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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내려앉은 대도시는 고요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선술집에서 회포를 푸는 사람들마저 들어가서 곤히 잠들 시각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자, 두건을 푹 눌러쓴 기수 한명이 도시의 뒷문에 나타났다. 관문을 지키는 수비대장이 밤에는 결코 성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을 외치려할 때, 기수가 진홍빛 십자가가 새겨진 천을 들어 흔들었다.
경비대장은 아무런 말없이 성문을 열어준 후, 기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들여보냈다. 기수는 후드를 한층 더 눌러쓴 채 말을 재촉했다. 얼마 뒤, 기수는 궁전의 밀실에서 반백의 노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호위병 한 명 없이 홀로 말을 달려왔다고? 용감한 게냐? 미친 게냐? 요즘 시국에는 노련한 칼잡이도 그런 짓은 피한다.”
기수는 주변을 살피고는 이 방에 반백의 노인만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곤 후드를 내렸다. 그러자 윤기 있는 장발의 갈색 곱슬머리가 흘러 내렸다. 푸른 눈을 한 젊은 여인의 얼굴이었다.
“제 전령 대부분이 오르마델로 어르신께 매수되어있으니 제때 성하께 상황을 보고하려면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지금 피오레 가문은 내통자 색출에 혈연이 되어있으니 제가 비밀리에 서신을 교환하려 들거나 장기간 자리를 비우면 바로 눈치 챌 겁니다. 그러니 이런 방법이 유일했습니다. 위험 부담은 감수할 수밖에요.”
노인은 소리를 내어 껄껄 웃었다.
“하! 누가 라이랜더 가문 사람 아니랄까봐 대담하군. 돌아갈 때는 사람을 한 명 붙여주겠다. 아무튼,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왔으니 보고를 들어야겠지. 전쟁 결과는 만족스럽다만, 뒤처리는 어떻게 되었느냐?”
“우선 연결해주신 대포기술자들에 대해 말씀드려야겠죠. 그들은 제 심복들과 함께 동방으로 빼돌려두었습니다. 아직 지시하신 바가 없어 목숨은 살려두었지만, 성하께서 원하시는대로 처분하겠습니다.”
교황은 탁자 위에 뉘여 있던 포도가 담긴 그릇으로 손을 가져간 뒤, 포도 한 알을 살포시 깨물었다. 하지만 바로 목구멍으로 넘기지는 않고, 혓바닥으로 핥으며 맛을 음미했다. 어떤 특이한 맛도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서야 목구멍으로 넘겼다. 교황으로서 장수하고 싶다면 바람직한 습관이었다.
“그 자들은 동방이 아니라 네 영향력 아래 있는 소도시에 숨어있다는 걸 안다. 내가 죽이라고 한다고 죽이지도 않을 것이란 것도 알고.”
침묵을 지키는 샤를로트.
“.....”
하지만 교황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번 거짓말은 훌륭했다. 표정 하나 변하질 않아서 진짜인 줄 알았거든. 성장이 느껴지니 네 대부로서 축하할 일이구나. 잘하고 있다. 그렇게 네 사람들을 지키고, 모아나가야지. 나도 성직자다. 불필요한 어린 양들의 죽음은 바라지 않아. 그러니 계속 데리고 있어도 좋다. 단.”
교황은 말을 끊은 채 샤를로트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들 때문에 이번 음모의 배후로 저희가 있다는 걸 들켜서는 안된다는 뜻이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제 명줄이 누구에게 달려있는 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샤를로트는 머리를 꾸벅 숙였고, 교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간 사람들은 눈앞의 노인을 두고 맨발의 성자, 인자하신 아버지라며 칭송을 마지않았다. 샤를로트가 볼 때도 우르술라 2세는 진심으로 교회의 권위를 일으켜 세우는데 삶을 바치는 인물이었고, 도덕적 타락에 물들어있던 이전 교황들과는 달리, 신앙의 모범이라 할 만한 경건한 태도를 유지하는 성직자였다.
‘단지 교회를 바로 세운다는 목적을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분이지.’
두라노에서 혁명이 벌어졌을 때, 교황은 즉각 자신을 불러 아르투르와의 교섭을 진행했다. 사실 그의 앞에선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감을 내비치긴 했지만, 그건 막후 권력자로 교황이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자신이 알지 못하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도 아르투르를 지원해주었으리라.
“그래. 알고 있다면 되었다. 두라노에서의 전쟁이 끝난 후,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 군사적 팽창을 거듭하며 교황령까지 노리던 오만한 랑트리뷔아체의 확장은 끝이 났지. 신을 공경할 줄 모르는 부도덕한 참주들은 잇달아 정권에서 축출되고 있고. 이제 레무리아 인들은 교회를 평화의 중재자로서 존경하지. 이것이 너와 내가 이룬 일이다. 앞으로도 잘해주길 바라마.”
노인의 말대로 두라노 전쟁 이후 교황령은 레무리아 반도의 새로운 실력자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예민한 각 도시의 참사회도 입장을 빠르게 뒤바꾸면서 교황에 대한지지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
‘이게 절대 우연일 리가 없지. 교황 성하의 곁에 있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대가도 충분히 있지. 난 그 기회를 잡을 거고.’
“그러니 네 헌신에도 보답이 있어야겠지. 무엇을 바라느냐? 나는 라이랜더 가문의 명예를 되찾아주고, 어머니를 풀어줄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 되다면 너희 가문도 정치적으로 재기할 여지가 있겠지.”
샤를로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베풀어주시려는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제게 필요한 건 다른 일입니다. 향후 피오레 가문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교황 성하의 지지를 보내주십시오. 오르마델로 어르신이 영향력을 많이 잃으신 이상, 성하께서 가문의 우두머리나 마찬가지시죠.”
의외라는 눈빛을 보내는 교황.
“흠? 그래? 하지만 네가 어떤 일을 하건, 피오레 가문의 재산은 외부인이 상속받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알 텐데, 차라리 네 가문을 복권시키고 네가 정식으로 피오렌치아의 참사회로 복귀하는 쪽이 낫지 않겠느냐?”
슬며시 웃어 보이는 샤를로트.
“피오레 가문의 주인이 곧 피오렌치아의 주인이란 점을 아시지 않습니까. 참사회는 껍데기만 남았죠. 차라리 피오레 가문 내에서 영향력을 넓히는 게 낫지요.”
교황은 아쉬운 표정을 짓곤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로서는 교황이나 돼서 가문 내의 다툼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위해 일해 준 이상, 자신도 응당 정치적 대가를 지불해야했다. 그게 반도에서 통용되는 암묵적인 법칙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그럼, 다른 사항들을 마저 논의하자꾸나.”
두 사람은 그 뒤로도 여러 시간에 걸쳐 정치적 현안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의 목숨이나 재산이 오가는 살벌한 대화들이었고, 몇몇은 공개적으로 밝혀지면 큰 파장이 일만한 안건들이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하게 논의된 건 아르투르에 대한 건이었다.
“앞으로 아르투르는 어디로 갈 것이라고 짐작하느냐?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너라면 꽤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만.”
“그와 만났던 건 몇 주일 뿐입니다. 농노 한 명을 구하자고 왕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기도 전 이었고요. 두라노에선 그를 군주로 추대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본인이 도시의 분란이 될 수 있다고 거절하는 모양입니다. 직접 만나보고 싶지만 감시하는 눈이 너무 많아 제가 접촉하긴 어렵습니다.”
교황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며 생각에 잠겼다.
“뭐, 특이한 친구라는 건 분명하다. 반백년도 넘게 산 나도 저렇게 광적으로 명예를 추구하는 인물은 본 적이 없다. 비슷한 자들은 몇 있었지만, 대부분 오래 가지 못하고 죽었지. 하지만 저 자는 모든 시련을 이겨내며 전진하고 있어. 페르넬이 남겨준 마법검 덕분이란 이야기도 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닐 게다. 좀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을 통해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는데. 인기 좋은 청년 귀족이라면 애인도 여럿 있을 법 한데, 정부들을 통해 알아보는 건 어떻겠느냐?”
교황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쳤다. 어깨를 으쓱이는 샤를로트.
“글쎄요. 루크레치아에게 유혹하란 말도 해봤지만, 틈을 줘도 전혀 넘어올 생각을 보이지 않는다는군요. 오히려 경계만 받고 있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미인계는 어려울 것 같으니 측근들에게 접촉을 해보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나마도 충성심은 확고한 지라, 우리 편으로 돌리기는 어렵겠고, 정보를 캐내는데 만족해야 하겠지만요.”
“그건 꽤 흥미롭군. 젊은 기사가 레무리아 최고의 미녀를 두고 냉정을 유지한다는 것만으로도 드문 자제력을 가진 사내다. 내가 따로 알아보마. 아르투르 건은 내게 맡기고, 너는 피오렌치아의 동향을 수집하는데 집중해라. 다른 보고할 사항은?”
샤를로트는 빠르게 답했다.
“더 이상 없습니다. 다만 궁금한 게 있습니다. 교황 성하.”
“물어도 좋다.”
“사생아 왕자에게 막대한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만, 어디까지 보고 계신 겁니까?”
샤를로트의 질문에 교황은 사람 좋은 노인처럼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뭐, 충분히 관심을 끌만한 아니더냐? 내 입장이라면 당연하지. 오히려 너야말로 일부러 관심을 숨기는 느낌을 받는다만, 딱히 이유를 묻지는 않겠다. 네 입장에서도 그럴만한 청년이니 딱히 이유는 묻지 않으마. 구상은 필요한 때가 되면 밝히겠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자, 이제 가보거라. 다시 밤새 말을 돌려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 내 호위를 데려가는 것도 잊지 말고.”
“명하신 바대로 하겠습니다. 성하.”
샤를로트는 고개를 숙인 후 밀실을 떠났다. 그러고서도 교황은 자리를 지키며 집무를 지속했다. 서부 대륙 전역에 걸친 교회에서 도착하는 각종 정보를 취합해 판단을 내리고, 지역 교구에 필요한 사항들을 전달해주는 일이었다. 예순이 넘어서도 밤새도록 집무를 볼 수 있는 그의 체력을 두고 신의 축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이시여, 부디 제가 오래도록 건강한 몸과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직 당신의 영광과 교회의 권익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끼이익 -
그가 한창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교황은 아랑곳 않고 기도를 계속 했고, 들어온 사내는 바닥에 몸을 엎드리며 절했다.
“미천한 주님의 종, 프란체스가 그분의 대리인인 교황 성하를 알현하옵니다.”
교황은 그러고도 자신의 기도를 끝마친 뒤에야 뒤돌아 일어나도 좋다는 손짓을 했고, 미동도 않던 프란체스도 그때야 움직였다.
“어서 오게. 프란체스 형제. 구호 작업은 어땠는가?”
“신과 교황 성하의 은총에 힘입어 많은 생명들을 구했습니다. 또, 명하신대로 아르투르 공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잔인무도한 레오폴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드리고 싶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도 그 무도한 자에 대해 아셔야 할 필요가 있으실 터입니다.”
우르술라는 고개를 끄덕였고, 프란체스는 열변을 토하며 레오폴트 백작의 교회에 대한 불순종과 잔인함을 대해 성토했다. 우르술라는 겉으로는 통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실은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순진한 프란체스 형제 같으니. 평생 수도사 생활만 하니 세상 물정을 모르지. 원래 귀족들이란 게 그런 족속들이거늘.’
자신부터가 귀족 출신이니 그들이 무엇 하는 존재인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항상 남들보다 더 우월하고, 가치 있다고 믿어야만 성질이 풀리는 자들이었다. 수도원장쯤 되면 그런 현실에 적응할 법도 한데, 굽히지 않는 걸 보니 미련한 건지 대단한 건지 모를 노릇이다. 어쨌든, 이야기는 돌고 돌아 아르투르로 돌아갔다.
“그래서 아르투르는 어떤 사람이던가?”
“아르투르 공은 전투가 끝나고 부상자들을 구호하는 작업을 돕더니, 제게 영적으로 옳은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어쩌면 그분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기사일지 모릅니다. 모쪼록 교황 성하께서 좋게 봐주시고,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음. 형제의 의견은 잘 알겠네. 내 결정에 있어 참고하도록 하지. 혹시 페르넬이 물려주었다는 마법검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나?”
고개를 젓는 프란체스.
“직접 물어볼 시간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마법 검을 본 적이 없는 평범한 병사들이 만들어낸 전설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아르투르 공이 물려받았다는 검이 정말로 성유물이라면, 다른 성유물들처럼 눈에 띌만한 대단한 기적을 선보여야겠지요. 기껏해야 강철을 가르는 정도라면 평범한 마법의 검이라도 가능한 일 아닙니까? 무엇보다 그 자는 명예를 추구하는 자이지, 신심이 깊은 자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자가 어찌 성검을 휘두르겠습니까?”
교황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마법은 구세주가 용들을 무찌르며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그 시대의 잔재들은 꽤 남아있었다. 대부분이 비밀 속에서 감추어져 왔기에 전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마법검이 몇 자루 정도 대왕의 무기고에 있었다 한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놀랄 일은 그런 가문의 비밀스런 가보를 사생아에게 물려주었다는 것이리라.
“역시 그랬나. 그런 성유물이 데네토르 왕국에 있었다면 진즉에 우리 교회가 회수했겠지. 마법검이 부상을 치료했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인 모양이야. 그냥 전투 중에 병사들이 착각한 것을 미신을 믿기 좋아하는 농부들이 퍼뜨린 거라고 보아야겠군.”
찬동을 표하는 프란체스.
“제 의견도 그렇습니다. 성하.”
혹시 아르투르가 정말로 성유물을 가지고 있었고,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를 대우하는 방법은 크게 달라져야 했을 터이다. 하지만 일개 마법검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한 이상, 딱 정치적인 계산만 거치면 될 일이었다. 판단을 마친 교황은 아르투르에게 보낼 서신을 써내려갔다.
‘마침 성기사단 중 하나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데, 이 기회에 아르투르를 이용해 좀 정리를 해야겠어. 이단이라고 선포할 만한 근거들이 있으니 별 문제도 없을 거고...그쪽도 명성을 높이고 교황청에 줄을 댈 수 있는 기회니 거부하진 않을 테지.’
우르술라 2세는 아르투르가 강력한 패가 될 수 있겠다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기사치고 정치적인 감각은 있어보였지만 그래봐야 무인들은 생각하는 바가 단순했다. 그의 무력을 조금만 이용한다면, 교황권의 확대라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도 쉽게 이룰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