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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25화 (12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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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르투르는 옛 고용주를 죽였다는 걸 무슨 동네 곶감 따먹었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장난인지 진담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묻는 너희 고용주는….”

베오릭은 용 조각이 장식되어있는 칼자루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며 말했다.

“내 친구였던 제라니아의 참주 데로드를 말하는 게 맞다. 그놈이 피오레 가문에서 돈을 받고 우리를 죽이려 들어서 선수를 쳤지. 하. 그렇게 믿어줬는데, 신의라는 게 참 허망하다니까.”

아르투르는 데로드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그의 입장에선 용병대장을 고용했을 뿐인데,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군대를 물렸으니 배신감을 느꼈던 것은 당연하리라. 아무래도 이 북구인 들에게 고용주란 돈 많은 호구와 같은 말인 모양이었다.

“그놈은 그렇게 죽였다 치고, 군대 한복판에 있었을 텐데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왔지?”

베오릭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식으로 바라봤다.

“당연히 야만인 부대를 선동했지. 지금쯤 제라니아는 그놈들이 벌이는 짓으로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있을 걸. 그렇게 헤어진 뒤에 널 찾으려고 오던 참이었는데, 바로 너를 만나게 되다니 신들의 도우심이 분명하다. 자, 길게 끌 필요 있겠어? 바로 가자고.”

힐데군드가 성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베오릭, 순서 지켜. 나 아직 저놈이랑 결판을 못 봤다고.”

베오릭은 따분하다는 듯이 힐데군드를 바라봤다.

“전에 싸운 거보니 네가 결국 지겠던데.”

“뭐? 새끼야?”

그녀가 허리춤에서 도끼를 뽑아 내던지기 직전, 토르스탄이 둘 사이를 가로 막았다. 그는 2m가 넘는 키를 가진 거한인지라 둘 사이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잠깐만. 지금 우리 용의 자손들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아르투르 일행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아르투르나 레오폴트 같은 젊은 기사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두 사람의 부관인 카밀과 고드프루아, 그리고 경륜 있는 기사들은 증오가 담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데네토르 왕국 사람들이었고, 북구인들에게 가까운 이를 잃은 경험이 있었다. 문명에 의존하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남부인”이라 부르며 나약하다 조롱하는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아주 위험한 상황이란 걸 직감했다.

“뭐야, 우리 둘 간의 결투가 아닌 거냐? 끝을 보자고?”

상황을 파악한 베오릭과 힐데군드도 서로에게 시선을 거두고 적의를 드러나는 자들을 노려봤다. 북구인들은 삽시간에 대오를 형성하며 싸울 태세를 취했다. 중년의 기사인 고드프루아가 칼자루로 손을 점점 옮겨갔다.

상황을 본 아르투르는 곧장 레오폴트에게 상황을 진정시키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의 근위 기사들이니 자신의 말은 듣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이미 분노로 눈이 돌아간 뒤였다.

“고드프루아, 동작 그만. 나머지도 멈춰라.”

젊은 왕족의 성난 목소리가 좌중을 강타하자 그들은 본능적으로 뿜어내던 적의를 멈추며 칼자루에서 손을 때었다. 평소에 기사들을 완벽히 장악해두지 않았더라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너흰 내게 충성하기로 맹세했다. 그런데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싸움을 벌이려고 들어? 내가 아버지가 아니니 우습게 보이는 거냐?”

기사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분을 삭이며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들은 차마 주군의 말에 뭐라고 토를 달 생각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힐데군드가 피식- 하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레오폴트의 분노가 그쪽을 향했다.

“이 개씨발, 대가리 터진 야만인 년이 니들은 눈 안 깔아? 다 뒈지고 싶냐?”

그의 시선에 자극 받은 토르스탄이 험악한 목소리로 답했다.

“문명인 놈들은 상황 파악 못하는 도련님들을 왜 이렇게 떠받들어주는 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진짜 강자 앞에서 지랄을 떨다가 뒈져버리지. 네 성대를 잘라다 개먹이로 주겠다!”

챙 - !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강철이 잇달아 부딪치며 굉음이 울렸다. 아르투르와 베오릭은 각각 레오폴트와 토르스탄을 막아서고 있었다. 같은 진영끼리 무기를 부딪친 채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그만. 레오폴트. 지금 이들과 싸울 시간이 없단 걸 알잖나.”

“진정하라고. 형제. 내가 여기선 성질 죽이라고 몇 번 말하나.”

레오폴트와 토르스탄은 물러서지 않은 채, 당장 물러나라는 듯이 자신들의 상대와 눈싸움을 벌였다. 그들은 결국 흥분을 가라앉히고 뒤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서로를 향해 맹렬한 증오가 담긴 시선을 보내며 서로에 대한 적의를 불태웠다. 두 사람의 뜻은 명백했다. 언젠가 너를 죽이고 말거라고.

잠시 뒤, 양측 진영은 무기를 집어넣은 채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아르투르와 베오릭을 제외한 이들은 서로를 죽이고 싶어 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지도자들의 견해에 설득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신경전은 아주 날카로웠다.

“검의 소유권만 두고 일 대 일 결투를 치르려고 했더니, 그랬다간 양측 일행들끼리 서로를 죽일 판국인데.”

베오릭의 일행인 북구인 전사들은 이런 상황을 아주 흥미로워했다. 그들은 강한 전사들과 싸우고 싶었고,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또, 토르스탄이나 그의 두 친구는 모욕에 대해 앙갚음하고 싶어 했다.

“동감이다. 일단 결투는 미루고 각자 갈 길을 가지. 난 지금 사람을 구하는 아주 급한 용무가 있다고. 그것 때문에 말인데 묻고 싶은 게 있다. 여기 쓰러져 있는 병사들, 정황상 너희와 싸운 것 같은데 맞나?”

아르투르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가리켰다. 베오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가 죽였는데, 왜, 너희 친구냐? 결국 여기서 한 쪽이 전멸할 때까지 싸워야 되는 건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건 곤란한데…”

“반대지. 우리가 처치해야 할 놈들이었어. 너희는 얘들과 왜 싸운 거지?

이번 질문에 답한 건 힐데군드였다. 싸움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방금 전까진 희열 어린 표정을 짓던 그녀였지만, 지금 이 상황은 지루한 지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길을 안 비켜서.”

“?”

“아, 그놈들이 우리랑 마주치고도 비키질 않더라고, 제 놈들이 숫자가 더 많으니 우리 보고 비켜가라며 거들먹거려서 도끼를 던져서 화답해줬지. 그렇게 싸움이 있었고, 우리가 이긴 거지.”

어깨를 으쓱이는 그녀를 보며 아르투르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왜 그래. 좋은 칼 놔두고 말로 할 필요 없잖아. 상식 아니냐?”

아르투르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분명히 이 의미 없는 싸움도 꺼리지 않는 살인자들에게 분노가 치솟거나, 야만스러운 관행에 한탄하는 감정이 들어야했다. 그런데, 자신은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안 돼.’

그는 잡스러운 생각과 함께 희미했던 미소를 지우며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무튼, 우리는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 시체들 가운데 그 자가 있는지만 확인하고 길을 떠나마. 그 뒤에는 각자 갈 길을 가자. 이 정도면 어떠냐?”

베오릭은 오른손으로 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짧은 시간이지만 꿈틀대는 눈썹을 보며 그가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르투르는 이상할 정도로 대답이 늦는다고 생각했다. 그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인데도.

마침내, 베오릭이 입을 열었다.

“네가 찾는 인물은 이미 죽은 지 오래다. 펜하르키렐이 그의 영혼을 포식해버렸군.”

“뭔 소리야? 우리가 누굴 찾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이번에 의아한 눈빛을 보낸 건 아르투르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동료들조차 의혹이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들의 대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너도 수많은 기적을 행사하지 않았느냐?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 아무튼 나, 베오릭의 이름을 걸고 보장하마. 이미 너무 늦었다. 펜하르키렐은 발타리아를 아주 증오하니 그 추종자들에게 어떤 유예도 베풀지 않는 것이다.”

아르투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베오릭을 노려보았다. 자신은 이교도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사람이었지만, 이교도, 그것도 마법 같은 힘이 있다는 북구인의 말을 믿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체들을 둘러보아도 자신이 들은 교황 특사와 부합하는 자도 없었다.

“그렇다면 우린 떠나마. 너희도 마저 갈 길을 가도록 해라. 일 대 일 결투는 나중으로 미루고.”

곧장 아르투르가 기사단 성채를 향해 말을 몰려고 할 때, 베오릭이 재차 말했다.

“우리가 함께 가주지. 우리의 도움 없이는 그를 상대하기 힘들 것이다.”

아르투르는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교도들과 악령 하나를 없애는데 딱히 너희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다만…. 너희가 등 뒤에서 칼을 찌를지 모르는 판국에야 뭘 믿고?”

“그럼 우리가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공격하지 않겠다는 피의 서약을 하지. 우리에겐 접대의 관습만큼이나 신성한 것이다. 의심할까봐 내 동기를 말해주자면, 나는 네가 패배하고 검을 빼앗기는 경우엔 일이 골치 아파지기에 그런 것이다. 서약을 한다면 네 뒤를 따르는데 동의하나?”

“내 생각엔 나쁘진 않겠는데.”

아르투르는 슬쩍 고개를 돌아보며 일행들의 동의를 구했다. 우선 카밀이 다급히, 또 간절히 호소했다.

“주군! 저 사악한 악마들을 결코, 절대 믿지 마십시오! 저 자들은 짐승 같은 자들이라 힘이 있으면 뭐든지 해도 된다고 믿습니다. 우리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악당조차 북방의 땅에선 평범한 자입니다. 그들은 죄라는 개념이 없으며, 자신들만 즐거울 수 있다면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꺼리지 않습니다.”

힐데군드는 카밀의 말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우린 피로 맺어진 맹세는 반드시 지켜.”

“거짓말하지마라! 너희 악마들은 어떤 전쟁 관습도 지키지 않잖나! 민간인들이 수없이 학살당하는걸 보았다. 아르투르 공! 제 상관은 휴전 협정에 서명하자마자 뒤통수에 도끼를 맞아 죽었습니다. 제 주군이 그런 꼴을 당하는걸 보고 싶진 않습니다. 아니, 저놈들이 왜 이 땅에 있는지는 모르나 평화를 원하신다면 당장 저들을 모두 죽이셔야 합니다.”

카밀의 열변을 들으며 레오폴트의 근위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참전했던 자신들이 참전했거나 가족으로부터 전쟁에 대한 기억을 물려받은 자들이었다. 북구 전사들은 억울하다는 듯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베오릭이 그들을 제지했다. 그 사이 일행의 2인자, 혹은 공동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레오폴트가 말했다.

“충성스런 가신들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여긴 우리 땅이다. 게다가 숫자도 훨씬 많다. 무엇보다, 저들도 성혈 기사단을 죽인 참이다. 이대로라면 기사단에게 추적당해서 죽겠지. 우리와 협력할 이유가 충분한 자들이다.”

시라노도 첨언했다.

“조심스런 말입니다만…. 북구인들은 거래 상대로서는 괜찮은 자들입니다. 거짓말을 큰 수치로 여겨 한번 계약을 맺으면 어지간하면 지키죠. 특히 피로 이뤄진 맹세는 죽음으로서도 지키는 것 역시 그들의 문화입니다.”

카밀은 흥분을 드러내며 말했다.

“하! 놈들과 전쟁 한번 치러본 적 없는 애송이가 책만 읽고 혀만 나불대는구나. 주군! 저런 허튼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젖비린내 나는 소립니다!”

아르투르에겐 늘 얌전하고, 일행들과 사이좋게 지내던 시라노였지만 이번에는 그도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이야말로 세상을 허튼 소리 그만하시오. 휴전 협상의 파기엔 북구인 들만 책임이 있던 게 아니란 말입니다. 페르디난트 대공께서 짜신 함정이었고, 그게 들켜서 싸움이 벌어졌던 거요.”

아르투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거기까지. 난 결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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