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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사방에서 포위된 채 공격당했지만, 오히려 대담하게 나아가며 역공을 가했다. 다수를 상대할 때는 한 순간이라도 발걸음이 멈춰서는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오른손에 힘을 가득 주어 여명을 내리치자 적병의 머리가 투구와 함께 쪼개졌다. 두개골을 가르는 감촉이 전해지자마자, 그는 곧장 칼날을 빼들어 왼편으로 휘둘렀고 나무에서 과일 떨어지듯 사람의 목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일 대 다수에서 항상 주의해야하는 건 후방이었다. 아르투르는 전장의 소음 속에서도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예리하게 감각을 기울였다. 뒤편에서 공기의 소리가 둔탁하게 울리는 걸 느끼자마자, 곧장 양손으로 여명을 잡고 뒤돌아 받아친다. 예상대로 육중한 무기를 내리친 적병이 있었다. 거대한 양손 대검을 휘두르는 거한이었다.
“사람들이 네가 그렇게 장사라고 하더군. 얼마나 힘이 센 지 보자꾸나!”
아르투르는 그를 비웃으며 대검의 날을 비스듬히 흘려버리면서, 거한의 목을 꿰뚫었다. 상대는 숨을 꺽꺽대며 뒤로 쓰러졌다.
“검술도 배우다 만 놈이 힘싸움은 무슨.”
이번엔 양 옆에서 할버드를 내찌르는 자들이 있었다. 숙련된 무장병 분대였다. 이들은 자신의 움직임을 봉쇄하려고 들었다. 판금 갑옷을 타격할 수 있는 무기인 할버드를 주무기로 선택한 것과 이런 영리하고 날랜 움직임을 볼 때 기사들을 상대해본 경험이 많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최고들을 상대해본 경험은 없군.’
아르투르는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적들의 사각 지대로 들어간 후, 빙글 돌아서 공격을 피해냈다. 할버드를 든 공격수의 목이 떨어지는 건 한 순간이었고, 다른 공격수들도 뭘 해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불과 십 여초 사이에 다섯 명이 넘게 죽었다. 아르투르는 갑옷을 입지 않은 것 마냥 재빨랐고, 지치지도 않았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의 무예는 쉼 없는 단련과 경험이 합쳐져 절정의 경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잘 먹고 자란, 타고난 장사인 힘과 합쳐지니, 아무리 잘 훈련된 되었다고 한들 평범한 농민 혈통의 병사들은 대적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당한지도 모른 채 그냥 죽었다.
“몰아붙여! 놈도 곧 지칠 거다!”
착각이었다. 아르투르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전사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중엔 폐활량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다수와의 싸움을 오랫동안 겪으며 체력을 보존하는 여러 요령을 자연스레 익혔다. 가장 적게 힘을 들여서 상대를 죽이는 법, 긴 싸움에서 체력을 안배하는 법, 적병 중 뛰어난 자를 직감적으로 판별하는 법 등이었다.
하나. 둘. 셋.
적병 하나가 쓰러졌다.
하나, 둘, 셋.
또 하나가 쓰러졌다. 적들 사이를 누비는 아르투르는 살육에 최적화된 기계나 다름없었다. 눈이 닿지 않는 곳조차 감각적으로 파악하는 아르투르에게 사각 지대는 없었다. 포위 공격이 가해지면 날아드는 공격을 읽어낸 후 시간차에 맞춰 대처하며 반격하길 반복한다. 결국, 그가 가는 자리에는 시체만 남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적진을 헤집다보니, 어느 사이 아르투르는 힐데군드와 얼굴을 마주했다. 온 몸에 피를 헤집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녀도 별 다르지 않은 행동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르투르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너도 자신감만큼은 잘 싸우는구나.”
힐데군드는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그냥 죽고 싶은 광신도들인데 이 정돈 다하지 않나?”
그녀는 눈짓으로 자신의 북구인 동료들을 가리켰다. 일곱 전사들은 따로 행동하는 것 같으면서도, 절묘하게 서로를 보호해주며 적진을 쓸고 있었다. 심지어 기사들도 대적하질 못했다.
“너네 북구인들은 다 저러나?”
“당연히 아니지. 나랑 토르스탄이 여행 동료로 고르고 골라온 놈들이야. 몸과 정신 모두 완벽한 애들로만 뽑았다고.”
“오아아아아아아아!”
북구인들을 이끄는 베오릭의 활약은 눈부시다는 말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았다. 그는 평범한 도끼와 칼 한 자루만 든 채 기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베오릭이 휘두른 도끼는 일격에 방패를 부수고 적의 머리를 갈랐으며, 칼날은 판금 흉갑을 꿰뚫고 장기를 헤집어 놓았다.
“잰 뭐냐? 사람이 저게 가능해?”
“우리끼리도 저놈이 인간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가끔 하는데… 듣자하니 너도 홀로 기사 수십 명을 도륙했었다던데?”
“그건 성검의 힘을 빌려서 한 거고. 저놈은 그냥 맨 몸으로 하고 있잖나. 저놈도 무슨 조상 중에 용이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진짜 그럴지도 모르지. 저런 녀석이 어떻게 여태 무명이었는지 모르겠다니까.”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적들을 편안히 죽이고 있었다. 힐데군드는 아르투르의 얼굴을 향해 도끼를 던졌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도끼는 아슬아슬하게 아르투르의 머리 근처를 스쳐지나가, 뒤편에서 달려들던 철퇴를 든 사내를 고꾸라뜨렸다.
아르투르도 힐데군드의 목을 비껴나가며 칼날을 내찔러 힐데군드를 꿰뚫으려던 창병을 잡아냈다. 두 사람은 다시 눈빛을 교환하며 웃었다.
“우리 손발 좀 잘 맞는데.”
그 때, 적병들 사이로 열댓 명의 석궁수가 나타나 일제히 두 사람을 겨냥했다. 동작의 신속성과 정확성을 볼 때 잘 길러진 저격수들이었다. 아르투르가 다급히 외쳤다.
“우측!”
“시끄러! 나도 안다고!”
힐데군드는 몸을 낮추면서 왼손의 방패를 들어올려 날아드는 탄환을 모조리 막아냈다. 방패에 꽂힌 석궁 탄환들이 한 가득이었다. 반면 아르투르는 급소를 노린 탄환 몇 개만 튕겨냅고 나머진 내버려뒀다. 그의 예상대로 평범한 석궁은 에렌의 판금 갑옷을 뚫지 못하고 갑옷의 경사면에 튕겨나가거나, 그냥 박혔을 뿐이었다.
일제 사격이 끝나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수도 없이 석궁병들을 향해 동시에 뛰었다.
“그 갑옷 좀 좋아보이네. 어디 물건이냐?”
“두라노 장인들이 직접 만들어 준거야.”
석궁수들은 침착히 도르래를 올리며 재장전을 했고, 그 사이 중무장한 보병들이 뛰어들어 두 사람과 석궁수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보병들과 부딪치며 잡담을 나눴다.
“내가 두라노에 갔을 땐 네놈 갑옷 같은 건 안 팔던데. 가장 비싼 걸 보여 달라고 해도 저런 건 없었다니까?”
아르투르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당연히 돈 주고는 못 구하는 거지. 두라노 인들을 구해준 대가로 받은 거거든.”
아르투르는 앞을 가로막은 병사를 살폈다. 두터운 판금 흉갑과 투구를 쓰고 있었으니, 아무데나 베어선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겨드랑이를 찔러 죽였고, 옆에서 다가오던 얼간이는 주먹으로 안면을 쳐서 쓰러뜨렸다. 힐데군드도 중무장 보병들을 상대해본 경험이 많은 지 그냥 쓱쓱 쓰러뜨렸다.
“조-준!”
저격수들이 구령에 따라 석궁을 들어 올릴 때, 두 사람이 먼저 들이닥쳤다. 저격수들이 채 대응하기도 전, 두 사람의 칼날은 예술적으로 저격수들을 쓰러뜨렸다. 아무런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일격들이었다.
“가장 좋은 거 가져오라고 할 때는 별 말 없더니, 역시 문명인들은 좀 맞아야 정직해지나봐.”
힐데군드는 방패로 후려쳐서 상대하는 적의 턱뼈를 부쉈다.
“때리면 겉에선 예예, 하겠지만 뒤통수 칠 기회나 노리겠지. 갑옷이 탐나면 내가 하나 구해줄 수도 있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힐데군드.
“어, 진짜?”
“일단 너 하는 거 봐서 말이지!”
아르투르는 저격수들이 기껏해야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걸 보고, 오른발을 내딛으며 넓게 여명을 휘둘렀다. 그러자 공격 반경 안에 있던 적들이 통째로 잘려나갔다.
“그래? 그럼 뭐 해줄까?”
저격수들과 중장 보병들도 쓰러졌지만, 이젠 정예 경무장 보병들이었다. 그들은 두터운 갑옷을 입은 두 사람을 상대로 기동전을 걸어왔다. 날래게 치고 빠질 생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완벽하게 방어해준 덕에, 철옹성처럼 버티고 설 수 있었다. 반격의 기회를 잡자 두 사람은 예술적인 협동을 벌이며 적들을 쓰러뜨렸다.
“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해와야지!”
힐데군드는 킥킥 웃었다.
“알았어. 그건 그렇고, 같이 싸우니까 긴장감이 사라져버렸어. 혼자 할 때가 더 재밌던 것 같은데.”
힐데군드는 한숨을 쉬면서 달려드는 적병의 사타구니를 걷어찬 후, 머리를 꿰뚫어 죽였다.
“그건 좀 반칙 아니냐?”
“그게 싫으면 여자로 태어나든가.”
이 뒤로도 두 사람은 살육의 흐름을 매끄럽게 이어갔다. 평범한 병사들은 머지않아 깨달았다. 얼마가 있건, 서로의 등 뒤를 보호해주고 있는 이 전설적인 전사들 앞에선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전투는 점차 도살로 변해갔고, 가장 열성적인 병사들마저 주춤대며 뒷걸음질쳤다.
“마법, 마법이야! 악마들이 마법을 부린다!”
“마법이다!!!”
아르투르가 마법을 쓴다는 헛소문이 퍼져나가자 적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진즉에 도망쳐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여태까지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상대가 광신도의 군대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었다.
“벌써부터 이러는데 진짜로 성검을 뽑으면 뭐라고 하려나?”
“저기 봐봐. 이제 좀 덜 지루하겠네.”
힐데군드는 턱짓으로 다가오는 기사 행렬을 가리켰다. 성혈 기사단의 정예 기사들인 모양이었는데, 그들은 옛 상징인 성스러운 핏방울 문장을 버리고 타오르는 불꽃을 그들의 상징으로 삼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칼날에선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오오! 영원한 불꽃께서 우리를 굽어보신다!”
불꽃 기사들의 등장은 일방적으로 기울어가던 판세를 바꾸어놓았다. 공포에 빠져 와해되기 직전이던 적병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내며 전투 의지를 되찾았고, 무기를 들어올리며 명령만 떨어지면 반격할 태세를 취했다.
아르투르는 전장을 한번 쓱 훑어보고, 별로 유리한 전황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행은 열 배의 적을 쓰러뜨렸지만, 쓰러뜨린 만큼의 적이 더 남아있었다. 슬슬 자신도 힘이 떨어지기 시작한 무렵이니, 다른 이들은 상태가 더 나쁘면 나빴지, 좋을 리는 없었다. 그를 증명하듯 북구인들과 아군 기사들의 돌격 모두 이전처럼 활발하지 못했다.
“빠져나가서 재정비를 해야 하는데, 힘들겠지?”
힐데군드를 역시 상황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장난기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전에 전황을 냉철히 살필 줄 아는 수준급의 전사였다.
“응. 포위망은 아직 건재해. 죽게 되던, 살게 되던 여기서 끝을 봐야지.”
기사들의 선두에는 기사단장이 있었다.
불꽃 기사들의 선두에 있던 기사단장이 말에서 내려, 다른 기사들과 함께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온 후, 아르투르에게 불타는 칼날을 겨누었다.
“그만! 이 불신자들아, 너희가 행패를 부리는 것도 여기까지다! 진정한 신의 이름으로….”
“뒈져!”
힐데군드가 기습적으로 내던진 도끼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기사단장은 황급히 방패를 들어 올렸으나, 이미 도끼는 그곳을 지나친 뒤였다. 힐데군드의 도끼날은 판금 투구도 뚫고 들어가 박혀버렸다.
콰직.
도끼를 맞은 기사단장은 멍하니 서 있더니,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져버렸다. 쓰러진 시체에서 떨어져 나온 투구는 바닥을 나뒹굴었고, 기사단장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스러진 두개골과 뇌와 살이 짓뭉개진 혐오스런 살덩이였다.
모두가 상황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기사단장의 유해를 바라보며 눈을 뻐끔거렸다. 아르투르와 힐데군드의 경쾌한 웃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