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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19화 (11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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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라이데는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양손을 아래로 내린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저와 결혼해주셨으면 해요. 파혼은 가주인 제 의사와는 관계없이 어머니의 독단으로 결정된 거랍니다. 그러니, 저희는 여전히 혼인을 맹세한 사이랍니다. 공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말을 마친 아델라이데는 초조한 태도로, 두려움을 담아 아르투르의 표정을 바라봤다. 아르투르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표정을 수습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백작. 당신 어머니는 현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파혼만큼은 잘한 결정이었소. 나는 당신의 사촌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왕국의 법도를 깨뜨린 거요. 그대의 주군이자, 내 이복형인 루이스 대왕은 나를 왕실에 대항한 반역자로 규정하고 법정에 출두할 것을 명하신 바 있소. 그러니, 아직 혼인 관계가 이뤄지지 않은 지금이 낫소. 이 결혼은 서로에게 독이 될 거요.”

그러나 어느새 필사적인 목소리로 항변하는 아델라이데였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남들의 시선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답니다! 제 남편은 오직 아르투르 공뿐이에요! 누가 뭐라고 하면 다 죽여 버릴 거예요. 왕자님도 그렇게 하실 수 있잖아요!”

아르투르는 뒷골이 당기고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 알았다. 지금 아델라이데는 책임감 있는 대가문의 영주가 아니라, 첫 사랑에 눈이 먼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형편없는 판단력을 보일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열네 살 짜리소녀가 첫 사랑 앞에 보이는 게 있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터이다. 아르투르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아델라이데는 쉬지 않고 말해왔다.

“저는 아르투르 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답니다! 정, 제 영지가 걸리적거리거든 말만 하세요. 버리고 아르투르 공을 따라갈게요. 네?”

그쯤 되자 아르투르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단호한 목소리로 손을 내저었다.

“그만. 그쯤 하시오. 위르마넨 가문은 굉장히 유서 깊은 가문이란 말이오. 당신의 조상인 위대한 전사 군주들이 당신의 말을 들으면 통탄할 것이오.”

“그런 건 저한테 아무 상관없다니까요!”

아르투르는 깊게 한숨을 쉬더니, 이번에는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컨대, 제발 말을 멈춰주시오.”

그러자 방금까지 성내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게, 그녀는 고분고분히 말을 따랐다.

“오늘, 그대가 했던 말들은 철이 들고 나면 밤중에 이불을 차며 후회할 말들이오. 영주의 의무는 무겁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당신의 등만 보면서 살고 있단 것을 잊지 마시오. 보다 책임감 있게 행동하시오.”

아델라이데는 완전히 울상이 되었고, 위르마넨 가문의 기사들은 기겁하며 소란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을 내쫓았다.

“다, 다들 물러가지 못할까! 무슨 구경이라도 난 줄 아느냐! 썩 꺼져라!”

자신들의 주군이 남들 보는 앞에서 남들 앞에서 울며불며 짰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녀를 모시는 자기네 위신까지 떨어질 판국이었다. 기사들 사이에선 놀림감이 되고도 남을 일이다.

“아르투르 공. 저는 지금 진지하다니까요.”

“진정하고 말하시오. 그대는 지금 봉신들의 앞에 있잖소. 같은 말을 하더라도 훨씬 영주답게, 위엄 있게 말할 수 있소.”

아델라이데를 바라보는 알튼 남작은 굉장히 딱한 표정이었다. 딸아이를 기르는 아버지로서, 또 대를 이어 모셔온 가신으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제대로 된 보호자만 있었다면 그녀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르투르 공의 말씀이 맞습니다. 백작 각하의 연심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위르마넨 가문의 역사가 각하의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남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연심에 호소하는 일은 평민 소녀들에게나 허용된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수십만 백성들의 영도자이자, 기사들의 주인이십니다. 항상 강인한 모습을 보이셔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말이 쉽지, 자신도 아델라이데 또래의 딸을 기르는 입장에서 소녀들에게 예의 바른 행동을 가르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다그치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 분은 고귀한 피를 타고 나셨고, 무엇보다 군주이시지. 약하게 보였다간 휘하의 사람들은 물론, 본인부터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어. 봉신들은 기어오르고, 이웃 영주들은 호시탐탐 침공할 기회를 노리게 둘 순 없다. 이게 옳아.’

아델라이데는 자신의 보호자 격이라고 생각하는 두 기사들의 엄격한 꾸지람을 들으며 감정을 다스렸다. 하릴 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손수건을 받아 훌쩍이다가, 마침내 조금 진정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제가 진지하다는 걸 증명하면 받아주실 건가요? 어린 아이의 치기가 아니라, 진지하게 여자로서 아르투르 공을 좋아하는 거 라면요?”

아르투르는 워낙 난처한 상황이어서 자리를 곧 바로 뜨고 싶었지만, 워낙 그녀의 눈빛이 애처로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신이 나이가 차고, 영주로서 자각을 갖춘 뒤에도 나와의 혼인을 원한다면 그때는 진지하게 고려해보겠소. 그러니, 제발 영주다운 체통을 지키시오. 사람들이 지금 있던 일을 듣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거요!”

아르투르의 말에 아델라이데는 다시 화사한 표정으로 방긋 웃었다.

“네! 알겠어요! 영지도 잘 다스리고,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올게요! 그 때는 아르투르 공도 절 다시 봐주시겠단 거잖아요! 여자의 몸으로 영지를 다스리는 일은 언제나 버겁고, 저는 아르투르 공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잊지 마세요! 제발 돌아와 주세요. 어머니가 못한 몫만큼 제가 잘할게요. 네?”

아르투르는 갈수록 난처한 표정이 되어가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아니오. 그대는 내 보호가 필요하지 않소이다. 강하게 크시오. 백작. 당신의 아랫사람들에게 항상 사랑과 관용을 베풀고, 그들에게 의존하시오. 하지만 그들에게 휘둘리진 마시오. 그러면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당신들을 보호해 줄 거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거죠?"

“그런 문제가 아니오. 나는 지금 누구와 혼인을 약조할 상황도 아니고, 책임 질 수도 없소.”

그러자 아델라이데는 다시 방긋 웃었다.

“싫단 소린 끝까지 안하시네요! 좋아요. 제가 아르투르 공에게 어울리는 신붓감이 되면 절 다시 봐주시겠죠. 세상 어느 여자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면 그땐 안아주시겠지요. 제 모든 선조들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니, 아르투르 공을 제외한 누구의 구혼도 받지 않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언제든지 돌아와주세요.”

아델라이데는 방긋 웃고는, 억지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뒤로 돌아섰다. 아르투르는 헛기침을 했다. 기사들이 곧 아델라이데의 뒤를 따랐고, 알튼 남작은 떠나기 전에 아르투르에게 다가와 말했다.

“도파뉴 인들은 모두 공의 통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돌아와서 저희의 주군이 되어주신다면 모두가 영광으로 여기며 환영할 것입니다.”

아르투르도 그제야 표정 관리를 해내서,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말씀은 고맙소. 남작. 돌아가서 백작을 잘 보필하시오. 아직 경험이 부족한 터라 그대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거요. 때가 되면 늠름하고 용맹한 남편을 들일 수 있게 도와주시오.”

알튼 남작은 쓴 웃음을 지었다.

“잔인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르투르 공. 제가 볼 때 백작 각하가 공에게 품은 연심은 단순히 어린 아이의 첫 사랑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인연은 신께 달린 것이지,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무엇을 하시건 가시는 길에 영광이 따르길 빕니다.”

알튼 남작은 고개를 숙이며 떠났고, 아델라이데는 멀어져서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그리운 눈길로 아르투르를 돌아보곤 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끝을 모르는 욕망과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레오폴트는 한 없이 키득거렸다.

“낄낄낄. 저 아가씨, 너한테 완전히 빠진 모양인데. 받아들이지 그러냐? 얼굴도 굉장히 반반하고, 좀만 크면 몸매도 봐줄만하겠는데. 게다가 집안과 영지도 저만하면 최고는 아니여도 훌륭하고. 평생 네 말 잘 따를 것 같은데, 저만한 신부 구하기 힘들걸?”

아르투르는 짜증스럽게 답했다.

“사랑 때문에 물불 안 가리는 건 소설에서 볼 때나 좋은 거지, 현실에서 그럴 짓은 아니야. 알잖냐. 우리 같은 사람들 결혼 한 번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거.”

“흐음. 여자 좋아하는 네가 웬일로 그리 냉정하냐? 뭐 맘에 안 드는 거라도 있나본데.”

“시끄럽다. 그렇게 좋으면 네가 데려가든가. 집안 좋은 미녀들이 제발 한번만 안아달라고 끝없이 편지를 보내는데 씹고 지내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레오폴트는 뭐가 재밌는지 계속 낄낄거렸다. 케이는 아델라이데를 아주 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카밀 아저씨, 저런 것 보면 귀족 나리들도 우리랑 별 다를 바 없는 인간 같지 않아요?”

하지만 케이의 예상과 달리 카밀은 아무런 감흥도 보이지 않은 채 묵묵히 장검만 닦고 있었다.

“아니, 그들과 우리가 다른 족속이란 것만 뼈저리게 체감이 된다만.”

케이는 카밀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은 아르투르와 헤어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친밀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아, 또 삭막하게 그러신다. 아저씨. 마스터가 좋은 귀족이듯이, 저 사람들도 나름대로 삶의 고충이 있잖아요.”

“누나의 결혼을 한 달 앞두고 기근이 든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귀족들은 성으로 도망쳐서 문을 걸어 잠근 뒤 병사들과 식량을 독점했지. 우리는 사람 시체마저 뜯을 지경이었는데 말이야.”

케이는 잠자코 카밀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것 아나? 기근이 들면 마을들을 돌아다니는 무장한 상인들이 있다. 사람을 사는 거지. 평소라면 교회가 지탄하겠지만, 기근 앞에선 성직자 나리들도 어쩔 수가 없거든. 그래서 내 누이는 밀 한 포대, 은전 한 닢에 자길 팔고는 비싼 값을 받았다며 좋아하더구나. 나를 불러서 누나의 마지막 선물이라며 은전 한 닢을 꼭 쥐여 주고는 담담히 상인들을 따라갔지. 어차피 누이는 안거야. 기근이 들면 누군가는 굶어 죽을 거고, 아버지는 자길 먼저 버릴 거라는 걸. 그럴 바에야 팔려가서라도 연명하는 게 낫다고 본거지.”

카밀은 아무런 감정 없는 척 무뚝뚝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케이는 그 속에 억눌린 한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걸 두고 귀족들을 원망하진 않는다. 식량이 부족하면 가까운 이부터 살리는 건 당연한 이치다. 나도 그랬을 거야. 아버지도 원망하지 않아. 어차피 누나는 시집 갈 사람이었고, 노동력이 될 아들들을 먼저 지키는 게 이치에 맞겠지. 그냥, 원래 우리 민초들의 삶이란 그런 거다. 너는 운이 좋게 위로 올라갈 사다리를 구했으니 타고 올라가거라. 하지만, 가서도 우릴 잊지 말아다오.”

케이는 활짝 웃었다.

“그럼요. 마스터가 나라를 세우면 저도 한 자리 주실테니, 꼭 그렇게 만들어볼게요!”

“아르투르 공이라고 별 다른 수가 있을 것 같진 않다만, 네 기개만은 계속 되길 바란다. 자기 처지가 좋아지면 옛 친구들을 금방 잊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어.”

케이는 활짝 웃으며 카밀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요. 맹세할게요. 제가 농민 출신인 걸 잊지 않겠다고. 기사가 되고서도 그들을 위해서 일하겠다고요.”

그 날 이후로, 케이는 훈련에 이전보다도 훨씬 진지하게 임했고, 남는 시간에는 글을 배우는데 집중했다. 고위 귀족의 종자로 일할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었다. 그러니, 결코 허투루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될 터이다.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들에게만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스터를 더 잘 보필하기 위해서라도, 지금보다 더 훌륭해져야만 해. 완벽한 분이 아니니까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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