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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어라. 베르나르도.”
베르나르도는 고개를 들어 진심 어린 충성심을 가장한 눈빛을 아르투르에게 보냈지만, 아르투르는 그저 피식 웃었다.
“너는 전쟁 중에 우리를 배신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왜 그랬느냐?”
“주군에 대한 제 충성심은 진심입니다.”
“베르나르도, 너는 영리하지만 아직 경험이 더 필요하겠구나. 존경하던 아버지의 원수를 진심으로 따른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있겠다고 생각하느냐? 진심을 말해보아도 좋다. 내 명예를 걸고 네 안전을 보장하마.”
베르나르도는 머뭇거리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확실하지 않은 일에 저와 제 지지자들의 목숨을 걸 수는 없었지요. 어차피 피오렌치아 역시 저희 입장에선 외적이었을 뿐이기도 하고요.”
“너를 따르는 이들의 신변을 걱정하는 건 좋은 자질이구나. 잃지 마라. 날 등 뒤에서 몇 번이고 찌르고 싶었겠지. 순간적인 충동을 이겨내고,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한 것 역시, 좋은 미덕이다. 이제 너에 대한 처우를 확정하겠다.”
일순간, 회의실에 정적이 돌았다. 각자 다른 이들이 서로의 기대를 담아 아르투르의 입을 바라봤다.
“네 어머니와 함께 두라노를 영원히 떠나거라. 전쟁 수행에 협조해준 공적으로, 가문이 모아둔 재산을 가지고 떠나는 것을 용납하겠다. 몰수된 금액은 두라노 몫의 전쟁 배상금에서 지불하겠다. 네 지지자들에게도 재산을 돌려받고 자유롭게 떠날 권리를 주겠다. 이주비용이 부족하다면 두라노의 이름으로 돕도록 하마. 단, 머무르기로 한 이들은 충성을 공화국을 향해 바쳐야할 것이다. 이의가 있느냐?”
“없습니다. 공정하신 처분이십니다.”
베르나르도가 재차 몸을 숙이며 아르투르의 판결에 경의를 표했을 때, 시라노는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오랫동안 참주 가문과 싸워왔으니 당연한 일일 터.
“이번 조치에는 많은 시민들이 불만을 가질 겁니다.”
“베르나르도는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긴 너무 어렸고, 두라노의 전쟁 수행에 협조해서 공을 세웠으니 그에 걸맞는 보상은 내렸을 뿐일세. 두라노 인들이 뭐라고 하건, 지금의 독재관은 나고 결정은 변하지 않을 걸세.”
“하지만… ”
아르투르는 골치 아픈 듯 손을 내저었다.
“루드비코 잔당의 처리는 이쯤에서 마무리하지. 거듭 말하지만 나는 내가 믿는 대의를 위해 싸웠지, 두라노 인들의 바램을 들어주고자 싸운 건 아니네. 루드비코 지지자들에 대한 처우는 더 이상 논하지 말게. 다뤄야 할 것이 많네.”
결국 이런 일은 어떤 길을 택하건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에야, 곧 떠날 사람인자신이 확실히 매듭을 짓는 게 나은 미래를 위한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혁명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조레스나 에렌에겐 사전에 동의를 받은 터였다. 그들은 평화를 원했고, 이런 식으로 참주파와의 악연이 끝난다면 재산 반환은 싸게 먹히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 외에도 아르투르는 두라노에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여러 조치를 내렸다. 반발하는 자들이 적지 않을 조치들이었지만, 이미 두라노에서 아르투르의 권위는 어떤 불만도 잠재워버릴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는 우선 부유한 자들이 의무적으로 재산을 각출해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했다. 이를 거부 할 시엔 도시를 떠나야만 했다.
“참주정의 대두는 빈부 격차 때문이었다고 하더군. 부자가 빈자를 돕는 의무를 게을리하여 벌어진 일이니 이를 본보기로 삼아 다시는 그런 일을 피하도록 해라.”
상공업에 종사하는 의원들은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독재관 각하, 이런 조치는 자유 도시의 이념에 어긋나는 것으로…”
“옛 공화국의 멸망을 다시 겪고 싶은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방법뿐이다. 놀라지마라. 이 조치가 끝이 아닐 테니.”
아르투르는 그 뒤로도 자유 도시의 전통에 어긋나는 법령들을 선포했다. 정치가들이 사람들을 선동해 정부를 전복하려 들 수 있으니 허락 없이는 광장에서의 연설을 금했으며, 참사회의 몇몇 직위는 선거가 아닌 세습을 통해 이어지도록 했다. 세습직 의원에는 에렌과 조레스를 비롯해, 전쟁 수행에서 공을 세웠던 유력자들이 들어갔다. 우물쭈물대던 의원들도 이번만큼은 제 목소리를 내었다.
“이 조치는 사실상 두라노 공화국의 종말입니다. 독재관께서는 정말로 새로운 참주가 되시려는 겁니까?”
그들은 지식인들이나, 옛 저항군 출신의 투사들이었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그들에게도 단호히 답했다.
“요동치기 마련인 민심에 휘둘리는 선거보다는 뼈대 있는 가문들이 세습하는 쪽이 훨씬 안정적이다. 그리고 내가 참주가 될 거라는 그 허무맹랑한 헛소리는 그만하지 않겠나?”
아르투르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짜증이 묻어났다. 아르투르는 두라노에 머무르는 내내 그들의 전통을 존중해주고자 했지만, 항상 은혜를 잊고 성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까진 그들을 배려했지만, 곧 떠날 마당에 그럴 이유도 없었다.
“간단히 말하겠다. 내가 두라노를 원했다면 오늘부터 내가 영주라고 선포한 후 너희들을 모조리 잡아가두면 그만이다. 당장 너희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을까? 나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을까 생각해봐라. 그리고 내게 너희들의 전통을 파괴할 것이냐고 따지기 전에 내게 입은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먼저였겠지.”
이 도시에서 머무르면서 아르투르가 뼈저리게 체감한 것은 선의가 반드시 선의로 보답 받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특히 권력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왕이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전처럼 좋은 게 좋은 식이라며 넘어가진 않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독재관님의 조치라고 한들, 이런 폭정은 시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어디 그런가 볼까?”
다음 날, 새로운 법령이 포고되자 시민들은 격분하며 폭동을 일으킬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법안의 선포자가 아르투르라는 것이 전해지자, 대부분 얌전히 집으로 돌아갔다. 아르투르 공께서 그렇게 정하셨다면 다 타당한 뜻이 있을 것이라는 여론이 주류였다. 시류에 밝은 사람들은 씁쓸해했지만, 시대의 흐름이라며 받아들일 뿐이었다. 결국, 아르투르의 반대파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피오레 가문과 내통한 옛 혁명군 장교들은 도시의 해방자이기도하고, 동시에 반역자이기도 하지. 그들의 처우는 내가 떠난 뒤 너희들 스스로 정해라. 이것으로 너희가 요구한 독재관의 의무는 모두 수행했다.”
말을 마친 아르투르는 다음 국가 원수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하며, 자신은 이 시간 부로 독재관을 사임하겠다는 칙령에 작성했다. 조레스를 비롯한 일부 두라노 인들은 그가 남아서 도시를 이끌어주길 청해왔다.
“제가 맨 처음 공을 주군으로 모시고 싶다고 했을 때, 이 모든 일이 끝나고도 그렇게 한다면 받아주시겠다고 하셨지요. 저는 여전히 아르투르 공께서 계속 남아서 다스려주시길 원합니다. 이름이 무엇이 되었든 좋습니다. 독재관이건, 참주건, 왕이건,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저를 따르는 무리들이 수만 명은 됩니다.”
그런 조레스를 보며 아르투르는 미소를 지은 후, 손을 내저었다.
“자네들의 말은 고맙네. 하지만 나는 두라노의 왕이 되진 않을 거야. 도시라면 진저리가 나더군. 음모가 판을 치고, 명예도 중요시여기지 않는 이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네. 솔직히 말해 나와는 공기가 맞질 않아. 자유 도시에서 자란 자네들에게, 충성과 복종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십시오. 두라노가 재건되면 대영주들도 부러워 할 만큼 권세 있는 도시가 될 것이고, 저희도 은혜를 아는 이들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존경받을 수 없는 땅에서 군림하진 않을 걸세. 자유 도시들은 변덕스러워. 이런 선과 악이 뚜렷하지 않은 땅은 내가 잘 다스릴 자신이 없네. 그럼에도 나를 섬기고 싶은 자들이 있다면, 두라노를 재건하며 때를 기다리게. 내전으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갈등은 봉합하는 일이 우선이고, 자네가 그 주역이 되어야 할 걸세.”
아르투르는 조레스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고, 그제야 그도 환히 웃었다.
“알겠습니다.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르투르 공께서 힘을 써주시지 않았더라면 두라노는 결코 이 어두운 시간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잠자코 비켜보던 에렌도 끼어들어 고개를 깊이 숙인다.
“저와 두라노, 제 가족들 모두 공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마음 깊숙이 감사드립니다. 공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저희는 광장의 한복판에 아르투르 공의 동상을 세우고 싶습니다.”
아르투르는 잠시 고민하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게. 내게는 더 없는 영광이군. 단, 경제가 회복되고 굶주리는 이들이 없어진 이후에 한다는 조건일세.”
“항상 아래 사람들을 먼저 살펴봐주시는 아르투르 공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기사이십니다.”
에렌을 시작으로 의회의 대부분의 의원들이 아르투르에게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동시에, 일부 의원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의회를 떠나거나, 고개를 돌린 채 울먹이고 있었다. 그들이 알고 있던, 두라노의 민주정은 사실상 아르투르의 손아귀에 통째로 넘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르투르는 그들의 사상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들이 믿는 바를 위해 쉬지 않고 싸워온 일은 존중하고 있었기에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독재관의 관저를 나갔다.
두라노 역사의 한 시대가 저물고, 다른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
독재관 자리에서 물러난 아르투르는 자신의 오랜 동료들과 함께 두라노에서 느긋이 휴식을 취했다. 케이와 카밀이 항상 그의 뒤를 따랐다. 아델라이데 백작 역시 아르투르의 눈치를 보며 따라왔고, 그녀의 기사들도 아르투르를 흠모하고 있었다. 레오폴트는 군사들을 정비하고 재보급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어 자주 보지는 못했다.
“마스터, 도시들은 다 이렇게 큰 건가요?”
케이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르투르도 간만에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두라노는 자유 도시 가운데서도 큰 편이다. 규모로만 보면 왕국의 수도인 아헨보다도 클 거야. 이곳의 진짜 특이한 점은 왕이 없다는 거지.”
“에헤, 제가 볼 땐 그것도 옛 말 같은데요. 다들 마스터만 보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센걸요.”
케이는 거리를 지나치고 축제에 참가할 때마다 마주치는 모든 풍경을 눈에 담았다. 거대한 상업 도시는 양치기 출신의 종자에게 그 자체로 큰 자극을 주고 있었다. 어느 사이 그의 세계는 산골 마을을 벗어나, 드넓은 도시와 왕국들을 품은 넓은 모습을 담고 있었다.
‘무엇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뭉치게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창칼만으로 이룰 수 있는 위업은 아닐 거야.’
케이는 이때 문뜩 떠오른 생각에 깊게 빠져들었다. 그는 아르투르를 모시고 받은 자기 몫의 금화로 몇 권의 책들을 샀고, 그 날부터 글자를 공부하는데 열중했다.
***
전투가 끝날 때마다 의례하듯, 아르투르는 오후에는 실컷 축제를 즐기며 놀았고, 저녁에는 전우들과 술잔을 돌렸다. 귀족 기사들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뜯었고, 그들 사이에 위치한 아델라이데 백작은 헤롱거리면서 얼굴이 벌개져서도, 끝까지 술자리를 뒤따라왔다.
아르투르는 그렇게 휴식을 즐기면서도 다음 행선지를 고민했다. 여러 정략적인 노림수도 계산 했고, 한편으론 엘라카르시스가 내렸던 신탁도 항상 염두에 둬야했다. 그는 성검의 주인이었고, 여러 가지 겨울산에서 보았던 기괴한 환상들도 잊지 않고 있었다.
한창 고민하고 있을 무렵, 그의 판단을 도와줄 단서가 도착했다.
교황이 직접 보낸 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