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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23화 (12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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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리 보고 당신 말만 믿고 쳐들어가서 기사들을 죽이라는 이야기요?”

줄리아노는 고개를 저으며 교활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니요.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단순한 호위입니다. 저와 함께 기사단의 성채로 가서 그들을 설득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일이 잘 진행된다면, 공께서 나서실 이유는 없을 겁니다. 자, 곧장 출발합시다. 신께서 저희를 보호해주실 겁니다.”

아르투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줄리아노를 노려봤다. 노골적인 의심을 드러내는 표정이었다.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고작 스무 명 넘는 인원만 데려가라? 그것도 종교 기사단의 성채로 들어가면서?”

“하지만 아르투르 공께서는 홀로 백인도 베어 넘긴 분 아니십니까? 성채에 있는 건 고작 기사 수십 명이 전부입니다.”

“그건 훈련도 되지 않은 산적 놈들이 상대였기에 가능한 이야기고, 정규 기사단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숙련된 기사만 백 명은 될 거고, 그 아래 종자들과 병사들을 합치면 못해도 사, 오백 명은 족히 넘겠는데. 그런 문제라면, 군대로 잡아내야지, 기사 한 무리를 불러서 처리할 일이 아닐 텐데.”

상대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전투가 벌어질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게다가 교황 성하께선 기사단 지도부가 이단으로 넘어갔다는 치부를 밝히고 싶지 않아하십니다. 이런 문제는 조용히 처리하는 게 맞지요.”

아르투르는 잔뜩 짜증나는 표정을 지었다.

“말이 너무 앞뒤가 안 맞는군. 처음에는 내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처럼 말하더니, 나중엔 당신이 설득 할 테니 두고만 보라? 자세히 캐물으니 싸워도 그만 아니냐고 하였다가, 그런데 이젠 싸울 일이 없다고 하는군. 대체 뭘 부탁하러 온 거요? 교황 성하가 이런 지시를 내리신 게 맞소?”

이쯤 되자, 둔감한 기사들도 무언가 수상하다는 걸 느끼고 점차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시라노와 레오폴트, 케이 같이 영민한 자들은 이미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신체의 긴장감을 올리고 있었다. 아르투르 역시 목에 칼날을 들이밀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일개 주교도 아닌 교황의 대리인. 함부로 행동하다간 큰 곤란을 겪을지도 몰랐다.

잠깐, 교황의 대리인이 맞긴 한가?

아르투르는 다시 그의 옷차림을 살폈다. 추기경들만 입을 수 있게 허용된 고유한 양식의 붉은 옷을 입고 있었고, 오른손 검지에는 마찬가지로 주교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호위병들의 복장도 틀림없는 교황청 근위대의 것이었다.

“시-켈투라. 프산투-르 파가누스 케사리노트.”

그 때, 시라노가 온유한 태도로 방긋 웃으며 특사를 보며 말했다. 궁정에서 교육 받은 아르투르와 레오폴트는 억양을 보며 시라노가 고대 제국의 언어를 말했음을 알아들었다. 고대 제국의 언어는 교회의 공식 용어였지만 워낙 배우기 까다로워서 공부를 열심히 한 귀족이 아니면 기초적인 수준을 면치 못했다.

물론 성직자라면 반드시 능통해야하는 언어였다. 단숨에 두 사람의 시선이 교황청 특사에게 향했다. 줄리아노는 자신도 웃어보이며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시라노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방금 한 말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이 똥멍청이 이교도 새끼야』 였습니다.”

그의 말이 신호가 되었다. 대번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 여명을 뽑는 것. 특사의 목에 칼을 겨누는 행동이 동시에 일어났다. 특사의 호위병들이 반응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레오폴트의 검날이 번득이자 목이 나뒹굴었다.

아르투르는 줄리아노를 내려다본 채,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교황 특사는 어디로 갔지?”

하지만 상대는 목에 겨눠진 강철에도 개의치 않고 아르투르를 비웃는 듯한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거짓된 신과 함께 있겠지. 너희들이 섬기는 용살자는 거짓된 신이며, 진정한 신은 단 한 분, 영원한 불꽃뿐이니라.”

“이 이단자 같으니, 우릴 네놈들의 소굴로 데려가서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었군. 뭘 위해서냐?”

하지만 줄리아노는 오히려 더욱 광기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네놈들은 이미 마을에 들어선 순간 함정에 빠진 것이다! 와하하하! 영원한 불꽃께서 너희를 불태우리라!”

상대의 눈빛을 본 아르투르는 그가 순순히 협조할 리가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목에 겨누어진 칼을 슬쩍 휘두르자, 놈의 목뼈가 덜컹 썰려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머리 없는 몸뚱이가 바닥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건물 바깥에서 큰 소음이 들려왔다.

쿵쿵쿵쿵 - !

귀를 기울여보니 발걸음 소리였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전력을 다해 달릴 때 이런 소리가 났다. 고작 수십 명 정도론 이런 소리를 절대 낼 수 없었다. 못해도 수 백, 적어도 천은 넘는 것이 분명했다.

“이단자들을 불로 정화하라! 영원한 불꽃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니라!”

“정화! 정화! 정화! 세상은 불로 다시 태어나리라!”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지 기사들은 귀가 멎을 지경이었다. 슬쩍 문 밖으로 쳐다보니, 그들은 대부분 몽둥이나 삽 따위로 무장한 광신도들이었다. 치명적인 무기라고 해봐야 농기구로 사용되는 쇠스랑이 전부였다.

“푸흐흐흐. 마을 주민들이 우리를 죽이겠다고 모여든 꼴 좀 봐라. 녀석들, 이단을 믿더니 완전히 맛이 간 모양이야. 재밌지 않느냐?”

그의 근위기사들도 우스운 듯 팔짱을 끼며 비웃었다. 하지만 카밀은 심각한 표정으로 연달아 화살을 쏘아 보내며 말했다.

“나리들! 지금 여유부리다간 죽습니다! 당장 건물 바깥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레오폴트는 과시라도 하는 양 여유로운 표정으로 건물 바깥에 모여든 인파를 보며 양손에 각각 장검을 뽑아 들었다.

“땅이나 파먹고 사는 쓰레기들은 백 명이 오건 천 명이 오건 이 몸의 상대가 못된다. 오라고 해라.”

레오폴트와는 다른 이유지만 아르투르도 침착히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르투르도 레오폴트의 자만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에게도 무장한 농사꾼을 죽이는데 들어가는 수고는 벌레를 손으로 짓눌러 죽이는 것과 비슷했다.

“잠깐만.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지부터 알아보자. 저 사이비 이단 놈들이 뭐라고 지껄이건, 무장한 기사들과 싸우고 싶진 않을 거야. 상황 파악부터 하자고.”

말을 마친 아르투르는 마을 주민들을 향해 화평의 의사로 빈손을 들어보였다.

“주민들이여, 무언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어째서 우리가 싸워야하는 지….”

쾅 - !

주민들의 대답은 마을회관의 문을 거칠게 닫는 것이었다. 시라노와 몇몇 기사들이 재빨리 달려들어 문을 열고자 했지만 건너편에 무거운 것들을 가져다둔 탓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작정하고 온 듯 대문에 못질을 시작했다. 카밀이 다급히 외쳤다.

“지금 그러실 때가 아닙니다! 이대로라면 건물채로 타 죽을 겁니다!”

카밀의 말을 증명하듯 군중들의 함성이 커져갔고 들이 놓았던 불길이 급속히 건물 내로 번져나갔다. 매캐한 연기가 숨을 막아오는 가운데, 레오폴트는 큭큭 웃고 있었다.

“야야. 최강의 기사에게 배운 두 명의 왕족이 땅 파먹고 사는 놈들에게 불타죽으면 남들이 뭐라고 비웃을까?”

그렇지 않아도 아르투르는 열이 오른 표정으로 문을 응시하던 표정이었는데, 레오폴트의 말에 아예 눈에 불길이 번득였다. 그는 문을 열어보려고 고군분투중인 일행들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다 비켜.”

아르투르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더니, 오른쪽 어깨에 모든 체중의 힘을 가득실어 부딪쳤다. 기사들 가운데서도 정점을 찍은 타고난 힘과 평생을 단련한 근육, 그리고 그런 몸을 다룰 줄 아는 요령을 모두 발휘했다. 더군다나 그는 전신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무게가 더해졌다. 이 모든 힘을 오른쪽 어깨에 실은 후, 굳게 닫힌 나무문을 향해 부딪친다!

쾅 - !

아르투르가 부딪치자 문이 통째로 흔들리며 먼지가 들썩였고, 경첩이 떨어져나갔다. 아르투르는 뒤로 물러난 후 다시 한 번 온몸의 힘을 실어 부딪쳤다.

콰아아앙 - !

다시 한 번 충격이 가해지자 문짝이 공성추에 얻어맞은 것 마냥 조각나서 흩뿌려졌고, 문을 막고 있던 주민들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연기 속에서 아르투르 일행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르투르와 기사들은 독기가 가득 오른 흉흉한 눈빛으로 마을 주민들을 노려보았다. 주민들의 숫자는 일행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지만, 만전의 준비를 갖춘 기사 스무 명 앞에서 단순한 양적 우위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건 상식이었다. 기사들도, 주민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지 농민들의 눈빛도 흔들리고 있었다.

“너흰 미쳐버린 게냐? 뻔히 무장하고 있는 기사들을 상대로 습격을 해? 다들 가족도 있을 놈들이 뭐하는 짓이냐? 너희에겐 다행히도 우리 일행에서 다친 이가 없으니, 단순 가담자에겐 죄를 묻지 않겠다. 자, 그러니 책임자를 말해라. 누가 이런 일을 시켰지?”

하지만 주민들은 꿈쩍 하지 않았다. 아르투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의 눈동자를 면밀히 살핀 후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마을 주민들은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들 중 대장 역할을 맡은 듯한 젊은이가 말했다.

“다들 뭘 망설이는 거야! 지시를 듣지 못했나! 저들을 죽이거나, 우리가 모두 죽거나! 둘 중 하나다!”

핑 - !

시위를 떠난 카밀의 화살이 젊은이의 오른쪽 눈알에 명중해 그를 고꾸라뜨렸다. 아르투르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군중을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기선 제압이었다. 이제 나대던 놈이 쓰러졌으니 자신의 일이 한층 쉬워지리라.

그런데, 농민들은 꿈쩍을 안했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감히 기사들을 상대로 공격해올 생각도 못했지만, 그렇지만 자리를 떠나 도망치거나 항복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듯 했다. 이쯤 되자 아르투르의 일행도 수상함을 느꼈다. 대체 놈들의 뒤에 무엇이 있길래 지금 당장 칼에 맞아주는 것보다 더한 공포가 있단 말인가?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들려온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짐승의 포효처럼, 쩍쩍 갈라지며 남을 위협하는 섬뜩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온 몸을 떨어댔고, 많은 이들은 바닥에 엎드려 자비를 탄원했다. 아르투르 역시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걸 느낄 수 없었다.

- 내가 너희들의 영원한 주인임을 잊었느냐? 죽어서도 고통 받고 싶지 않다면 가서 놈들을 죽여라. 당장! -

주민들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끌린 것처럼,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쇠스랑을 들어올렸다. 아르투르 일행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죽음보다 두려운 운명을 의식하고 있음을.

마을 회관을 둘러싸고 있던 인파가 기사들을 죽이기 위해, 혹은 깔끔히 죽기 위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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