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힐데군드는 설렁설렁 걸어가서 기사단장의 머리에서 손도끼를 뽑아들었다. 도끼에 낸 구멍 사이로 뇌수와 피가 주르륵 뿜어져 나왔다.
“자, 다음으로 덤빌 놈?”
그녀는 여유로운 태도로 손도끼를 양손으로 넘겨받았다. 얼마 전까지 환호하던 광신도들의 눈동자는 초점이 멎었다. 그들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신의 계시를 받은 불꽃의 인도자가 야만인 여자에게 죽다니? 이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 자신이 잘못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한 냉철한 판단을 가장 먼저 내린 건 기사단장의 부관이었다.
“당황하지마라! 저 마녀의 마술이 우리의 눈을 속이고 있다!”
“아, 너구나!”
콰직 - !
부관의 머리에도 도끼가 자라나자 광신도들은 현실을 깨닫고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싸우려 들거나 도망치는 과감한 행동을 취하는 건 소수였고, 대부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기도하거나, 울부짖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다들 정신 나갔구만.”
아르투르는 그들을 비웃으며 앞으로 나섰고, 자신을 향해 악담을 퍼부을 뿐, 아무런 방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기사를 향해 여명을 내리쳤다.
챙 - !
그러나 어느새 나타난 불타는 장검이 여명을 가로막았다.
“다들 믿음이 부족하구나! 영원한 불꽃께서는 너희를 지켜보시며, 내가 그 인도자니라. 삶은 잠깐이나 불꽃은 영원하리라!”
기사단장의 목소리였다. 놀란 아르투르는 검을 타고 전해지는 열기를 피해 여명을 거두었고, 단장은 재빨리 좌측 상단에서 대각선으로 내리그었다. 아르투르는 순간 여명에 가득 힘을 실어 쳐냈지만, 잠깐의 접촉만으로도 검이 너무 달아올라 붙잡고 있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손에서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녹지 않는 걸보니 꽤 좋은 검이군. 불꽃은 영원하리라!”
광신도 일동도 단장의 말을 따라했다.
“불꽃은 영원하리라.”
단장의 짓뭉개진 피부는 새로운 살이 차올라 부상을 입은 부위를 대체했고, 부서진 뼈는 빠르게 자라나 빈자리를 매웠다.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난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대부분의 이들은 극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아르투르는 한숨을 쉬며 빛의 성검을 꺼내들어 가해지는 일격을 침착하게 막아냈다.
챙 - !
신비한 힘을 두른 두 검이 부딪치자 주변으로 충격파가 일었다.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지난번엔 입에서 불길을 뿜는 반신을 만났거든. 이번에는 머리가 쪼개져도 되살아나는 이단 교주냐.”
기사단장은 검을 거둬들이며 미소를 지었다.
“너 역시 죽음의 경계를 목격한 자가 아니더냐. 배신자 신의 비호 덕분에 살아있는걸 잘 안다. 어쨌든 기사간의 싸움인데, 소개가 먼저 있어야겠지. 나는 울리히 폰 슈타이어마르크. 불꽃의 인도자이며….”
휘릭 - !
쾌속의 손도끼가 우측에서 그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지만, 울리히는 이미 힐데군드를 경계하고 있던 터라 침착하게 방패를 들어 막았다.
“두 번 당할 것 같으냐! 모두 공격하라! 불신자들을 벌하라!”
“불신자들을 벌하라!”
광신도들이 다시 몰려드는 가운데, 힐데군드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멍청한 놈아. 그걸 들어줄 시간에 그냥 찔렀어야지.”
아르투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동네에선 싸우기 전에 자기소개 하는 게 관습이거든. 그래야 누굴 죽인지는 알 것 아니냐.”
“알 게 뭐냐. 뒈지면 그냥 시체지.”
아르투르는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니 말에 맞네. 어차피 질 일도 없어서 여유 좀 부렸다.”
아르투르의 전투 감각은 이미 몰려드는 적들의 상태를 모두 살핀 뒤였다.
“대장은 내가 처리할게. 나머질 부탁한다.”
“짜식, 제일 재밌는 걸 가져가려 그러네. 이 맘씨 좋은 누나가 양보해준다.”
“웃기시네.”
힐데군드는 마지막 남은 손도끼를 울리히에게 내던졌다. 그는 이번에도 똑같이 사각 방패를 들어 막아냈지만, 힐데군드는 성큼 뛰어서 사각 방패를 발판 삼아 울리히의 후방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호위 기사들이 일제히 그녀를 저지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인도자님을 지켜라!”
“판은 깔아줬다. 빨리 끝내.”
아르투르는 자신과 울리히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지자 곧장 돌격했다. 울리히도 아르투르를 마주하며 싸울 준비를 했다. 그는 오른손에는 불타오르는 장검을, 왼손에는 몸 전체를 가리는 검은 사각 방패를 들고 있었다. 방패에선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디 한번 볼까.”
아르투르는 양손에 힘을 가득 실어 울리히를 향해 내리쳤다. 정직하지만 아주 빠르고 위력적인 일격이었다. 울리히는 이번에도 재빨리 방패를 들어서 가로막았고, 성검은 방패를 두 동강 내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군.”
아르투르는 몸에 힘을 가득 실어 울리히의 방패에 부딪쳤다.
“으랴 - !”
울리히는 몸에 가해지는 육중한 충격을 견뎌내지 못한 채 쓰러져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헉 - !”
아르투르는 곧장 성검을 내리쳐 끝을 보고자 했지만, 그가 든 검은 방패는 워낙 커서 울리히의 몸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빈틈을 찌르려는 일격이 이어졌지만, 울리히는 방어만은 기가 막히게 성공했다.
“공격! 공격해라! 무엇들 하느냐!”
울리히의 다급한 외침에 광신도 부대가 황급히 가세했다.
“이것들이 어딜 감히!”
아르투르는 화를 내며 갑옷을 통째로 베어버리는 검을 휘둘렀다. 성검이 번득일 때마다 평범한 병사들은 고깃덩이처럼 무력하게 잘려나갔다. 절단된 사지가 나뒹구는 사이, 울리히는 부하들의 희생에 힘입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어딜 일어나!”
하지만 아르투르가 귀신 같이 뒤돌아서서 성검을 내리치는 걸 본 울리히는 다시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이번엔 방패에 어떤 충격도 가해지질 않았다.
“?”
“네가 그럴 줄 알았지. 비겁한 놈아.”
아르투르는 성검을 바닥에 내팽개지고, 양손으로 검은 방패를 잡고 잡아당겼다. 울리히도 힘껏 힘을 주었지만 삽시간에 방패를 빼앗기고,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거렸다. 아르투르는 방패로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크억!”
아르투르는 곧장 방패를 내던지며 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울리히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그의 주먹이 적중하자 둔기에 맞은 것처럼 울리히의 머리가 깨져나갔다. 아르투르는 피가 튀는 것에 아랑곳 않고 재차 주먹을 날렸고, 곧 울리히의 얼굴이 완전히 함몰되어 곤죽이 되었다. 그는 힘없이 쓰러졌고, 아르투르는 목뼈를 짓밟아 부수었다.
“자, 이러고도 살아나나 보자고.”
아르투르는 내팽개쳐둔 성검을 회수해서 등 뒤를 밟고 울리히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자 울리히의 몸 전체로 불길이 번져나가더니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한 줌의 재로 변해버렸다. 그가 쥔 불꽃의 검도 사르르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오직 검은 방패와 갑옷의 잔해만이 남았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아르투르는 놈의 상징인 불꽃이 그려진 검은 방패를 높이 들어올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울리히의 말 한마디에 자결도 할 것 같던 광신도들은 이제 미친 듯이 달아나거나 스스로 실성해버렸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 본 늑대신, 펜하르키렐은 큰 위협을 느꼈다. 울리히는 여러 강적을 물리친 강인한 챔피언이었다. 그가 실패했다면 평범한 하수인들로는 어림도 없으리라.
‘분명히 나는 성검의 힘에 길항할 수 있는 힘을 내려주었건만.’
하지만 놈은 그걸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맞다가 죽어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저놈을 멈추려면 자신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교단에 자신의 강림을 준비하라 일렀다.
***
전투가 끝난 직후, 아르투르는 성검을 바닥에 꽂은 뒤 숨을 몰아쉬었다. 아르투르 일행도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전과 확대를 위한 추격은 포기했다. 아르투르는 들판에 널어진 시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놈들, 뭣 때문에 악령 하나한테 이렇게 신실했던 거야?”
옆 자리에 있던 힐데군드는 방금까지 사람이었던 고깃덩이에서 손도끼를 뽑아들며 답했다.
“약한 놈들이 이렇게 죽자고 달려드는 건 몇 번 못 봤는데… 아내를 뺏길 위기에 놓인 남자들이 이렇게 싸우더라고?”
“그럼 그 늑대가 얘들 애인이라도 되나?”
힐데군드는 나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필사적인 건 말이 안 돼. 분명해. 사람 모습으로 변해서 대주던 게 틀림없어. 그리고 아마 존나게 이쁠 거야.”
아르투르는 헛웃음을 내뱉는다.
“그딴 헛소리 진지하게 하게 하지마라. 떠올리게 되잖아.”
힐데군드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낄낄거렸다.
“왜, 너도 동하냐?”
아르투르는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 내장 뒤집어쓰고 있으면서 그런 생각하는 것도 재주다.”
힐데군드는 킥킥대면서 무기에 묻은 이물질들을 닦아댔다.
“귀엽긴. 너도 칼밥 좀 먹은 것 같던데, 그 정도 됐으면 이런 피 냄새도 즐길 때가 되지 않았냐?”
“후우 무슨 끔찍한 소리야. 사람 죽이는 걸 즐긴다는 게 진짠가 보구나.
힐데군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이미 하도 죽여 봐서 아무 감흥이 안 들어. 지금은 목숨을 걸고 싸울 때 느껴지는 그 심장 박동소리가 좋을 뿐이야.”
아르투르는 북구인들의 윤리관이 조금 많이 야만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여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일행을 살폈다. 다들 탈진해서 뻗어있거나, 몸에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에 바빴다. 전사자는 기적적으로 적었다. 여덟 북구인 가운데 한 사람이 쓰러졌고, 기사 가운데선 세 명이었다. 적들의 시체가 얼핏 잡아도 사백구는 될 법 하단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전과였다.
‘뭐, 한 절반은 겁에 질려서 가만히 있다가 죽은 것 같긴 하지만.’
아르투르는 압도적인 다수를 상대로도 주눅 들지 않고 싸울 수 있던 대담함, 그 자체가 용맹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아르투르의 눈에 능선 위에 앉아 기사단의 요새를 바라보는 베오릭이 들어왔다. 그는 일행 중 유일하게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고, 그 격렬한 싸움을 거치고도 체력이 전혀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기야, 내 성검이라고 말이 되는 건 아니지.’
아르투르는 베오릭이 원래부터 수상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자신만 모르고 있을 뿐, 이미 세상에는 곳곳에는 각종 신비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했다. 일행들은 짧은 휴식을 마치고 뒷정리를 했다. 우선 장례가 치러졌다.
전사한 기사들의 심장은 고향에 묻히기 위해 적출되었지만, 나머지 몸은 이 땅에 매장되었다. 기사들은 조용히 묵념하며 기도문을 외워 동료들의 명복을 빌었다. 반면 북구인 전사의 시체는 장작더미 위에서 화장되었다.
“형제여, 그대의 영광스런 죽음을 찬미하니, 먼저 가서 기다려주게.”
쓰러진 북구인 전사는 토르스탄의 형제였던 모양이었다. 곰 같은 토르스탄이 장송가를 부르며 그를 떠나보냈는데, 가사는 알 수 없었지만 아주 흥겹고 밝은 어조였다. 동료들 역시 무기로 방패를 치며 명복을 빌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돌며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술잔을 돌렸다.
“너도 한 입?”
힐데군드는 닭고기 구이를 흔들어보였지만, 아르투르는 고개를 저었다.
“너희한텐 죽음이 기쁜 일인가 보지?”
“싸우다 죽은 건 기뻐할 일이지. 싸우다 죽은 이들은 세상 최후의 날이 올 때까지 다른 전사자들과 끝없는 싸움을 하게 되거든. 그 뒤에는 세상 마지막 날에 종말의 신과 함께 세상을 파멸시키러 온다고들 하지. 근데, 누구도 죽은 사람이 돌아온 걸 본 적이 없으니 그냥 개소리 아닐까 했는데….”
힐데군드의 눈길은 아르투르가 허리춤에 찬 성검에 가서 멈추었다.
“저런 게 있는 걸보니, 어쩌면 신들이나 사후세계도 있을지도. 아무튼 싫음 말아라. 슬프면 고기를 먹으면 되는데, 왜 저렇게 궁상들이람.”
힐데군드는 침묵하며 기도문을 외우는 기사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일행들 사이로 돌아갔다. 북구인들이 말하는 어조를 보니, 그들은 떠나간 동료가 정말로 잘 죽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우리 기사들에게 어울리는 신들은 북구의 신들일지도 몰라. 전투를 통한 영광을 갈구하면서, 침대에서 늙어죽는 것보다 전장에서 쓰러지는 걸 원하잖아.’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힘이 넘치는 자신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병마를 앓으며 죽어간다는 건 끔찍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셨지만, 그 전철은 따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기사로서 칼을 쥐고 죽고 싶어.’
그렇다면, 싸우다 죽는 것은 한 평생 신념에 따르다 죽은 것이니 오히려 박수 받아야 할 일이 아닐까? 저들처럼 동료가 뜻을 이룬 것을 기뻐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쉬지 않고 머리를 맴 돌았다.
…
아르투르는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은 싸우는 자이지, 기도하는 자가 아니었다. 이런 종류의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는 일은 배운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영지 관리나 대 가문들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법을 눈으로 익혔지, 사후 세계니 문화니 하는 건 자신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아르투르, 한 가지만 명심하자고. 너는 아버지와 맹세했어. 언제고 네 명예를 따르기로.’
아르투르 일행은 장례가 끝난 후, 곧 바로 자리를 벗어나 기사단의 성채로 가는 여정을 계속 했다. 각자 동료들을 잃은 터라 이전보다 전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북구인이건, 기사들이건, 그들은 본질적으로 전사 집단이었고, 보복에 대한 갈망만큼 그들을 묶어놓기 좋은 구실은 없으리라.
아르투르는 그렇게 남달라진 일행과 함께 기사단의 성채로 향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늑대 모습의 악령을 해치워야만 했다. 그놈의 이름이 뭐든, 그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