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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 계급은 완곡하고 중의적인 표현을 선호했다. 정치적 책임을 지기 싫어서였다. 아르투르가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궁중에서 생활하려면 반드시 배워야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제 계급은 정도가 좀 심했다. 차마 눈 뜨고는 보기 힘든 것이다.
‘친애하는 영적인 아들, 아헨의 아르투르 공에게 천국의 문지기 우르술라 2세가 진심 어린 안부를 전하오.’
“내가 천국 가는 열쇠를 쥐고 있음을 잊지 말거라, 어린 양아.”
‘그대가 명예를 알고 신의 뜻을 귀이 여길 줄 아는 소문이 대륙 방방 곳곳에 퍼지고 있소, 본인은 곳곳의 사제들로부터 공의 미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소.’
“너 좀 유명해졌더라고.”
‘그런데 최근에, 평신도들이 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영적인 아들인 그대에게 사도들의 뜻을 받들 영광을 내리노니, 서둘러 성도로 와서 구세주의 명을 받들라. 구체적인 내용은 내가 직접 그대를 보고 말해주겠다.’
“최근에 문제가 생겼는데,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무슨 내용인진 말해줄 수 없으니, 오면
말해주마.”
아르투르는 팔을 괸 채로 삐딱한 표정으로 교황의 서신을 모두 소리내어 읽었다.
“뭐, 대충 이런 뜻이다.”
케이는 아르투르의 말을 들으며 혼란스런 표정이 되었다.
“교황 성하께서는, 저희들의 영적인 아버지이자 천국의 인도자가 아니시던가요?”
아르투르는 계속 냉소적인 표정이었다.
“아마도 맞을게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장황한 편지를 쓸 수 있는 학자이자 말발만으로 사람들을 움직여서 권력자의 자리에 있는 노련한 군주고.”
아르투르는 두루마리를 케이에게 건네주었고, 케이는 그것을 둘둘 말아서 넘겨받았다. 교황이 보내는 서신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교황은 아르투르의 행보를 처음부터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고 한다. 도파뉴, 하이에버, 두라노에서 모두 말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다만, 방법이야 많았을 것이다. 사람이 있는 곳이면 빠지지 않는 게 교회이며 모든 백성들이 교회의 신도가 아닌가.
“지금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긴 모양인데, 그걸 도와달라는 거구만. 혹은 그런 구실로 날 불러서 음모를 작당할 생각인 모양이네. 교황이 날 끌어들여서 같이 작당할 음모가 뭐가 있지?”
서부 대륙에서 교회의 군사력은 영주들보다 약할 지언 정, 그 군사력을 휘두를 수 있는 명분을 가진 무시 못 할 세력이었다. 그들은 불경한 행동을 하는 영주들에게 신도의 자격을 박탈하는 파문의 형벌을 내리곤 했다. 그러면 그의 부하들과 동맹 세력은 “합법적으로” 그와의 관계를 단절할 수 있었다. 강력한 대영주조차 교회와 맞서다가 몰락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거기에 사후의 구원을 바라며 행하는 막대한 기부금까지 포함하면 그 영향력은 어지간한 왕들조차 뛰어넘는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리라.
아, 물론 권력과 부가 있는 곳에는 항상 정치가 끼어들기 마련이었다. 왕실에서 자란 아르투르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성직자들의 화려한 말솜씨와 경건한 행동 뒤에는 정치적 고려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고위 성직자일수록 그랬다.
“어……설마, 교황 성하께서 그런 세속적인 이득을 노리고 마스터를 부른 거겠어요? 진짜로 순수히 도움이 필요하신 건 아닐까요?”
물론 아르투르처럼 교회를 권력 다툼의 일부로 간주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군대 없이도 힘을 가지고 있던 것이고.
“케이, 너희 마을에도 사제님이 있었겠지?”
“아, 그랬죠. 별로 훌륭하신 분은 아니었어요. 글도 더듬더듬 읽고, 틈만 나면 술만 진창 드시면서 내가 뭘 잘못해서 좌천되었냐면서 혼자 중얼거리셨죠. 물론 종교 행사를 치르실 때나 기도를 드리실 때는 정말 경건한 분이 따로 없었지만요.”
“중요한 건 그거다, 종교 행사를 할 때나 사제지, 평소에는 별 다를 바 없다는 걸 느꼈을 거다. 교황 성하도 마찬가지다. 그냥 너희 동네 사제님보다 훨씬 더 힘이 있고, 많이 배운 사람일 뿐이다. 사제들의 역할은 존중 받아 마땅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훌륭하고 신성한 이들은 아냐. 우리와 같은 욕망을 가진 인간이지.”
다만 규모가 달랐을 뿐이다. 한 명의 사제가 고작 하나의 마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교황은 서부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아르투르가 보기엔 그들도 왕이나 영주들 같은 하나의 권력자에 불과했다. 고귀한 혈통 대신 신의 대리라는 점을 앞세우고, 검을 든 기사 대신 복잡한 책을 읽는 수도사들로 이뤄진 행정 조직을 이끄는 권력자.
“우리 서부 대륙에 존재하는 계급을 간단히 나눠보자면 셋이다. 싸우는 자, 기도하는 자, 일하는 자. 간단히 봐라. 왕들이 싸우는 자들의 대표라면, 교황 성하도 단지 기도하는 자의 대표일 뿐이다. 그분이 스스로를 뭐라고 포장하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케이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답했다.
“알겠습니다.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 같네요.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어요. 싸우는 자인 기사들은 왕들이 대표하고, 사제님들은 교황 성하와 주교들이 대표하는데, 왜 대부분의 사람인 농민은 대표자가 없죠?”
아르투르는 갸웃했다. 그런 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이다. 사실 그는 군사 공부 외의 학문은 썩 좋아하지 않았고, 딱 시키는 만큼만 했던 터였다.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굳이 따지자면 자유 도시가 아니겠느냐. 힘 있는 농민들이 돈 좀 만지면서 세우는 게 도시니까. 아무튼, 교황청도 뭔가 노림수가 있어서 날 부르는 것인데…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사생아인 내 지위를 복원시켜서 형님에게 대항하게 하는 걸 텐데, 그러기엔 내가 출신 성분이 너무 좋지 않다.”
교회의 법률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서부에서 사생아가 가문의 일원으로 합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교황이 예외를 승인하는 경우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고, 아르투르처럼 어머니가 이교도인 경우에는 아예 전례가 없었다.
“잘 생각해보니 나쁘게만 볼 필욘 없겠군. 교회의 역할은 신자들을 보살피는 것이니, 필요하다면 정치에도 개입할 권리가 있겠지. 권력자들과 소통을 유지하는 것도 당연한 걸 테고.”
기사 계급에서 자란 아르투르는 사제들을 마냥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역할과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었다. 교회의 제지와 적극적인 계도가 없었다면, 힘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진 영주들이 서로를 죽여대며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이교도들이나 가질 법한 사악한 생각이었다.
“문제는 가끔 성직자들 가운데 본분을 잊고 정치에 과하게 간섭하는 이들이 있다는 거지. 이번 교황 성하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군. 직접 만나보면 알 테지.”
어차피 자신도 권력을 잡기로 마음먹은 이상, 교회와의 제휴는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손해를 보기만 하는 일은 아닐 터이다. 교황청은 원래 가려던 경로와도 겹치는 장소에 있었다. 아발로니아로 떠나려면 레무리아 남단에서 배를 타야했는데, 교황청은 내려가는 길목에 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 행선지는 교황청으로 정해졌다. 내일 오후에 출발할 테니, 짐들 꾸리고 정든 사람들이 있으면 인사들하고 오도록.”
케이는 휘파람을 불며 펄쩍 뛰었다.
“이야호! 제가 교황청을 다 가보는 군요! 유서 깊은 성도는 어떤 곳일지 궁금합니다!”
카밀은 고개만 끄덕이고 짐만 꾸렸다.
“자네는 성도로 간다는데 기쁘지 않은가?”
아르투르의 물음에 카밀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제 놈들이나, 귀족들이나 한 패이지 않습니까? 순진한 농민들에게 고분고분히 귀족들의 뜻을 따르는 게 신의 말씀이라고 구라치는 놈들이 그놈들인데요. 그런 게 신이라면 엿이나 먹으라고 하지요. 저는 주군 외엔 아무도 안 따르고, 안 믿습니다.”
아르투르는 카밀의 말에 그냥 웃고 말았다. 어디 가서 말했다간 참수를 당해도 할 말이 없는 불경한 말이었지만, 그걸 모르지 않는 노련한 자가 저렇게 말하는 건 속내를 털어 놓을 만큼 자신을 신뢰한다는 이야기였으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이 복잡한 도시 정치판을 떠나는군.’
자신은 두라노에 일 년 넘게 머무르면서 온갖 일에 개입해왔었다. 이제 이 도시에 제법 정도 들었지만 슬슬 싫증이 나던 차에, 새로운 모험을 떠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아르투르의 마음도 가벼웠다.
***
아르투르의 새로운 행선지가 정해질 무렵, 다른 이들도 인사를 남긴 채 각각 자신의 길로 떠났다. 변경 영주들은 두둑한 전쟁 배상금을 받은 뒤, 흡족한 기분으로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다.
“와줘서 고마웠다. 네게 진 빚이 정말 많군. 레오폴트.”
레오폴트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사촌 형제를 껴안았다.
“천만에. 우리 사이엔 어떤 빚도 없다. 아르투르. 우린 서로의 마지막 날까지 서로를 돕자고 맹세했던 사이가 아니더냐? 가족이, 형제가 서로를 돕는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순간만큼은 아르투르도 환히 웃으며 그를 얼싸 안았다. 그와 모든 면에서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으며, 존중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하고 레오폴트와 그의 기사들이 말에 올라 떠나려고 할 때, 군중 속에 있던 사내가 불쑥 튀어나와 봉인된 두루마리를 레오폴트에게 건넨 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아르투르는 그것을 누가 보냈는지 직감했다.
‘삼촌께서 또 뭔가를 보내셨나본데.’
레오폴트는 밀랍의 봉인을 풀어 서신의 내용을 읽은 뒤 돌돌 말아서 화톳불에 넣어 철저히 태워버렸다. 오직 잿가루만 남을 때까지 말이다. 레오폴트는 말머리를 돌려 아르투르에게 돌아왔다. 방금까지 쾌활하게 웃고 있던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해졌을 뿐더러, 근심까지 느껴졌다.
“아르투르, 네가 교황청으로 간다고 했던가?”
“그렇다만?”
“함께 가지. 나도 교황청에 가야 할 일이 생겨서 말이야.”
아르투르는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왕가의 내전과 관련된 일로 생각되었지만, 때가 되면 레오폴트가 이야기 해주리라 생각하며 넘겼다. 이유가 무엇이건, 레오폴트가 함께 가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와 자신은 떨어질 수 없는 친형제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여러 사람들이 잇달아 방문하며 아르투르와 작별 인사를 하는 가운데, 아직 떠나지 않았던 아델라이데 백작이 아르투르를 먼저 찾아왔다. 한껏 아름다움을 뽐내는 차림새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영지로 떠나는 먼 길을 가야하는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왜 저러고 왔나 모르겠군. 뭐, 백작이 알아서 하겠지.’
드레스의 양 끝자락을 들어 올려 보이는 아델라이데 백작.
“안녕하세요. 아르투르 공.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답니다.”
아델라이데 백작은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승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레오폴트와 더불어 이번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병력 손실을 좀 보긴 했지만, 영토가 두 배 가까이 늘었던 까닭이었다.
“어서 오시오. 아델라이데 백작. 영지를 관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텐데, 군대를 이끌고 나를 직접 도와주러 오셔서 고맙소. 당신이 어려움에 처하면, 나도 동일한 도움을 제공하겠소. 이번 일로 우린 진정한 친구가 된 겁니다.”
아르투르가 악수를 청하자 아델라이데는 활짝 웃었다. 친구라는 말에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바뀌긴 했지만.
“공께서 저와 제 가문, 영지를 모두 구해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도움이랍니다. 아르투르 공께서 원하시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씀해주세요. 뭐든지. 다 들어드릴게요! 저한테 바라시는 건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아델라이데는 기뻐하며 기대 어린 눈빛을 아르투르에게 보냈고, 아르투르는 알 수 없는 부담감을 느끼며 살짝 헛기침을 했다.
“고맙소. 백작. 도움이 필요한 때가 되면 요청하겠소. 당장은 요청 할 것이 없으니 상호 간의 호의는 호의로 남겨둡시다. 난 약속한 것은 지키는 사람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아델라이데는 아르투르의 말을 설렌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예상한 대답이 아니자 실망스런 표정으로 풀이 죽었다.
“저기, 아르투르 공. 그렇다면 제가 지금 당장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아델라이데는 고개를 흔들더니, 마음을 굳게 먹고 아르투르의 눈동자를 또렷이 바라봤다.
“말씀하시오. 듣고 있으니.”
“파혼을 무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