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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심어린 조언은 고맙다. 카밀. 하지만 일단 나는 저들을 믿어볼 생각이다. 그들이 맹세한 걸 함부로 어기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설명하긴 어렵다만, 지금은 날 믿고 따라라.”
카밀은 시선을 돌려 부르르 눈을 떨다가, 금방 고개를 숙여보였다.
“…저의 목숨은 당신 것입니다. 주군께서 저를 이끄시는 곳이 어디건, 따르겠습니다.”
한편, 베오릭의 말을 들은 북구인들도 반응이 다양했다. 힐데군드는 재미겠다며 추종자들과 기꺼이 서약에 가담하겠다고 했지만, 토르스탄 무리는 우리가 왜 저놈들을 도와야 되냐며 베오릭과 싸움을 벌였다. 진짜 싸움 말이다.
결국 토르스탄의 귀 한쪽이 날아가자 그는 다시 베오릭에게 복종의 의사를 표했고, 서약에 응했다. 아르투르 일행은 북구인들의 관습에 당황한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다. 힐데군드는 그들의 반응이 신기한 지 케이의 앞에 서 내려다보았다.
“꼬마야, 넌 뭐가 그렇게 신기하냐?”
“북구인들은 모, 모든 경우에 무기를 던져서 서열을 정하나요?”
“응. 너희가 더 신기한 거지. 왜 약한 녀석을 신분이 높다고 따르는거지?”
상황이 정리되자 북구인들은 잡동사니들을 모아 간이 제단을 만들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너희가 보기엔 조금 기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 끼어들지 마라.”
베오릭은 그들의 약속을 받은 후, 시체 더미로 걸어가서 시체를 발로 대충 치웠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시체 하나를 들어올렸다.
“사, 살려줘!”
알고 보니 시체가 아니라 죽은 척하고 있던 적병이었다. 북구인들도 베오릭이 그 자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 했지만, 묻지 않고 산 제물을 제단에 묶으며 의식을 준비했다. 준비가 끝나자 베오릭은 정체를 날카로운 뼈 단검을 힐데군드에게 건넸다.
“이번 의식의 집행은 네게 맡기겠다. 나는 신들과 사람을 잇는 증인이 되겠다.”
“우리 중 사제의 비밀을 배운 건 나뿐일 텐데? 네가 어떻게 증인이 돼?”
“그냥 해라.”
“뭐, 알았어. 사실 자격 같은 게 뭐가 중요해.”
베오릭이 장송가를 부르듯 옛 언어로 된 시구를 잇달아 외치는 가운데, 힐데군드는 양손으로 뼈 단검을 들어올려, 산 제물을 향해 내리찍었다. 비명이 들리고 피가 튀었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만 골라 찌른 터라 산 제물은 길고 긴 고통을 겪어야했다.
그들은 아직도 살아있는 희생양의 피를 잔에 담더니, 그곳에 자신들의 팔에 상처를 내서 피를 섞은 후, 베오릭의 외침에 따라 맹세를 외웠다. 시라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통역을 시작했다.
“존엄한 용들의 이름에 대고 맹세하니, 이것을 깨는 자는 세상의 종말까지 영원한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는군요.”
방금 전까지 칼날을 겨누던 레오폴트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의식을 지켜봤다. 카밀은 분노에 떨었고, 기사들도 보는 것을 괴로워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그들과 전혀 다른 것을 느꼈다. 마음은 대단히 들떠있었다.
사지가 묶인 채 몸을 버둥거리는 산 제물의 모습은 그에게 사냥의 쾌감을 주었고 자신을 흥분시켜 심장 박동을 가득 뛰게 만들었다. 비명 속에선 전장의 흥분이 되새겨졌다. 자신이 강철을 움직이면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으깨졌다. 전장에서 자신은 언제나 승자였으며, 승자는 패자의 운명을 정하게 되는 신이 되었다. 아르투르는 전투의 흥분과 승리의 쾌감을 느끼며, 반쯤 넋을 놓은 채 의식의 주관자인 사제를 바라보았다.
아, 이런 경건한 의식을 주관하는 자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사제의 백금발 머리카락이 찰랑일 때 마다 마음이 동했다. 제물의 피로 범벅이 된 그녀의 몸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원초적인 욕망을 가득 자극했다. 희생자의 심장을 뽑아내는 거친 몸짓은 생명력이 가득 넘치는 힘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수많은 느낌과 감정이 얽힌 의식 한복판 속에서, 아르투르는 모든 번민에서 해방되었고, 자신의 모든 것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을 느꼈다. 황홀경이었다. 여사제가 몸을 돌려 아르투르를 바라보았다. 번득이는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손을 내뻗은 채 한 발을 내디뎠다. 억눌려있던 욕망에 대한 끝없는 갈증이 그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마스터?”
“아.”
아르투르는 멈춰 섰고, 자신의 마음을 차분히 돌아보았다. 힐데군드는 의식을 멈춘 채 조용히 기다렸다.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숨을 몰아쉰 채 호흡을 가다듬었고, 힐데군드는 실망한 표정으로 산 제물의 숨통을 끊어 의례를 마쳤다.
“케이, 저걸 보며 무슨 생각이 들더냐?”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서 제물의 고통을 즐기고, 의식을 주관해야 할 사제가 피를 뒤집어쓴 채 심장을 뽑아내는 종교 의식에서 두려움 외에 무엇을 느낄 수 있겠어요?”
케이는 두려움에 가득 차 떨면서 제단을 정리하는 북구인들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 아르투르는 침묵을 지켰다.
“….”
“… 다른 것도 느끼신 모양이군요.”
“그래. 숨겨져 있던 내면의 무언가가 미쳐 날뛰는 느낌이었어.”
“위험한 말씀이세요.”
“그저 새로운 시련이 하나 더해졌을 뿐이다. 나는 기사다. 케이.”
그렇게 맹약이 맺어지자 북구인들은 일행에 합류했다. 일행의 대부분은 이전보다 그들을 더욱 더 경계했음에도 북구인들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일행은 성혈 기사단의 성채가 있는 서쪽으로 향하며 양 옆으로 숲이 난 도로로 접어들었다. 밤이 찾아오자 그들은 야영할 준비를 했다.
***
아르투르는 복잡한 심경을 덜고자 직접 장작을 패러 나왔다. 대신 케이에겐 책을 보지 말고 훈련을 하거나 푹 쉬라고 엄명을 내려두었다.
‘요새 그 놈이 시간만 나면 책만 읽는단 말이야. 기사가 그렇게 글자에만 의존해서 쓰겠어?’
아르투르가 양손으로 벌목 도끼를 휙휙 휘두르자 커다란 나무가 덜컹이며 넘어갔다. 그 때, 뒤편에서 무언가 날아오는 걸 느낀 아르투르는 잽싸게 몸을 숙여 피했다. 기다란 창이 쓰러진 나무에 굉음을 내며 박혔다.
그는 곧장 창이 날아온 장소를 향해 도끼를 던졌고, 상대는 아주 날래게 움직여 도끼를 피하며 돌격해왔다. 아르투르의 몸은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여명을 뽑아들었고, 전방에서 오는 모든 공격에 대한 방어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어둠이 워낙 짙은데다가, 적이 너무 날쌔서 정확히 방향을 알기는 힘들었다.
“거기냐!”
공격을 감지한 아르투르가 잽싸게 오른편으로 한 발 내딛은 뒤, 양손으로 여명을 내리 베었다. 그는 자신의 힘에 자신감이 있었다. 못 막으면 반으로 갈라 질 거고, 막아도 힘이 부칠 터이다. 하지만 상대 역시 검으로 아르투르의 일격을 받아내고는 달려오던 속력 그대로 아르투르를 들이받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닥에서 나뒹굴며 뒤엉켰고, 바로 온 몸을 이용해 타격했다. 주먹을 날리고, 막고, 무릎으로 올려 차고, 상대의 목줄을 죄려는 몸부림이 계속 되었다. 상대도 힘이 어지간히 뛰어난 장사였고, 제대로 타격을 줄 줄 아는 굉장히 뛰어난 전사였지만 싸움이 길어지자 힘이 조금씩 빠져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하면 끝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배를 걷어차더니 잽싸게 레슬링 상황에서 빠져나왔고, 허리춤에 가지고 있던 도끼를 뽑아들었다. 아르투르 역시 땅바닥에 뒹굴던 여명을 회수해 쥔 채, 적을 노려봤다. 그러다가 깊은 한숨을 쉬며 칼을 내렸다.
“인사 한번 과격하군. 안 그래도 성혈 기사단 본진이 이틀거리에 있는데, 쓸데없이 힘만 뺐잖아.”
상대인 힐데군드는 숨을 고르면서 낄낄 댔다.
“그래서 그냥 잡혀 준건데, 그걸 놓치더라고. 일부러 져 줄게 아니고서야 너 같은 덩치한테 육탄전을 걸겠니?”
아르투르는 한숨을 쉬며 나무를 챙겼다.
“뭔 쓸데없는 소리야. 그냥 가라. 아니다. 온 김에 장작 옮기는 거나 도와. 조금 자고 동 트면 바로 출발해야 되니까.”
마찬가지로 한숨을 쉬는 힐데군드.
“아까 낮에 날 보던 시선을 봤어. 네가 흥미 있어 하길래 특별히 기다려주기 했는데, 끝까지 안 오더라?”
아르투르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난 산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 분, 구세주 발타리아를 섬긴다. 너희 용신들을 앞에 두고 맹세하는 의식에 낄 이유가 없지.”
그 말에 팔짱을 끼며 이죽거리는 힐데군드였다.
“흐음. 너희 문명인들은 다 너처럼 솔직하지 못 한거냐? 아니면 너만 그런거냐?”
“둘 다일지도.”
키득키득 웃는 힐데군드.
“아, 다른 애들 시선이 무서웠던 거구나. 여긴 나만 있으니까 말해봐. 솔직히 고리타분한 너희 신보다 우리 쪽 신들이 좋지?”
아르투르는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곳에서 포교할 생각은 하지마라. 우리 땅에선 이교도가 포교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처해질 수 있어. 특히 북쪽의 신들처럼 야만적이고 위험하다면 더더욱. 이 땅에서 너희의 신들을 반기는 이들은 아무도 없어. 인신공양을 받으며, 전쟁을 옹호하는 너희의 신들은 우리한테는 악마나 다름없다고. 지금 나도 많이 참고 있는 거다.”
힐데군드는 알겠다는 듯이 큭큭 웃었다.
“왜 우리의 신들이 너희 문명인들을 두고 거짓의 땅이라고 말하는지 드디어 알겠어.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스스로를 속여 가며 사는 곳이구나.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숨긴 채 살아가고 있어. 그런 겁쟁이 같은 짓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약자들이야 그렇다 치자고.”
약자를 말하는 힐데군드의 목소리엔 노골적인 멸시와 혐오가 드러났다.
“배신자 신, 발타리아는 그런 겁쟁이들을 위한 신이지. 강자가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가진 이가 가지지 않은 이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신이니까. 하지만, 너는 약자가 아니야. 아르투르.”
힐데군드는 처음에 장난기만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굉장히 진지했다.
“스스로도 알 거야. 네 신의 가르침은 너에게 아무런 흥미도, 쓸모도 없어. 반면 우리의 신들이 말하는 게 옳다는 건 잘 알지. 신들은 이 세상을 약한 자는 먹히고, 강한 자는 살아남게 만들었어. 그러니 거기 맞춰서 사는 게 맞아.”
아르투르는 잠자코 힐데군드의 말을 듣다가 차분히 대답했다.
“그런 식이라면 누구든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다. 지금은 우리가 젊고 강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가? 우린 부상을 입고 쓰러져서 다시는 전사로 활동하지 못할 수도 있고, 늙어서 더 강한 전사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할 수도 있어. 그 때 나는 최고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의 자리를 인정받을 테지만, 너는 그렇지 못할걸.”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뻑이는 힐데군드.
“제 몫을 못하게 되었으면 알아서 나가 죽어야지. 그건 가족을 위해서도 당연한 일이야. 그게 옳다고!”
아르투르는 장작을 지게에 실으며 말했다.
“그런 원시적인 논리는 눈과 얼음 밖에 없는 너희 깡촌에서나 옳은 일이지. 문명지의 역사에선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내 아버지이신 페르넬 대왕께선 한때 대륙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 무적의 전사였지만, 하지만 최후의 10년엔 거동도 힘들었어. 전장 근처에는 나가지도 못 나가셨고. 하지만 천수를 누린 건 물론이고, 그 10년 동안 나와 내 형제들은 그분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교훈들을 배울 수 있었지. 너희들은 그렇게 못했을 걸? 말해봐라. 네 경우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르투르의 질문에 힐데군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인 모양이었다.
“부모 둘 다 내가 어른이 되기 전에 죽어서 잘 모르겠는데? 내 고향에선 다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