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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공격이 시작되자 기사들은 순식간에 모여들어 원형의 진으로 늘어서서 서로의 등을 맞대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무기를 꺼내들고 침착히 자리를 지켰다. 레오폴트의 근위 기사들은 모두 노련한 이들로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적절한 거리를 잘 알았으며, 전투 중에 빠져드는 흥분도 잘 제어할 줄 알았다.
아르투르 역시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단순한 눈빛 교환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주, 죽어!”
반면 주민들은 엉망진창으로, 온전히 공포에 떠밀린 채 와르르 몰려들었다. 때문에 주민들의 수가 기사들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기사들은 많아봐야 두, 세 명만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아르투르 역시 밀려드는 농민들에게 여명을 휘둘렀다.
“아까 말하던 놈이 누군지 본 사람 있나? 카밀, 자네 눈과 귀가 꽤 좋잖나.”
아르투르가 대강대강 휘두른 검에 주민들의 목이 뎅겅뎅겅 떨어졌다. 반면 레오폴트는 피식 웃으면서 고급스러운 검술 기교들을 사용하며 적들을 베었다. 그의 기사들은 잡담을 나누었다. 카밀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일격에 급소만 찔러 적들을 죽여 대며 답했다.
“저는 그런 짐승 같은 소리를 낸 인간은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바로 앞에 있는 듯이 말했지요. 도저히 짐작이 안 가더군요.”
시라노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빠진 표정을 지은 채로 적을 죽였다. 두 종자, 케이와 막시밀리안은 기사들의 뒤에 서서 이따금 파고드는 적들을 찔러 죽였다. 행동 자체는 그들에게 아주 쉬웠지만, 첫 살인이라는 중압감이 그들을 짓누른 나머지 몸이 굼떴다.
- 나를 찾고 있느냐. 거짓을 따르는 사도야. -
아르투르는 주민 한 명의 목을 치면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르투르와 기사들의 시선은 한 마을 저택의 지붕에서 멈추었다. 회색 늑대 한 마리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늑대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서, 너배는 크기가 커보였고 핏빛 눈동자가 번득이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 너랑 같이 다니니 별 꼴을 다 보네. 갑옷을 가르며 상처를 치유해주는 성검에 이어서, 이번엔 마을 주민들을 광신도로 만드는 말하는 늑대냐?”
레오폴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수백 년 전, 역사책에서나 보던 일이었다. 아르투르도 머쓱한지 오른손에 든 여명으로 적을 찌르면서 왼손으로 목 뒤를 긁적였다.
“둘 다 입에서 불길을 뿜는 불사의 북구인 전사와 싸우는 일보다는 흔하지 않을까?”
“그런 재밌는 일을 겪어놓고 나한텐 아무 말을 안했단 말이지.”
아르투르도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특이한 검을 물려주신 덕분인 것 같군. 왕관보다 가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보다 훨씬 독특한 건 맞는 것 같아.”
카밀은 성난 목소리로 외치며 장궁에 새로운 화살을 메겼다.
“나리들! 그만 떠들고 싸움에 집중들 하십시오! 언제까지 농민들이나 죽일 셈입니까!”
카밀의 예리한 시각이 즉각 늑대의 눈동자를 노리고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쏜살 같이 날아갔지만 늑대는 슬쩍 고개를 기울여 목에 맞았고, 화살은 가죽을 뚫지 못한 채 힘없이 떨어졌다. 너무 단단해서 화살은 쓸모가 없어보였다.
카밀은 순간적인 분노에 이끌려 늑대를 향해 돌진할 뻔 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정말 열받지만 이 상황부터 타개하는 게 우선이었다. 아르투르도 그리 생각하는 지 차분히 달려드는 적들을 하나씩 썰어버렸다.
이 뒤에 벌어졌던 일은 전투가 아닌, 학살이었다. 기사들은 사형집행인이 죄수를 처형하는 것 마냥 기계적으로 적들을 베어 넘겼고, 어느 사이 잘려나간 사체들이 바닥을 뒹굴고 피가 호수를 이뤘다. 상황을 지켜만 보던 늑대는 그제야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 거짓의 사도야. 내 쓸모없는 종들을 처리해줘서 고맙다. 내가 직접 하기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놈들이었거든. -
아르투르는 조용한 분노를 담아 늑대를 노려보았다.
“일부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군. 이 악마야.”
하지만 늑대 역시 어금니를 드러내며 역정을 드러냈다.
- 악마라고? 동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너희 인간들에게 불을 전해주었던 내가 악마란 말이더냐? 나의 은혜를 잊고 배신자 발타리아를 모시는 너희야말로 악마가 아니더냐? -
하지만 아르투르는 코웃음 쳤을 뿐이다.
“내가 아는 건 하나뿐이다. 네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거긴 아무 이유도 없었다는 거말이야. 그게 악마지, 달리 뭐가 악마겠느냐.”
아르투르는 케이에게 창을 받은 후, 즉각 늑대를 향해 내던졌다. 하지만 창이 떨어진 자리에는 연기만 남아있었고, 허공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럴 줄 알았지. 이 마을 주민들을 아끼나보던데, 그렇다면 근방에 있는 고성에 남은 마을 주민들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겠군. 기사도를 행한다고 했으니 반드시 구하러 올 거야. 그렇지? -
목소리는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남긴 채 사라졌다. 아르투르 일행은 이 괴이한 상황에 굉장히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상황을 정리했다. 늑대가 떠나고 나서자, 살아남은 마을 주민들은 바닥에 엎드려 자비를 청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죽은 뒤였지만 모두가 죽은 것보단 나았다.
***
아르투르 일행은 심문을 통해 생존자들의 우두머리로부터 루체리오 마을의 상황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사내였는데, 루체리오 마을의 지주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뭐가 그리 두려운지 쉬지 않고 두리번거렸다. 사내는 자신이 정보를 말해주는 게 늑대신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극히 두려워해서 말하는 것을 꺼렸지만, 목에 강철의 감촉이 느껴지자 결국 입을 열었다.
“뭐라고? 이미 교황 성하의 특사는 어제 마을에 도착했었다고?! 다들 어디로 갔단 말이냐?! 당장 말해라!”
“그것이…”
눈을 가늘게 뜨며 사내를 노려보는 아르투르.
“저흴 보호해주는 성혈 기사단 나으리들이 와서 모두 죽인 후, 교황 놈… 아니 성하의 특사만 붙잡아갔습니다. 그 뒤엔 저흰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지주는 순진무구해보이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르투르의 눈빛은 여명의 칼날만큼 예리했다.
“너랑 네 동료들도 거기 필시 가담했겠지. 돈 되는 물건들도 털고, 너희가 섬기는 늑대신의 은총도 얻을 겸 말이야. 왜 이런 이야기는 안하느냐?”
“에… 그것이…”
생존자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안절부절 했지만, 아르투르는 위협적으로 말했다.
“대답해라.”
“무, 묻지 않으셔서 그랬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아르투르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궁리했다. 안건은 꽤 복잡해보였다. 저 늑대 악마는 이미 오랫동안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을 터였다. 수십 년 전에 있었다는 기적의 정체가 저 악마였으리라.
‘이 녀석들 입장에선 그냥 수십 년간 마을을 보호해준 기사들과, 자신들이 믿는 신이 지시한 바를 따르긴 한 건데, 넘어가주기엔 죄목이 너무 크다.’
기사들을 공격한 거야 죽기는커녕 다친 이 한명 없으니 그렇다 쳐도, 교황 특사를 비롯해 여러 여행객을 죽인 것은 용납하기 어려워보였다.
‘음. 어쩐담?’
솔직히 말해, 이렇게 복잡한 안건까지 머리를 쓰는 건 자신이 잘 아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르투르는 이 마을 주민들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는 나와 결투 재판을 통해 너희의 유죄를 가리는 것이다. 너희가 무지렁이 평민인 점을 감안해서 나는 왼 팔만 쓰고, 갑옷도 입지 않겠다. 패배할 경우엔 너희 마을의 지도자격 인물들은 전부 처형이다. 네가 이기면 무죄 방면해주마.”
이 시대에 가장 널리 통용되는 법률이 다름 아닌 결투 재판이었다. 특히 이번처럼 양면적인 요소가 얽혀 한 쪽의 주장만 맞다고 보기 어려울 때, 결투를 통해 누가 더 정의에 부합한 지 가리는 결투 재판이 성행했다. 신께서 승자의 편을 들어 주시리란 기대는 아주 흔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걸 결투 재판으로 가져가면 누가 봐도 이길 사람이 뻔했다. 그래서 아르투르는 다른 제안도 꺼냈다.
“다른 방법은 얌전히 우리를 따라와서, 나중에 교황 성하의 주재 아래 종교 재판을 받는 것이다. 자, 어느 쪽을 바라느냐?”
껄껄 웃어대는 레오폴트.
“아니, 이거 나보다 더한 놈일세. 그냥 목이나 쳐, 정말로 악마를 믿어서 이단이 확실한 놈들이 종교 재판으로 끌려가면 죽느니만 못한 신세가 된다고. 그냥 목이나 쳐주자.”
하지만 아르투르는 재판은 치러주고 싶었기에 그 제안을 거부했다. 루체리오의 지도자들은 한시라도 더 살고 싶어서 종교 재판을 받기로 했다. 그들은 재판을 약속한 뒤에 마을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그들을 놓치게 되면 겪게 될 후환이 두려웠던 마을 주민들이 그들을 꽁꽁 묶어다가 마을의 창고에 가둬버렸다.
대강 정리를 끝낸 아르투르 일행은 다음 행선지를 논의했다. 아르투르는 두 말할 것 없이 성혈 기사단의 본부로 가서 교황 특사를 구출해야한다고 했다.
“우리가 그와 만나야하는 이상, 반드시 구해내야만 하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사람, 그것도 성직자를 결코 그냥 둘 순 없어. 나는 맹세를 했고, 지킬 걸세.”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시라노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의견을 제시했다.
“저, 아르투르 공. 제 생각에는 그 늑대 악령의 함정일 가능성이 아주, 아주 높습니다. 아르투르 공께서 오시는 시간에 딱 맞춰서 의미 없는 저항을 하게 만들고, 그 뒤에는 공의 성향을 아는 것처럼 인질을 잡아두었다 알렸지요. 이건 계획된 함정입니다!”
태연히 답하는 아르투르.
“안다.”
“그렇다면…?”
시라노는 의아한 목소리를 내어, 그걸 알면서도 왜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냐고 되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도발을 받으면 응전해줘야 기사다운 일 아니겠어? 놈이 수작을 부렸건 말건, 우리의 용맹 앞에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택도 없지.”
레오폴트도 군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는 신나는 모험을 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이번 일에 완전히 매료되어있었다. 늑대 악마와 싸우고 사람들을 구출하는 여정에 함께 해볼 수 있다니, 그건 기사 계급의 수장으로서 평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영광스런 일이 될 것이 자명했다!
두 사람이 결정하자, 나머지는 그냥 따랐다. 숫자가 너무 작다거나, 대체 우리랑 무슨 관련이 있냐고 투덜거리고 싶은 자들도 있었지만 주군이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는가. 아르투르 일행은 빠른 속도로 말을 달려 성혈 기사단의 본부 성채로 향했다. 그런데, 의외의 풍경이 도로 위에 펼쳐져있었다.
길가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한 가운데 중무장한 시체 수십 구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심지어 그들 가운데 많은 수는 기사였다. 그리고 거구의 여덟 전사들이 시체들을 뒤지며 값나가는 것을 찾고 있었다.
“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재회하게 되었구만. 네 칼을 두고 싸워야 된다는 약속, 잊지 않았지?”
붉은 수염을 기른 거구의 북구인 전사, 베오릭이 시체 위에 앉아 아르투르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북구인 전사들도 아르투르 일행의 등장에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왜 여기 있어? 고용주는 어디다 팔아먹고?”
쓰러진 기사의 시체를 뒤적이던 북구인 전사가 투구를 벗었다. 은발의 여전사, 힐데군드였다.
“분수를 몰라서 대가리를 쪼개버렸지. 이놈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