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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16화 (11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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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께서 어떤 분이신지 이 늙은이가 어찌 알겠습니까? 하지만 저보다는 공의 손에 죽은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제 손에 죽은 이들이라 봐야 채 열 명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공께서는 어떠신지요?”

아르투르가 마주본 이 노인은 뱀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교활한 힘이 있었고, 눈빛에는 기세 좋은 이들도 한번쯤 주저하게 할 만한 독기를 품고 있었다. 탐욕이란 독을 머금은 뱀, 그것이 이 노인의 정체였다.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나는 네가 어떤 일들을 하는지 잘 안다. 사람들을 서로 미워하게 해서 싸움을 일으킨 다음, 네가 일으킨 전쟁에서 이득을 취하지. 거부하는 자에겐 독을 먹이거나 단검을 보내고. 그렇게 두라노가 몰락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도시를 파멸로 몰아넣었느냐? 이 뱀 같은 놈아.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어디다 쓸 거냐? 노잣돈은 눈에 놓을 동전 두 닢이면 충분하지 않더냐?”

아르투르의 가시 돋친 말에 노인의 수행원들이 못마땅한 눈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았고, 추기경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르마델로 본인은 능글거리는 웃음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공과 같습니다. 더 많은 힘과 권력을 원하지요. 단지 공의 힘은 칼에서, 제 힘은 금화에서 나왔을 뿐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을 이끄는 건 욕망입니다. 젊은 기사여. 우린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우리 지배하에 놓아야만 마음이 놓이죠. 이번에는 제가 당신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하겠습니다.”

재차 고개를 숙이는 오르마델로였지만, 아르투르는 계속해서 불신과 경멸이 담긴 시선을 보낸다.

“전쟁에서 패해 할 말이 없으니 아무 소리나 지껄이려나 보군. 추기경 예하, 평화 조약을 서둘러 진행해주시오. 이런 헛소리나 듣고 있을 이유가 없소.”

교황청에서 파견된 추기경은 나름대로 머리는 돌아가지만 점잖은 자리가 아니면 견디길 힘들어하는 전형적인 지식인이었다. 고위 성직자의 전형이라고 할만 했다.

“큼, 큼. 교단의 수장인 교황 성하 우르술라 12세를 대신하여 평화 조약을 담보하니, 당사자들은 조약에 서명하고, 여러분의 신앙에 걸고 맹세해주십시오.”

아르투르는 서둘러 의전을 끝낸 반면, 오르마델로는 일부러 시간을 끌려는 듯 느긋하게 움직였다. 마침내 그의 손짓과 서약이 끝나고 추기경이 조약의 비준을 선언하자, 아르투르는 뒤로 돌아섰다.

“당신과 내가 다르다고 생각하시오?”

뒤로 들리는 오르마델로의 목소리.

“당연하지. 어찌 스스로에게 부끄럼 없이 살아온 나와 탐욕에 찌들어버린 네가 같을 수 있겠느냐?”

아르투르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굉장히 짜증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하하. 남을 속여도 되지만, 스스로를 속이려는 모습은 추하오. 당신의 행동을 잘 돌이켜보시오. 당신이 가는 곳마다 언제나 피바람이 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소. 고작 기사도를 따른다는 당신의 알량한 명예를 위해서였지. 한 명의 농노를 구하겠다고 수십 명의 귀족을 죽였고, 이번에는 도시를 구하겠다며 참주와 그의 지지자들, 마침내는 주변 도시사람들마저 무참히 도륙했지. 이것이 학살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당신도, 결국 우리와 다를 바 없는거요. 똑같은, 위선자일 뿐이지.”

본심을 드러낸 오르마델로의 표정은 표독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묻고 있었다. 네놈이 뭔데, 감히 나를 단죄하려 하느냐. 네놈도 나와 다를 바 없다! 그는 침을 튀기며 열변을 계속 토해냈다.

“그러니 기사도니, 명예니 외치며 나를 단죄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시오. 명예를 좇는 당신의 헛된 공명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는지, 죽어야만 상황으로 내몰았는지! 그걸 알고 나면 당신도 스스로의 위선에 놀라게 될 거요.”

오르마델로는 자신의 일침에 풋내기 기사가 흔들렸으리라 생각하며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오히려 피식 웃어보였다.

“레무리아 최고의 거짓말쟁이라더니, 너도 늙어서 수준이 떨어진 모양이군. 이곳이 전해지는 대로 거짓말쟁이들의 땅이라면, 이제 내려올 때가 된 거다. 늙은이. 모든 조건에서 우세했던 네가 왜 패배했는지 아나?”

오르마델로는 짐짓 겁먹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아르투르를 조롱했다.

“오, 물론. 너의 사람 죽이는 실력이야 인정하는 바다. 어쩌면 네 아버지조차도 능가할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또 다른 최고의 살인자가 생겨난거지. 그 뿐이다.”

“천만에. 내가 사람을 많이 죽인다한들, 군대를 어찌 무찌르겠느냐? 너는 네가 누구인지 잊었다. 그러니 네 부하들도 무엇을 따라야 할지 잊었지. 버리지 말아야할 것을 버리고, 타협하지 말아야할 것을 타협한 자는 누구에게나 경멸 받는다. 우스운 기사도라고? 그깟 명분이라고?”

코웃음을 치는 아르투르.

“명분의 힘을 모르니 너희 가문이 그렇게 강력한 힘에도 고작 도시 국가에나 머무르고 있는 거다. 이것만 명심해라. 늙은이. 피오렌치아를 약탈하자는 제안을 거절한 것도 명예를 추구하는 내 덕분임을 알아라. 그것이 나의 원칙이며, 너와 달리 세상 끝 날까지 결코 굽히지 않을 가치이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그들에게 신뢰를 얻는다. 반면 너희 가문은 어떻지? 당장 금화가 떨어지면 한 사람이라도 네게 충성을 바칠까? 당장, 기사도가 아니면 네놈의 아들이 어떻게 살아있겠느냐?”

처음으로 능글거리던 오르마델로의 표정이 깨어졌다. 아들이 나온 까닭이었다.

“네 아들, 굴리엘모는 내 명예를 모독했다. 그래서 반드시 죽이려고 했지. 하지만 전장에서 놈은 너무 형편이 없더군. 무장하지도 않은 민간인을 죽이는 건 기사가 할 짓이 아니었다. 그 덕에 네 아들이 살아있고, 조만간 어마어마한 몸값을 치르고 돌아가게 될 거다.”

냉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잇는 아르투르였다.

“너희 가문의 대가 끊기지 않은 것에 감사하거라. 너의 비교할 데 없는 좁은 그릇과, 누구도 품지 못하는 차가운 마음을 떠올리며 오늘의 패배를 되새기거라. 그리하면 네가 비웃은 기사도가, 명예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게 되겠지.”

오르마델로는 입을 열어 항변하고자 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장남은 아르투르에게 포로로 잡혀있었고, 그 덜떨어진 놈이 그나마 살아남은 건 아르투르의 자비가 분명했으니까.

아르투르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오르마델로를 내버려둔 채 회담장을 떠났다.

그렇게 길고 긴 투쟁 끝에, 마침내 평화가 왔다.

***

평화 조약의 체결이 전해지자, 두라노의 모든 시민들은 집 밖으로 뛰쳐나와 환호했다. 문자 그대로, 모든 시민들이었다.

“아르투르! 아르투르! 아르투르!”

시민들이 박수갈채와 휘파람 소리가 도시를 뒤덮었다. 아르투르는 평화조약의 내용이 새겨진 사본을 높이 들어올리며 사람들에게 내보였다. 그동안의 모든 고생이 싹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많은 시민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평화를 가져온 자! 평화를 가져온 자! 신의 축복을 받을 지어다!”

귀환한 군대가 무장을 풀고 쉬면서 회포를 푸는 동안, 아르투르와 정치가들은 여러 가지 뒤처리에 나섰다. 첫 번째는 아직까지 남은 포로들의 몸값 산정 문제였다. 돈이 없는 징집병들은 아르투르가 사비를 들여 해방시켜주었고, 다수의 귀족들은 정략적인 판단 아래 먼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지만 거물들이 남아있었다.

“오, 다시 만나서 반갑군. 피오레 가문의 사내들이여, 얼마까지 지불할 수 있겠나? 굴리엘모.”

맨 처음 붙들려온 이들은 피오레 가문의 남자들이었다. 참전한 사내가 열 명이 넘었음에도 놀랍게도 그들은 누구도 죽지 않았다. 싸움이 불리해지자마자 칼을 버리고 두 손을 들었던 까닭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던 장비와 가지고 온 짐들은 모두 최고급의 사치품들이었고, 짭짤한 부수입이 되어준 바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피오레 가문의 사내들을 보며 레오폴트를 웃음을 터뜨렸다.

“자, 몸 성히 돌아가고 싶으면 알아서들 몸값 제시해봐.”

레오폴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피오레 가문의 사내들은 앞다투어 외쳤다.

“금화 이만 닢을 내겠습니다! 몸 성하게만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저는 오만 닢과 비단 백 필을 드리겠습니다!”

레오폴트는 더 불러보라며 손짓했고, 그들의 액수는 점차 커져갔고, 적당한 금액에 이르자 만족감을 표시했다.

“네 친척들은 아낌없이 부르는데, 너는 한 마디도 없구나.”

상황을 지켜만 보던 아르투르가 굴리엘모를 향해 말했다. 그는 친족들과 달리, 고개를 숙인 채 치밀어 오르는 굴욕감을 참아내고 있었다. 포로로 잡힐 때도 순순히 항복한 친족들과 달리 무기를 휘둘러보긴 한 사내였다.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말이다.

“죽이던가 말던가 너희 마음대로 해라.”

굴리엘모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 네 목숨에 내 손에 달려있는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렇게 앞뒤 계산을 못하는 녀석이 아닐 텐데.”

아르투르는 살짝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한 후, 굴리엘모를 바라봤다. 아르투르는 이내 원인을 찾아냈다. 굴리엘모는 체념하고 있는 것이었다. 짐작해보자면 그 자신은 제법 군대를 열심히 지휘했을 것이다. 군공을 세워 명성을 높이고, 경제에만 능하다는 피오레 가문의 이미지도 탈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굳은 살 하나 없는 그 손으로 전쟁을 용케 수행했군.”

어떻게 보면 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였다. 병사들은 책상에 앉아 지휘봉만 휘두르는 상전보다는, 자신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사지로 뛰어드는 지휘관을 원했다. 물론 굴리엘모가 받은 교육도 그런 것과는 무관할 터이고.

“너 같은 인간 군상들을 흔하게 봤지. 어느 가문에나 한 둘은 있는 촉망받는 젊은 인재. 평생 성공해 와서 실패라곤 모르다가, 첫 실패 앞에서 무너지는 놈들 말이야.”

굴리엘모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마 이번 패전이 그의 후계자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 터였다. 그것이 죽기보다 싫은 까닭이리라. 그를 도발해보려던 아르투르는 흥미를 잃고 손짓으로 그들을 모두 내보냈다. 이미 놈의 몸값에 대해선 흥정이 끝난 뒤였고, 어마어마한 금액을 약속 받은 뒤였다.

“전쟁을 시작한 건 저놈들인데 단 한 놈도 죽질 않는군요.”

조레스는 분노가 담긴 눈길로 저들을 노려봤다. 본인은 숨기고 싶어 했지만, 아르투르는 자신에 대한 원망도 담겨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젊은이, 원래 귀족 나리들이 자주 하는 짓이니 익숙해지게. 전쟁은 자기네들이 벌여놓고 자기들은 몸값이니 뭐니 해서 빠져나가고, 힘없는 사람들만 평범한 부상 하나 치료하지 못하게 죽게 되지, 포로로 잡혀도 돈이 되지 않으니 그냥 죽여 버리고.”

이번만큼은 아르투르도 별 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의 분노에는 공감하지만, 어차피 현실 정치를 하다보면 눈감아야 할 일은 수두룩하게 있기 마련이었다. 노련한 참사회 의원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이젠 전후 수습에 초점을 맞출 시간이었다.

“떠나기 전에 처리해야 할 문제가 몇 있겠군. 루드비코의 아들, 베르나르도를 불러오게.”

얼마 뒤, 병사들의 감시 아래 베르나르도가 찾아왔다. 한창 성장하던 시기라 그런지, 루드비코의 아들은 키가 부쩍 커 있었다. 그는 아르투르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깍듯이 복종의 예를 표했다. 자유 도시에선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아르투르는 베르나르도의 행동을 보며 내심 놀랐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 앞에서 이토록 정중하고 차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타고난 정치가의 자질을 지녔다는 의미였다. 저 즈음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더욱 놀라웠다.

‘나라면 앞뒤 가릴 것 없이 초면에 검을 들고 달려들었겠군.’

여전히 루드비코의 아들은 도시 내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뭐든지 해도 좋다는 맹목적인 충성심은 아닐지언정, 루드비코 정권에 향수를 가진 이들은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도시에 남겨둘 수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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