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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무리아에 있는 옛 제국의 도로 위로, 스무 명에 달하는 무장 기병들이 지나고 있었다. 선두에는 남들을 압도하는 체격을 갖춘 금발의 기사와 조각상 같은 미남 귀족이 있었다. 그들의 뒤로 종자들과, 근위 기사들이 뒤따른다. 두 귀족들의 종자는 깃발을 자랑스럽게 치켜들고 있었는데, 각각 검은색 바탕의 황금 사자기와 진홍색 바탕의 은색 탑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각각 슈토벤 영지와 두라노의 상징이었다. 두라노 의회는 아르투르에게 정식으로 국부의 칭호를 수여하며 두라노의 상징, 눈의 탑을 깃발에 새겨 넣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고 아르투르는 두라노의 상징을 흔쾌히 자신의 깃발에 그려 넣었다.
가을날의 농부들은 서둘러 추수를 하다가, 아르투르 일행을 보며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봤다. 명망을 얻고자 하는 귀족들은 종종 지나가는 길에 적선을 베풀곤 했고, 식량이 필요할 경우 간혹 농부들에게 후한 가격을 지불하곤 했으니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아르투르 일행은 농부들의 아쉬움 담긴 시선에 아랑곳 않고 자신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얕잡아 보는 것도, 경멸하는 것도 아니라 그냥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농부들도 곧 작업으로 복귀했다. 애초에 서로가 사는 세상이 달랐다. 평생 볼 일도 없고, 다시 본다 한들 서로 말을 붙일 이유도 없을 터이다. 오직 케이만이 농작물을 캐는 농부들의 태도와 이야기에 귀를 쭁긋 기울이며 지나갔다.
얼마 뒤, 일행은 지나온 길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에 행렬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청년 기사 한 명이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아르투르 일행과 구면이었기에 모두들 긴장감을 놓을 수 있었다. 기사가 일행을 따라잡자, 아르투르가 에쿠잘루스를 앞으로 몰고 나갔다. 청년 기사는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다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진정한 기사, 아르투르 공이시여!”
아르투르도 제법 살가운 표정을 지었다.
“시라노 경. 나도 반갑네. 내가 떠날 때 하지 않은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건가?”
“제 제안을 거절하신다면 작별 인사가 되겠지만, 다른 것을 청하고 싶어왔습니다. 저도 공의 모험에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저도 기사도를 행하는 자로서 명성을 드높여 대대손손 칭송 받고 싶습니다. 일행에 끼워만 주시면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보셨다시피 제 밥값은 합니다.”
시라노가 당당히 이야길 마치자, 아르투르는 경쾌하게 웃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 자네처럼 용맹하고 유쾌한 기사라면 어디서든지 환영받을 걸세. 게다가 자넨 아는 것도 많잖나. 승낙하겠네. 참, 합류를 청할 거라면 두라노부터 따라오지 그랬나? 난 자네가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내가 베르나르도를 풀어준 것에 실망해서 떠난 줄 알았지.”
고개를 젓는 시라노.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소년을 벌했더라면 실망했겠지요. 기사다운 행위를 하신 겁니다. 단지 그 시간에 저는 옛 동지들과 함께 레말리트의 무덤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상황에 큰 허탈감을 느끼고 있어서 달래주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화정의 복구를 꿈꾸며 혁명을 했던 이들이라면 당연히 들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시라노가 마냥 자신을 따라왔다면 그들은 더욱 큰 실의에 빠졌으리라.
“함께 싸운 전우들의 감정에 세심한 배려를 하는 건 의리 있는 행동이지. 자네 역시 기사다운 행동을 한 걸세. 아무튼, 내 일행이 된 걸 환영하네.”
케이는 말을 거들며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시라노 경. 계속 함께 하게 돼서 기쁩니다.”
“오냐. 나도 너와 함께 하게 돼서 기쁘구나. 케이.”
카밀은 내키지 않는다는 감정을 잔뜩 드러내며 손을 내밀었다.
“카밀이오. 난 기사도, 귀족도 좋아하지 않으니 퉁명스럽더라도 양해 바라오.”
시라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카밀이라고 했었지요. 나 역시 기사이긴 하지만, 평민 출신입니다. 같이 아르투르 공을 따르고 있는 중에는 차이점보단 공통점에 집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맘에 더 안 드는 거요. 난 귀족 작위도 거절한 제정신 아닌 놈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주군이나 잘 모시시오.”
카밀의 퉁명스런 태도에도 시라노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사연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레오폴트 일행과도 재차 인사한 후, 일행은 마저 전진했다. 시라노는 일행에 들어오자마자 눈치 보지 않고 말문을 열었다.
“제가 고향인 앙저뱅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만….”
그는 정말 한 번도 쉬지 않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르투르를 포함한 많은 기사들이 거슬려했지만, 금세 그의 낙천성에 이끌려 와하하하 웃고 있었다. 그는 진중한 기사들이 가지는 과묵한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대신 남들을 잡아끄는 친화력이 있었다.
‘나와 레오폴트는 저렇게 격의 없이 이야기하면 소란스럽다고 마스터에게 체벌을 당했는데 말이야. 저 친구네 고향인 앙저뱅의 문화가 그렇거나, 평민 출신이라서 그런 격식에선 더 자유로운 것이었을지도.’
시라노는 무술 및 군사 외의 분야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 전통적인 기사들과 달리, 다방면에 두루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행군 도중에는 늠름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으며, 쉬어갈 때면 자신이 여행한 세상 방방 곳곳을 전문적인 이야기꾼처럼 흥미롭게 이야기했다. 덕분에 지루하기만 하던 행군 시간이 제법 즐겁게 변했고, 일행들은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흘렀다.
“시라노 경! 이 책의 내용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는데요…”
특히 케이가 시라노와 가장 빨리 친해졌다. 시라노의 폭넓은 지식과 여행 경험을 전수받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아르투르는 그 모습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
‘교육이 늦어. 기사로선 뒤쳐진 녀석이, 남는 시간에 더 무술에 매진할 생각은 안하고 저런 잡기에만 몰두하다니.’
하지만 아르투르는 구태여 꾸짖지는 않기로 했다. 자신과 케이의 입장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는 걸 실감한데다가, 무엇보다 시라노와 대화하는 케이가 너무 즐거워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의 성실함을 봐서라도, 쉬는 시간에 딴 일에 관심을 지니는 건 눈감아줄만 했다.
‘뭐, 재능이라도 뛰어나다면 나중에 원망을 듣더라도 죽도록 굴릴 텐데. 저 녀석, 무술 재능은 아무리 잘 봐줘도 그냥 범용하단 말이지. 차라리 저런 쪽이 도움이 될 지도.’
여하튼 시라노가 합류한 지 사흘 후, 아르투르 일행은 루체리오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치고는 아주 규모가 크고 발달한 곳이었다. 상업이 발달한 덕분인지 마을 주민들도 제법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교황이 이 마을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군. 이곳에 특사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으니 느긋하게 기다리자고.”
고개를 끄덕이는 레오폴트.
“좋아. 그렇게 하지. 우선 마을의 주인에게 가서 예를 표하고 오자고. 어쨌든 외부의 귀족들이 들린 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깃발이 안 보이는데?”
시라노가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왜냐하면 루체리오는 어떤 주인도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대 교황 성하께서 특권을 부여하셨기 때문이지요.”
“흠? 지도에 따르면 여긴 피오렌치아의 영역에 가깝다만, 교황이 무슨 일로 이 마을에 그런 특권을 내린 건가? 설령 교회에서 명분을 주었다 한들, 일개 마을이 실질적인 독립을 유지할 방법은 없었을 텐데.”
“그 점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우선 삼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레오폴트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봐. 넌 말이 너무 길어. 세 줄로 줄여서 보고해.”
그러자 시라노는 자신이 준비해둔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싶은 지 아르투르에게 눈빛으로 지원을 요청했지만, 싸늘한 시선이 그의 대답이었다. 결국 시라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루체리오 주민들은 구세주께서 이곳에 나타나시는 기적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그걸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완전한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실제로 마을을 지켜주는 건 근방에 있는 교황청 산하의 성혈 기사단입니다.”
레오폴트는 박수를 쳤다.
“이젠 이해가 쉽네. 거 봐, 하니까 되지?”
“사실 이건 불완전한 설명입니다. 기적의 진위 여부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고 당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볼 때 간과되는 점이…”
레오폴트는 질린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닥쳐. 별로 관심 없거든?”
아르투르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말했다.
“아무튼 성기사단 산하의 마을이다 이거군. 교황청에서 보자고 했을만한 이유가 있네. 그런데 성기사단들은 보통 이교도들과의 접경지대나, 성지를 수호하지 않나? 우리 발타리아 교도들만 가득한 레무리아 한복판에 성기사단을 배치하고 있는 건가? 기적 발현지를 노리는 사람들을 막으려고 그곳마다 수백 명의 기사단원들과 그들을 수용할 요새를 만들어둘 필욘 없잖나.”
고개를 끄덕이는 시라노.
“아르투르 공의 말씀이 맞으십니다. 그래서 다들 교황청이 영토에 욕심을 내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이겠지요. 혹은 성혈 기사단의 요새 지하에 고대의 비밀을 관리하는 이단 심판소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시에 교황청의 여러 치부도 처리하구요. 제가 볼 때는 모두 사실로 보입니다. 레무리아에 교황이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을 남겨둬서 기회도 엿보고, 법령 상 교황청에서 처리하기 곤란한 죄수들도 저기서 처리하는 겁니다. 즉, 성혈 기사단은 내부 숙청 및 권력 투쟁에 특화된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아르투르도 설명을 듣고는 시라노의 추론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그런 장소에 나를 불렀다는 건 필시 직접 처리하기 꺼려지는 일을 맡길 거란 이야기군. 썩 명예로운 일은 아니겠는데.”
“음. 뭐, 그쪽도 바보가 아닌데 아르투르 공이 어떤 분인지 뻔히 알면서 불명예스런 일을 시키진 않겠지요. 단지 성직자로서는 저질러서는 안 될 것들 가운데, 기사는 명분만 있다면 마음껏 해도 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잖습니까?”
아르투르는 이해가 가는 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겠군., 이제 교황이 구체적으로 뭘 바랄지 들어보자고. 우리에게 베풀 대가를 잘 준비해왔는지도 봐야 할 테고.”
일행이 루체리오 내부로 진입하자 현지인들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일행을 환영해주었다. 그들은 마을 내에서 가장 큰 건물, 마을 회관으로 안내 받았다. 붉은색 옷을 차려 입은 교황청의 특사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특유의 복장을 입은 거구의 교황청 근위병들도 함께였다.
“어서 오십시오. 아르투르 공.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중한 태도를 취하는 상대는 중년의 사내였다. 아르투르는 왠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직감이 그를 거부했다. 하지만 아르투르의 몸은 배운대로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한다.
“만나서 반갑소. 그대는?”
“교황 특사 자격으로 이곳에 온 줄리아노라고 합니다.
성이나 직위를 말하지 않는 걸 보니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일단은 그러려니 했다. 교황청에서 평민들이 고위직까지 출세하는 건 드물지만, 간혹 있기는 한 일이었다. 상대도 그런 경우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 먼 길을 왔으니 더 이상의 인사는 생략하고 용건부터 이야기 해봅시다. 성하께서 서신으로는 말해줄 수 없다고 하시던 그 문제 말이오. 그걸 처리해달라고 말씀하시던데, 무엇인지 알아야 도울 건지 아닌 지를 정할 수 있을 테니.”
줄리아노는 아르투르의 주변 인물들을 살폈다.
“세 사람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심복들이고, 사촌인 레오폴트 백작은 당신도 잘 아는 사람이겠지. 뭘 망설이시오?”
아르투르의 쏘아붙이는 듯한 말투에 줄리아노의 표정이 조금 찌푸려졌다. 아르투르는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상대에게 매몰차게 대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직감을 따라서 손해 본 적이 별로 없었기에 계속 그렇게 대했다.
“이단에 빠진 자들을 정죄하는 일입니다.”
“그래? 종교재판을 하고 싶거나 회수해야 할 성유물이 있다면 이단 심판관들을 부르셔야 할 일 아닌가? 군사적으로 처리해야한다면 성기사단이 도맡을 역할일거요.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잖소.”
줄리아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실실 웃었다. 아르투르는 다시 봐도 이 자가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히 자신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레오폴트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바로 그 성기사단이 이단이 되어버렸다면 어떻겠습니까? 바로 이 근방의 성채에 주둔한 성혈 기사단의 단장과 간부들이 잘못된 길에 빠져 들어버렸습니다. 그렇기에 공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르투르는 무언가 못마땅한 눈으로 줄리아노의 눈동자를 응시하다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