불길한데.”
일행이 성채로 들어가는 도개교 너머에 도착하자, 이제는 모두들 느낄 수 있었다. 요새 안에 도사리고 있는 저주 받은 기운과 생명에 대한 맹렬한 증오를 말이다. 모두 평생 동안 공포에 맞서는 훈련을 해온 자들이라 당장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당장 뒤돌아서서 도망치는 게 맞았다.
“피 냄새 한번 지독하군.”
모두들 레오폴트의 중얼거림이 의도적으로 공포를 숨기려는 말임을 알았다. 요새 안쪽에서 아주 오래되고, 강력한 존재가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그들을 도발하는 모양새였다. 아르투르는 악의 어린 시선을 마주보며 성검을 뽑아들었다. 오랫동안 힘을 비축해둔 성검은 도로 잔뜩 빛을 내고 있었다. 주변의 어둠이 걷혀나갔다.
“자, 진짜로 악마와 싸워보고 싶은 사람은 따라와라.”
아르투르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피 냄새가 가득 풍기는 성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귀신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산 자의 세상의 것이 아님이 분명한 기괴한 소리들이 잇달아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