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20화 (12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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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라노에서 아르투르가 만났던 인연들은 더 있었다. 우선 마을에서 데려왔던 동네 처녀 베아트리체와 그녀의 동생은 두라노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에렌을 통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던 것이다.

“감사해요! 나리! 덕분에 새로운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어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베아트리체의 동생이었다. 그는 지금 대장장이 조합의 도제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시대에 대장장이는 가장 좋은 대우를 받는 직업 중 하나였다. 무공을 세워 기사가 되는 극히 드문 사례를 제외하면, 평민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그런 만큼 대장장이들의 도제로 들어가기 위해서 많은 돈과 인맥이 필요했는데, 아르투르가 단번에 그걸 해결해준 것이다. 산골 마을의 고아 남매로선 신분 상승이나 다름없었다. 아르투르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된 일이 있어도 항상 견뎌 내거라. 진정한 남자는 고통을 견딜 줄 알며, 의무에 충실한 사람이다. 누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거라. 어른이 되거든 가장으로서 그녀를 챙기는 것을 잊지 말아라.”

소년은 존경심을 담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존귀하신 뜻, 잊지 않겠습니다.”

루크레치아 역시 아르투르를 먼저 찾아와 인사를 남겼다. 아르투르가 볼 때 그녀는 실로 다채로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레무리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기 좋은 여자 가수였고, 참주의 쿠데타 공모자이자, 그의 연인이었다. 동시에, 루드비코의 몰락에 기여한 혁명 공신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왕자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오늘날 두라노가 안정된 건 모두 나리의 덕택이니까요.”

그녀는 우아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아르투르는 오히려 그런 모습에 본능적인 경계심을 느꼈다. 아르투르는 그런 감정을 억누르며, 평온한 태도로 답했다.

“자네 역시 두라노의 안정화에 기여한 공이 적지 않아. 수고 많았네.”

루크레치아는 양손을 배꼽에 얹고,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빈민가의 제 친구들도 아르투르 공의 정부에선 희망을 보았다고 기뻐합니다. 더 이상 굶는 일도, 일자리가 없어 범죄의 길로 빠져들 일도 없어졌다고요. 공께서는 저희의 은인이시니,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설령 그것이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거나, 지탄 받을 일이어도 괜찮습니다. 저희의 충성은 오직 아르투르 공에게 있습니다.”

아르투르는 그녀의 구슬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 지는 모르겠네만, 제 2의 루드비코가 될 생각은 없네.”

루크레치아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왕자님께서 베풀어주신 한없는 은혜에 비하면, 저희가 드릴 것은 맹목적인 충성뿐이기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감히 고귀하신 분을 시험하려 든 적은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르투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와 그녀가 대표하는 빈민들이야말로, 어쩌면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루드비코를 참주로 추대한 자들도, 그 뒤에 맹목적인 충성을 보낸 자들도 이들이었다. 루크레치아가 공손히 인사하며 뒤로 돌아설 때, 아르투르가 입을 떼었다.

“자네들의 충성심에 어떤 가치가 있겠나?”

아르투르는 말을 내뱉은 뒤에야 목소리에 경멸의 감정이 담겼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에게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그러나 루크레치아는 뒤돌아서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양 가볍게 웃어보였다.

“그야말로 저희는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가 가진 것은 피와 살로 이뤄진 몸뚱이 하나가 전부지만, 그것만큼은 모두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두가 왕자님을 손가락질 하는 날이 오더라도, 저희만큼은 왕자님의 편으로 남을 것입니다. 힘 있는 자들과 덕망 있는 자들이 저희를 가축과 다름없다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저희는 기꺼이 그런 오명을 감수할 것입니다.”

아르투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서방 대륙의 관점에서 그런 의문 없는 충성은 오직 신에게 바쳐 마땅한 것이지, 고작 인간인 자신에게 바칠 것이 아니었다. 왕족도 사람이었고, 언제든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아르투르는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고 여겼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바로 자네들의 그런 눈먼 충성이 두라노를 한때 멸망 직전으로 몰아갔었네. 왜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노예나 다름없이 말하고 행동하려는 건가?”

아르투르의 목소리엔 분노마저 느껴질 정도의 경멸감이 강하게 묻어나오고 있었지만, 루크레치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저희 빈민들은 잡초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히고, 베면 잘려나가며, 남들이 먹다 흘린 빵부스러기나 탐하는 자들이지요. 배운 것이 없으니 올바른 일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유한 이들은 저희를 가축이라고 부르지요. 하지만 저희도 사람입니다. 누가 저희를 위해 노력하는지는 알고 있으며, 은혜와 원한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고,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아르투르는 이들을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존중할 수는 있었다. 상대 역시 그것을 알기에 자신의 시선에 담긴 비난을 받아들이고 있을 터였다.

“만약 자네들이 정말 내게 은혜를 졌다고 생각하거든, 오직 신과 정의에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고, 스스로 무엇이 옳고 그른 지 판단하게. 그럴 능력이 없다면, 그런 능력을 기를 것을 명령하겠네. 그게 내 은혜를 되갚는 일이 될거야. 자네가 말하는 충성이 진실일 때의 이야기지만.”

아르투르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루크레치아는 존경이 담긴 눈빛을 보내며 답했다.

“고귀하신 분이시여, 도시를 떠나기 전에 제 친구들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자네도 도시를 떠나나?”

“네. 제가 도시에 남아있는 것 자체가 분란을 일으킬 테지요. 베르나르도도 떠나는 마당이니, 도시의 새 출발을 위해선 저도 떠나는 것이 좋겠지요. 다른 도시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과거의 인연들과는 작별해야겠지요. 비록 고향을 떠나게 되었으나, 제 친구들이 새로운 삶을 얻은 것에 만족합니다.”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군. 현명한 판단에 경의를 보내네. 나는 지금도 자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게 되어 기쁘네.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땐 친구로 지낼 수 있길 바라네.”

“저 같이 비천하고 더럽혀진 이가 어떻게 태양처럼 빛나시는 분과 친구가 되겠습니까. 다른 도시에서 저를 보시게면 공연에나 한번 참석해주셨으면 합니다. 꼭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무대 위에서요.”

루크레치아는 인사를 남기고 정말로 떠났고, 케이가 무장을 마친 채 들어왔다.

“마스터, 준비되었습니다.”

“좋아. 가자.”

아르투르는 집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에쿠잘루스에 올라탔다. 일행들이 그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았고, 모든 두라노 시민들이 나와서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몇몇 사람들은 울먹이기도 했다. 아르투르가 떠나는 길에는 참사회의 의원들이 가득 도열해있었는데, 그들을 대표해 에렌과 조레스가 걸어나왔다.

‘시라노는 보이지 않는걸. 베르나르도에게 아버지의 재산을 돌려주기로 한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군. 뭐, 원망을 들어야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난 평화를 위한 선택을 했을 뿐이야.’

아르투르가 상념에 잠긴 동안, 에렌이 다가와 인사했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조차 아무 의미가 없군요. 같은 말을 여러 번이나 해서 말입니다. 공이 아니었다면 저와 가족, 고향 모두 어찌 되었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르투르는 쾌활하게 웃으며 에렌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도 자네가 아니었다면 두라노를 포기했을 거야. 헌신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걸세. 나 역시 내 공로를 인정하고 따라준 자네가 고마웠네. 우린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친구라는 걸 잊지 말게.”

청년 의원 조레스도 말했다.

“아르투르 공! 저희 두라노 인들은 반드시 은혜를 갚는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건 언제든 은혜를 갚겠습니다. 특히 공을 주군으로 모실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르투르는 조레스 역시 힘껏 껴안았다.

“자네와 함께 피를 흘리고 싸운 건 내게 큰 영광이었어. 은혜에 보답하고 싶으면 두라노를 잘 통치하게. 그동안 형편없는 통치자들 때문에 무너져가던 도시를 되살리고, 번영을 되찾게. 그리하면 나도 흡족히 미소 지을 수 있겠지.”

유력자로 이뤄진 참사회 의원들, 평범한 서민, 걸인에 이르는 모든 두라노 시민이 한 마음이 되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몰았다. 행렬이 시내를 지나 성벽에 도달할 무렵, 성벽 위에 도열한 수천 명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레스가 외쳤다.

“받들어! 창!”

그의 구령에 맞추어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들고, 방패를 두들겼다. 금속 마찰음이 웅장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국가의 아버지이신 아르투르 공께 경례!”

“아르투르 만세! 두라노 만세! 국부여, 영원하라!”

이미 환호에 익숙해졌던 아르투르조차 병사들이 내지르는 함성에는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국부라니, 무슨 말인가? 나는 두라노 시민도 아닌데, 어떻게 국부로 추대된다는 말인가?”

에렌은 당연한 듯이 답했다.

“아르투르 공께서는 진정으로 저희 자신의 안녕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워주셨고,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 한 채 저희를 보호해주셨습니다. 저희의 투정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오직 부모만이 이런 조건 없는 호의를 베풉니다. 그러니 아버지 말고 달리 어떤 칭호가 가능하겠습니까? 이제부터 공께서는 이곳을 아들이라고 여겨주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고 말씀해주십시오. 아들이 아버지를 돕듯이 효심으로 돕겠습니다. 제게도 공께서는 제 아버지나 다름없으십니다.”

아르투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병사들의 외침을 듣다가, 크게 웃어버렸다.

“하하하하하하하! 이 친구야, 자네는 내 삼촌만큼 나이가 많은데 그런 말을 듣긴 민망하구만.”

“가장이란 가정을 보호하는 자이지, 나이가 많은 자가 아니니 말입니다.”

아르투르는 이들의 사고방식에 어이가 없어서, 혹은 기뻐서 그냥 웃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바라봤다. 이들도 자신의 또래, 혹은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에렌을 보고 말하는 것보단 훨씬 거부감이 덜했다.

“나의 아들들이여!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혈육의 연을 맺지는 않았지만, 전장에서 피를 함께 흘린 혈육들이다! 너희가 나를 아버지로 모시니, 나 역시 너희를 자녀들로 대하겠노라!”

“와아아아아아아아 - ! 구세주께서 왕자님을 보우하실 겁니다!”

“두라노의 영원한 영웅, 영원한 아버지이신 아르투르 공 만세!”

“저희가 그동안 했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십시오!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르투르는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이곳에 쭉 머무르고 싶을 것 같아, 허벅지 힘으로 에쿠잘루스르 재촉했다. 아르투르의 행렬이 질풍처럼 도시를 빠져나가는 가운데, 모든 도시의 사람들이 하나 되어 외쳤다.

"아르투르! 아르투르! 아르투르! 국가의 아버지이시자, 존엄한 분이시여!"

아르투르는 도개교를 건너 도시를 빠져나오고 나서도 한참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에겐 나아가야 할 여정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 케이는 존경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보았고, 카밀 조차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어안이 벙벙해보였다. 레오폴트는 뿌듯함과 질투심, 경탄이 뒤섞인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한참을 달리고 나서 도시를 돌아보자, 두라노는 회색의 점으로 보였다. 들판에는 추수중인 농부들이 보이고,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벌써 한 해가 끝나가는 가을인가.’

자신은 겨울에 와서 가을에 떠나고 있었다. 두라노에 머무른 시간은 일 년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했다. 처음에 본 시민들의 표정은 어둡고 우울했지만 지금은 밝고 희망찼다. 증오에 가득 차 죽지 못해 살던 이들이, 정신을 추슬러서 나은 삶을 위해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이 시체의 산을 넘어가며 싸워온 이유가 이것은 아니었을까.

‘후회되는 결정도, 불가피한 희생이란 명목 아래 눈감았던 죽음도 너무나 많았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던 것 같은 시련들도 있었지. 도망쳤더라면 훨씬 쉬웠겠고, 명예를 저버렸다면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랬더라면, 지금 느끼는 가슴을 울리는 고동은 느끼지 못했을 터이다. 생전에 느껴본 적 없던 고양감이 아르투르의 몸을 타고 흘렀다. 자신은 모든 유혹과 시련을 이겨낸 이 끝에, 진정으로 원하던 것을 얻었다.

이 성취감은 누구도 느낄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었으며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보물이었다.

‘하지만 두라노에서 끝나서는 안 돼.’

여전히 지평선 너머로 대지가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어디선가는 갖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서로를 증오하며 죽여대고, 말하기 끔찍한 짓들을 했을 터이다. 세상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평화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두렵지 않았다. 불가능할 것 같은 압박도 느끼지 않았다. 두라노만큼 꼬여있던 도시를 구원한 이상, 다른 곳들은 더욱 쉽게 해낼 자신감만 솟아났다.

‘에쿠잘루스를 길들인 이후 나는 어떤 짐승도 두려움 없이 다루게 법을 익혔듯이, 이 세상의 어떤 분쟁이고 그렇게 끝낼 자신이 생겼어.’

여전히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질서의 성립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선 수많은 난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러나지도, 피하지도, 꺾이지도 않으리라. 세파가 얼마나 매섭건, 자신은 그 끝에 있는 목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찾아낸 진정한 명예요, 기사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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