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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27화 (12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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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인들은 오래 사나 보네. 우리 동네에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그렇게 약해지기 전에 이런 저런 이유로 죽거든. 뭐, 어쨌든 네 가슴 속엔 너희 신에 대한 흥미가 별로 없다는 게 보이는데.”

“힐데군드, 충고 하나 하지. 우리 땅에서 활동할 거면 종교에 대해선 말을 아껴라. 나는 신들의 일은 잘 모르기에 그냥 기분이 나쁜 정도로 넘어가지만, 보통은 아주 강렬히 반응 할 거다.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움을 걸어올 수도 있고.”

“아, 너희들을 도발하려면 그렇게 하면 되는구나.”

힐데군드는 깔깔 웃더니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도끼를 하늘 위로 던졌고,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지는 도끼 자루를 왼손으로 잡아냈다. 아주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능숙하게 같은 일을 반복했다. 심지어 자신에게 말을 걸면서 그러고 있었다.

“너도 해볼래?”

흥미는 동하긴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무기는 장난감이 아니야.”

“김빠지네. 시시하긴.”

힐데군드는 장작 한 묶음을 짊어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왔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실망한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이들은 감정을 숨길 생각이 전혀, 단 하나도 없는 이들이었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게 삶인데, 왜 네 감정이 내키는 대로 하지 않는 건데?”

“지켜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아르투르의 대답을 들은 힐데군드는 고개를 여전히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하지만 힐데군드는 기본적으로 개방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고, 그 답답한 감정은 곧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문명인들이 날 이해하는 것보단, 내가 문명인들을 이해하는 쪽이 훨씬 빠르겠는걸.’

어차피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자 나왔던 여정 아닌가. 저쪽 문화에 익숙해지고 나면, 거짓된 신에게서 녀석을 돌아서게 하도록 설득하는 일도 한층 쉬워질 것이 분명하리라. 일단 아르투르 녀석이 돌아서면, 다른 문명인들을 설득하는 일은 한층 더 수월 해질 터였다.

그녀는 소위 “문명인”들이 거짓 신의 가르침에 얽매여 너무 답답하게 사는 게 안타까웠고, 그들에게 즐거운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힐데군드에게 자신들의 신에 대한 광신적인 믿음이나, 가르침을 퍼뜨려야한다는 사명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포교를 하고자 했다면 설득이 아니라 도끼를 던지면 될 일이다.

‘여행 중에 느낄 새로운 재미를 찾아.’

***

얼마 뒤, 두 사람은 말없이 야영지로 돌아와 다음 날의 출발을 준비했다. 보초를 제외한 대부분은 누워있었지만, 서로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기에 잠들지는 않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말없이 베어온 장작들을 횃불에 던져 넣고는 그 앞에 서서 불길을 바라보았다. 보초를 서고 있던 카밀이 그에게 다가왔다.

“케이는 잠들었나?”

“네. 자꾸 책을 보려고 하기에 분부대로 몇 대 쥐어박아서 재웠습니다. 저 이교도 여자와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별 일 아니었다. 그냥 몇 대 치고 박았고, 개종 권유를 받았지.”

카밀은 혀를 찼다.

“그거 아주 몹쓸 년이군요. 돌아가면 이단심판관부터 불러야겠습니다.”

“뭐, 그녀로서는 선의에서 나온 이야기니 그렇게 화낼 이유는… 아니, 미안하네. 자네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군. 조심하겠네.”

카밀은 품에서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걸 생각하면 여태까지 보존해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뭐, 주군께서 무엇 때문에 아래 놈들 기분에 신경 쓰십니까. 레오폴트 백작처럼 하시지요. 그분은 해명하지 않고, 오직 지시를 내리고 복종을 요구하시죠. 무릇 군주들이 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나는 스스로 외로워지는 길을 걷고 싶진 않네. 자네가 참전했던 북구인과의 싸움에 대해 말해주겠나? 기사들의 영광과 군주들의 업적을 노래하는 서사시가 아니라, 진짜 자네가 보고 느낀 것 말이야. 북구인들의 침공 때 무슨 일이 있었나?”

“곁에 계신 나리 분들이 제대로 말씀해주신 적이 없나보군요.”

“그래. 다들 자세히 말하길꺼리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갔거든.”

“저 같은 천것도 별로 떠올리고 않은 기억인데, 영광을 추구하는 기사들이 자랑스럽게 떠벌릴 이야기는 못되겠지요. 한없는 증오와 분노로만 가득 찼던 길고 맹렬한 싸움이었습니다. 놈들은 우릴 잡으면 심장을 꺼내 죽였고, 우리를 산 채로 태워죽이며 박수를 쳤습니다. 그 때의 증오가 아직도 제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때 참전했던 자들이라면 빠짐없이 그럴 겁니다.”

“그들이 또 내려올까?”

“북구인들은 용의 자손을 자처하지요. 용들은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러니 대왕께 당했던 패배를 설욕하러 반드시 찾아올 겁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요.”

카밀은 북구인 캠프를 슬쩍 보더니, 듣는 이가 없는 걸 확인하곤 아르투르의 귀에 속삭였다.

“이번엔 민족 전체가 이동해 올 지도 모릅니다. 놈들은 가진 걸 빼앗으며 살아가는 악귀들이니 분명히 또 올 겁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저들을 제거하십시오. 지금도 좋고요. 저들은 너무 영리합니다. 특히 여자랑 대장이요. 저런 놈들이 우리의 땅과 문화에 대해 알고 돌아가면, 엄청난 위협이 될 겁니다. 싹을 자르시죠.”

아르투르는 침묵을 지켰다. 원래 그가 하려던 건 솔직히 그들의 종교에서 무언가를 느꼈다며 털어놓는 것이었지만, 좋은 생각이 아니란 걸 실감했다. 종교에 냉소적인 카밀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다른 이들이 보일 반응은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네 어머니가 이교도니 너도 이교도 같은 생각이나 한다며 칼을 뽑아 죽이려 드려나.’

왕족의 사생아라고 모두가 멸시 받던 건 아니었다. 일반적인 경우엔 사생아는 계승권이 없기에, 특별히 친형제들과 작위를 두고 싸워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궁정에서 경멸 받은 가장 큰 까닭은 어머니의 태생이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았을 지도. 피에 굶주린 살인자의 혈통이 내게 흐르고 있기에, 저런 사악한 종교에 이끌리는 거겠지.’

“주군? 들으셨습니까?”

카밀은 다급한 목소리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르투르도 그의 목소리만 듣고도 상황을 파악하며, 곧장 여명의 칼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야영지가 위치한 도로 북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의 크기로 미뤄볼 때 전령은 아니었다.

“모두 기상!”

어차피 아르투르 일행 가운데 기습 한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종자인 케이와 막시밀리안뿐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전투 준비를 마쳤다. 북구인들은 방패로 벽을 세웠고, 기사들은 군마에 올라타 명령을 기다렸다.

지평선 너머에선 동이 트며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냈다. 그러자 적들의 숫자가 더 명백히 드러났는데, 못해도 백 명이 넘는 중무장 기병대였다.

“우릴 진즉에 파악한거군. 어둠이 걷히길 기다리고 있던거야.”

눈살을 찌푸리는 레오폴트.

“이거 만만치 않겠는데.”

기사들도 비슷한 태도였다. 하지만 고작 여덟 명인 북구 인들은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웃어대고 있었다. 목숨을 내놓고 사는 놈들이었다. 도로를 따라 달려오던 기병대는 선두에 선 지휘관의 손짓에 따라 움직임을 멈추었고, 소수의 인원만 대동한 채 북구인 진형으로 접근해왔다.

그들의 깃발은 성혈 기사단의 것이었다. 단지 이제는 발타리아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타오르는 늑대 형상의 불꽃이 그려져 있다는 사소한 차이점이 있었다. 그는 아르투르 진영을 무시한 채, 북구인들의 진영으로 다가섰다.

“우리는 거짓 신의 신도들과 싸우러 왔다. 너희와는 관련이 없으니 지금 당장 떠나라. 아니면 우리를 도와 싸운다면 두둑한 보수를 지불하겠다.”

“너네 깃발을 단 호송행렬을 도륙한 건 우린데, 관련이 없다고? 이놈들, 동료의 복수 같은 건 안하나봐. 의리가 없네.”

지휘관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투구 속에서 울려 퍼졌다.

“무언가 오해가 있었나보지. 위대한 불꽃과 용들은 한 편이라는 걸 모르느냐? 십자가야말로 우리 공동의 적임을 잊지 마라.”

베오릭은 난처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전쟁 중이라면 너희 말이 맞다만, 우린 여행이나 하러 온 거거든. 게다가 지금은 저 친구들의 일이 끝날 때까지 같이 싸워주기로 맹세했고.”

“그게 무슨 일인데 그러지?”

“저 친구가 너희 신과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 그래서 만남을 좀 주선해주러 가는 길이야. 지금 저 성채 지하에 숨어 있잖나.”

“어찌 그런 불경한 말을! 영원한 불꽃께서 너희를 태우리 - ”

휙 -

지휘관이 흥분해서 칼을 뽑아들기 전, 투척 도끼가 날아들어 투구와 함께 놈의 골통을 부숴버렸다. 힐데군드는 두 번째 도끼를 뽑아들고 있었다.

“말이 왜 이렇게 많아. 덤벼. 불만 있으면 그냥 싸우자고.”

북구인들이 적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아르투르 일행은 무장을 완전히 마치고 군마 위에 오른 뒤였다.

“돌격 - !”

아르투르가 선봉에 서서 마상창을 손에 쥐고 달려 나갔다.

“영광스런 승리를 위하여!”

그의 뒤를 따라 스무 명의 기사들이 맹렬한 돌격을 가했고, 지휘관을 잃은 적들의 기병대는 이도저도 못한 채 주춤거리다가 무방비 상태로 아르투르 일행에게 들이받힌 채 각개 격파되었다. 아르투르는 자신을 가로 막는 적들을 모조리 도륙 냈다. 판금 갑옷을 입었건, 방패를 들었건 그건 중요치 않았다. 방패는 부수면 그만이고, 갑옷은 꿰뚫으면 그만이다!

여느 적들이라면 여기서 전투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적들은 달랐다.

“영원한 불꽃께서 우리를 지켜보시니라!”

광신으로 가득 찬 눈을 부라리는 수도 기사들이 아르투르를 잇달아 공격해왔다. 쓸모가 있건, 없건 그건 중요치 않았다. 기병대가 버티고 있을 때, 적의 보병대가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스터, 적들이 우리를 포위했습니다!”

“당황하지마라. 처음부터 포위해두고 시작한 싸움이다. 하지만 놈들이 제 아무리 악을 써봐야 수준이 떨어지면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레오폴트, 기사대의 지휘를 부탁한다.”

“마치 네 기사들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레오폴트는 달려드는 적병의 목구멍 틈새로 장검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지금 그 딴 거 따질 테냐!”

“알아서 해. 인마. 실컷 날뛰고 와라. 우리가 뒤를 받쳐 줄 테니.”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에서 뛰어내린 후, 적병이 가장 많은 곳으로 달려갔고, 단숨에 도약해서 그들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당황한 듯 주춤거리다,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아르투르의 검격에 쓰러져갔다. 하지만 어느 집단에나 가장 용기 있고 실력 좋은 이들이 있기 마련이었고, 적병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뭉쳤다.

“네놈이냐!”

그러자 아르투르는 그때마다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기어코 구심점이 되는 인물을 죽였다. 가장 노련하고, 대담한 자일수록 빨리 죽었다. 그의 전투 감각은 언제나 최상의 판단을 내렸고, 만전의 준비를 갖춘 사람처럼 움직였다. 한 치의 불필요한 동작도 없이 연달아 이어지는 그의 행동들은 대단히 잘 벼려진 살인 기계에 가까웠다.

적들이 정말 많았다. 적게 보아도 아르투르 일행의 스무 배정도는 될 터였고, 모두 영원한 불꽃을 위해 순교할 준비가 되어있는 전의가 높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열의만 가득 찼을 뿐인 평범한 병사들은 가장 노련한 전사들 앞에 일방적인 학살을 면치 못했다. 언덕에서 싸움터를 지켜보는 기사는 혀를 찼다.

“단, 단장님! 저희 군대가 밀리고 있습니다!”

“당황하지 마라. 저들은 믿음이 부족하기에 패배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직접 놈들을 벌하마.”

기사단장은 허리춤의 예리한 장검을 뽑아들었다.

“영원한 불꽃이시여! 제게 힘을 주소서!”

단장의 검에서 번득이는 불꽃이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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