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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15화 (11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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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지아노 강가의 전투는 군사적으로 보면 완벽한 승리였다. 자유 도시 연합군의 주력은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었고, 동맹은 와해되었다. 알튼 남작은 노획한 깃발들과 끝없는 포로를 보며 소리 높여 외쳤다.

“엄청난 승리입니다! 아군도 피해가 심하지만 적들은 재기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습니다. 당장 공격해서 전과를 확대해야만 합니다!”

승리에 도취된 귀족들은 모두 전쟁을 계속 할 것을 결의했다. 랑트리뷔아체와 피오렌치아의 지나친 확장을 경계하여 싸우러 온 것인데, 오히려 적의 영토를 정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아르투르. 일어나봐라! 다시금 영주들을 대표해서 공식적인 레무리아 침공을 제안하마. 금괴 기사단을 고용하고 왕국의 귀족들을 불러모으자. 얻을 것 없는 내전에 진저리를 내는 귀족들이 많아. 그들이 합류한다면 레무리아 전역을 우리 발밑에 둘 수 있을 거다!”

아르투르는 레오폴트의 목소리를 듣고 졸린 눈으로 잠에서 깨어나 그를 마주 보았다. 레오폴트의 얼굴은 기쁨으로 고조되어 흥분된 표정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가져온 레무리아의 지도를 펼쳐놓고, 열변을 토하며 정복 계획을 다시 설명했다.

“이번에는 아델라이데 백작도 동의했다.”

말을 끝마치며 자신감 있게 말하는 레오폴트였다. 아르투르는 세숫대야에 놓인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어 잠에서 깨어난 후, 짧게 대답했다.

“아니, 난 여기서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하겠다.”

“이번에도 똑같은 소리냐? 전쟁으로 죽을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이건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수도 있다. 우리 아버지들조차 정복하지 못했던 땅을 손에 넣을 기회가 온 거야. 우리 세대만의 전설을 쓸 수 있다고!”

레오폴트는 주먹을 굳게 쥔 채 아르투르를 마주보았다. 아르투르는 침묵을 지킨 채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는 지금 두라노의 독재관이고, 그 전에 명예를 추구하는 기사다. 일단은 그것만 보겠어. 물론 레오폴트, 너 역시 원하던 바가 있어서 왔겠지. 나는 네 의사도 존중해서 협상 내용에 반영하겠다. 하지만 승리의 주역인 기사들의 돌격을 이끈 건 나였고, 그러니 내 의사 역시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레오폴트.

“그으래?”

“게다가. 이번 전투도 아슬아슬했다. 행운의 여신이 우리에게 미소지어줬기에 이겼을 뿐, 승리를 확신할 수 있던 것 역시 아니야. 적들이 모두 랑트리뷔아체 군의 반만큼만 싸웠더라도 패배하는 것은 우리가 되었을 거다. 정복한다고 한들 그 뒤는? 다시 말하지만 자유 도시 사람들은 우리 통치를 고분고분 받아들일 자들이 아니야. 끝없이 반란을 계획할 거라고.”

“무르군. 정말 물러. 언제부터 페르넬의 아들이 그런 걸 신경 썼단 말이냐?”

레오폴트는 날선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노려보았다. 아르투르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지만, 단호한 표정을 내보였다.

“그만. 넌 지금 영광에 목말라있지. 위대한 아버지를 둔 아들들이 가지는 그 느낌을 나도 안다. 큰 전공과 정복을 통해 숙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고 싶겠지. 그렇게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을 거야.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우린 굳이 아버지들보다 낫다는 걸 증명할 필요 없어. 정말로 우리가 아버지들보다 뛰어나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테니까.”

레오폴트의 눈동자에 격렬한 감정이 담겨 요동쳤다. 그는 아르투르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깊은 숨을 들이쉬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호흡이 점차 안정되자, 그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이번 승리의 주역은 너니까 네 결정에 따르겠다. 넌 언제나 내 상상을 뛰어넘는 짓을 하는 놈이었지. 위르마넨 가문의 영지에서도 그랬고, 하이에버에서도 그랬어. 이번에도 그런 결정을 하는군. 좋아. 속아주마. 이번에도 세상을 놀라게 해봐라.”

레오폴트는 글씨가 빼곡히 담긴 두루마리를 내밀었고, 아르투르는 그것을 받아쥐었다.

“평화 협상에서 우리가 요구할 것은 이 문서에 전부 담겨 있다. 한 가지 정도는 양보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전부 들어줘야해. 하나도 빠짐없이. 전쟁을 이겼으니 협상도 잘 해내길 바란다.”

레오폴트는 털털하게 웃으며 아르투르의 어깨를 툭 친후 막사를 빠져나갔다. 아르투르는 오히려 레오폴트가 그렇게 떠나자 마음 깊숙이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다. 그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형제였고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였다. 그에게 또 마음의 부채가 쌓이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받은 호의들을 되돌려주마.’

레오폴트의 마음을 돌린 이상, 평화 조약의 체결은 확정된 것이었다. 자유 도시들은 각기 의견이 나뉘었지만, 대체로는 전쟁의 종결을 원했다.

“질 수가 없는 전쟁이라고 말해서 군대를 보냈는데 전사자와 몸값을 치러야할 포로만 잔뜩 생겼잖소! 이걸 어떻게 할 생각이오!”

“애초에 우리 도시와는 관련도 없는 싸움 이었다! 정치가들을 몰아내자!”

전쟁을 주도한 파벌들은 패배한 전쟁에서 무익한 시민의 피를 흘리게 한 전쟁광들이라고 지탄 받았으며, 대중들의 분노가 정치가들에게 쏟아졌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권력이 교체되거나 대대적인 반 정권 움직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전쟁의 공식적인 종결이 이뤄지는 건 길고 지루한 일이었다. 여전히 자유 도시의 정치가들은 아르투르가 데네토르 왕실과 연결되어있을 거라는 점에 큰 위협을 느꼈고, 원한다면 군대를 한두 번 정도는 더 일으킬 수 있었다. 외교 협상단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레무리아에 데네토르의 영주들의 영토가 생긴다니! 이런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소!

이때 활약한 것은 에렌이었다. 전쟁 중에는 그가 활약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평화 협약에 있어선 그의 명성과 식견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자유 도시의 형제 여러분. 우리는 전쟁을 치르긴 했지만 여전히 공통점들이 더 많은 사람들이오. 진정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보시오. 아르투르 공이 어째서 당신들의 위협이 아닌지 차근차근 설명해드리겠소.”

에렌은 자유 도시들의 관습과 역사에 능통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다룰 줄 알았다. 그의 조리 있는 설득이 이어지자 사절단들은 조금 누그러진 태도를 취했다. 이 때, 아르투르는 포로들의 몸값의 지불을 허용했다. 도시의 명문가들은 곧 바로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자신들의 자제를 돌려받았다. 도시마다 귀부인들이 뛰쳐나와 그들의 남편, 아들, 형제를 맞이했다.

“돌아왔구나! 아들아! 그들이 네게 해코지를 하진 않았느냐? 두라노 놈들은 포로의 손을 자르기로 유명해서 이 어미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청년 귀족은 자신을 얼싸안은 어머니를 달래며 차분히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님. 아르투르 공께서 저희 신변을 철저하게 보장 해주신 덕에 저는 건강히 돌아왔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다른 이야기도 전했다. 청년 장교들의 아버지는 보통 고위직에 있는 이들이어서, 외교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랑트리뷔아체 국가 수장의 아들도 있었다. 다름 아닌 첫 공성전에서 깃발을 들고 명예로운 항복을 허용했던 장교였다.

“아버님, 단언컨대 아르투르 공의 평화를 향한 마음은 진심입니다. 만약 전쟁을 원하셨다면 지금쯤 군대를 몰고 도시를 이미 포위하고 있을 겁니다. 아버님도 아시겠지만 저흰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 지상에서 기사들과 싸우는 일은 유리하지 않아요. 지금 평화조약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편이 피해가 적을 겁니다.”

상황을 전해들은 랑트리뷔아체의 원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그나델로가 영광에 눈이 멀어 우리에게 거짓을 전했군. 본인의 공명심 때문에 국가에 이토록 큰 피해를 입혔단 말인가….”

그런 직후, 아르투르는 몸값을 내지 못하는 가난한 징집병들을 사비로 해방시켜주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아르투르의 이름을 칭송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감사합니다! 아르투르 공!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진정한 기사 아르투르 만세!”

돌아간 징집병들은 아르투르의 미덕에 대해서 알렸고, 그가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여론이 기울자, 자유 도시의 시민들은 정치가들의 저택 앞으로 몰려가 구호를 외쳤다.

“평화! 평화! 우리는 평화를 바란다!”

이것으로 전쟁의 승패는 확정되었다. 자유 도시들은 결국, 영토 할양과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데 합의했다. 레오폴트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우리의 조건은 전부 수용되었지만, 놈들의 반응을 보니 더 받아낼 수 있던 것 같은데. 재협상을 요구하는 게 어떻겠소? 여러분?”

하지만 아델라이데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아르투르 공께서 그렇게 결정하셨으니, 따르겠습니다.”

할양된 영토는 레오폴트와 아델라이데가 반씩 나눠가졌다. 전쟁 배상금은 아르투르와 두라노, 참전 영주들의 몫으로 결정되었다. 마침내 모든 참전국들이 평화 조약의 내용에 동의하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 서명을 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고생했다. 샤를로트. 네가 아니었다면 더 길고 지루한 과정을 거쳤어야 할 테지.”

피오렌치아의 대표로서 협상을 이끌었던 자는 샤를로트였고, 그녀는 아르투르와 마주앉아 협상의 체결을 기념하며 악수했다.

“전쟁이란게 다 이렇지. 일으키는 건 한 두 사람인데, 끝나려면 모두가 동의해야 되거든. 조약의 이행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물론이다. 포로들은 모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거야. 피오레 가문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일주일 뒤, 공식적인 서명 장소에서 만나지. 고생했다. 이번에 진 빚은 잊지 않으마.”

그리하여, 나르지아노 강가의 전투가 끝난 지 삼 개월이 지날 때, 각 국의 대표들은 평화조약을 비준하기 위해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로 다시 모여들었다. 이미 사전에 협의가 끝난 터라 교황청 특사의 중재 아래 서명만 하기 위해서였다.

수십 명에 달하는 양측의 사절들이 모여든 가운데, 아르투르는 연합군을 대표하여 말을 몰며 회담 장소로 나아갔다. 반대편에서는 호화로운 가마에 찬 늙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오레 가문의 수장이자 황금백조 은행의 주인, 오르마델로 델 피오레였다.

노회하고 늙은 상인과 활력이 넘치는 젊은 기사의 만남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오랜 적수를 만나는 느낌을 받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르투르 측은 당당하고 의기 양양했으며, 오르마델로는 가라앉고 차분한 느낌이었다.

“두라노의 독재관 아르투르요.”

아르투르는 악수도 건네지 않은 채 오만한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오르마델로가 반응해왔다. 일종의 신경전이었다. 그러나 가마에서 내린 노인의 눈동자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으며, 노인은 오른손으로 모자를 벗으며 흠잡을 데 없는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승리의 기사 아르투르 공이시군요. 부친인 페르넬 왕을 많이 닮으셨습니다.”

아르투르는 노골적인 경멸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성난 목소리로 답했다.

“불쾌하니 그 더러운 입으로 아버님을 입에 담지 말라. 너는 루드비코의 쿠데타를 지원해 두라노를 전복시키고, 자유민들은 수탈했다. 네 노예무역을 지속하기 위해서였지. 내가 그걸 모르리라 생각하느냐? 너는 벌을 받아 마땅한 자이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내 한이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야.”

그러나 오르마델로는 능청스럽게 웃어보였다.

“가장 사악한 악마들은 항상 선의를 가장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마음을 얻은 뒤, 그럴듯한 명분을 들이밀어 사람들을 죽이지요. 그들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살인자이며, 대악마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그저 죄 많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할 터입니다.”

“지금 내가 악마라고 모욕하는 거요?”

아르투르는 격분한 태도로 오르마델로를 노려봤고, 노인은 뒤틀린 미소를 보이며 속내를 전혀 내보내지 않았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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