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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14화 (11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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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말발굽에 풀이 사뿐히 사그라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아르투르의 인도에 따라 쉬지 않고 발굽을 내딛는 에쿠잘루스는 아주 지쳐있었지만 힘을 짜내어 내달렸다. 주인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가 무엇에도 복종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자신을 길들인 이후 아르투르의 뜻은 곧 에쿠잘루스의 비원이었다. 주인은 항상 자신에게 애정과 존중을 보내왔으니 이제 그가 화답할 차례였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지 응하리라.

“독재관 각하? 뭘 하고 계십니까?”

물웅덩이를 옮기는 아르투르를 보며 두라노의 장군들이 의아함을 표했다. 전투는 반나절이나 계속 되었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피로에 찌들게 만들었다. 당황한 표정의 장군들을 본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를 멈춰 세웠다.

“조레스! 시라노! 자네들이 사지 멀쩡히 살아있는 것을 보니 반갑군. 적십자 수도원에서 부상자 치료를 나와서 돕고 있네. 깨끗한 물이 꼭 필요하다더군. 그래서 대신 길어다주고 있네만.”

조레스는 황당한 심정을 드러냈다.

“아니, 그런 일은 종자나 저희 같은 아랫사람들을 시키시면 될 일 아닙니까?”

“내가 어디 일손 한명이 모자란 판에 지위가 높다고 뒷짐 지고 있을 사람으로 보이나?”

“그도 그렇군요.”

“자네들도 힘이 남는 모양이니 따라오게나.”

두 장군도 승용마를 불러와 아르투르의 뒤를 따랐다. 장군들이 나서는 모습을 본 두라노 병사들도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르투르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행렬이 이내 수십,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아니, 이게 뭡니까? 이렇게 많이는 필요가 없습니다만.”

프란체스 수도원장은 막사 앞의 수십 개의 양동이를 보며 놀라운 목소리를 내비쳤다.

“지금 우리 군에는 훈련된 의료 부대가 없소. 영주들이 데려온 소수의 의사들이 전부지. 그나마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건 당신들 덕택이니, 우리가 뭐라도 도와야하지 않겠소? 말만 하시오. 뭐든지 할테니.”

수도원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로 지시 사항을 내리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수도원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르투르를 비롯한 장교들에게 역할을 나눠주었다. 수도사들은 밀려드는 환자와 턱없이 부족한 일손를 보며 대부분의 부상자가 죽을 거라고 여겨 실의에 빠져있던 차에, 자신들을 돕겠다고 몰려든 병사들을 보고는 크게 기뻐했다.

“옳거니! 신의 뜻대로라!”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어!”

프란체스는 간결하고 쉬운 단어로 역할을 나눠주었고 장교들은 각자가 병사들을 인솔해 맡은 임무를 하러 갔다. 아르투르는 그들을 총지휘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빨리 움직여라! 너희가 굼뜬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전우가 죽는다!”

구호 작업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아르투르는 단호한 개입으로 혼란을 잠재웠고 일손이 부족하면 직접 오물과 쓰레기를 만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시체를 치워 환자들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하는 한편, 청결 유지에 필요한 잡다한 일들을 도맡았다. 경험 있는 이들은 경상자들에게 붕대를 감아주거나 치료가 끝난 이들을 간호했다.

“형제자매님들! 평신도 교우들이 저렇게 힘을 내고 있건만, 수도자인 우리는 더욱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조 인력이 생기니 수도사들은 의학 기술이 필요한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프란체스와 수도사들은 몰려드는 환자들의 상처를 째고, 약초를 발라주었다. 환자들의 상처를 째고 약초를 발라주었다. 지나치게 늦게 온 이들은 조금 더 냉정한 치료법을 처방받았다.

프란체스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제님의 왼손은 이미 썩어버렸구려. 움직이지 못하게 손발을 꽉 잡으시오!”

“아, 안돼! 나는 건강해! 자르지 말라고!”

병사들은 눈을 질끈 감으며 부상병이 난동피우지 못하게 붙잡았다. 프란체스는 성호를 긋고는 톱을 내리쳤다.

“아아아아악!”

고기가 도축되듯 그의 왼손이 처참하게 잘려나갔지만 프란체스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양, 럼주를 꺼내 상처에 들이부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소독을 마친 프란체스는 상처 부위에 약초를 발라준 후, 붕대를 감았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형제님.”

꺽꺽대며 숨을 몰아쉬는 부상병을 보며 동료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살 수 있겠습니까?”

“그건 오직 신만이 아십니다.”

수술을 마친 프란체스는 기다리는 다음 환자를 찾아 바로 자리를 떴다. 뒷정리는 병사들이 했다. 중상자 가운데 수술을 한다고 살아남는 인원은 절반을 조금 넘는 게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부상병들은 어머니와 신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치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치료 받지 못하면 그냥 죽었으니까.

***

다음날 해가 떠오를 무렵에야 구호작업이 마무리 단계가 되었다. 아르투르는 벌판에서 국적을 가리지 않고 부상병들을 모두 데려왔고 프란체스는 쉬지 않고 그들을 치료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의료 막사의 바깥에 쭈그리고 앉아 떠오르는 해를 바라봤다.

“드디어 끝이 났구려.”

아르투르는 온 몸에 힘이 빠진 채, 반쯤 넋을 놓은 채였다.

“아직 아닙니다. 기도가 남았으니까요. 아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았습니다.”

결연히 말하는 프란체스를 보며 아르투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형제님과 종군 사제 분들에게 맡기지. 아무튼 고맙소. 수도원장. 이름이 프란체스라고 하시던가?”

아르투르는 이제서야 상대를 주의 깊게 살폈다. 상대는 수도사 특유의 대머리를 제외하면 평범한 중년 남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키도 체격도 평범했고 선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잘 생기진 않았다. 지위를 나타내는 복장도 누더기가 된 회색 수도복이 전부였다. 그러나 눈빛은 다이아몬드 보석처럼 빛났으며 그 속에서 느껴지는 정신은 강철보다 견고해보였다. 몸도 대단히 잘 단련되어 있었다.

“맞습니다. 형제님께선 가장 낮은 자를 위해 싸운 기사, 아르투르 공이시지요?”

“그런 별명도 있지. 자네 말투는 처음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유순해진 것 같군.”

환자들을 치료하고 질서를 잡을 때는 다부지고 결의에 차 있던 그의 표정은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유순했다.

“제가 믿음이 깊이 자리 잡지 못한 까닭에 급박한 상황이면 속세에 있을 때의 버릇이 나오곤 합니다. 하지만 경전에서 이르길 가장 낮은 자를 대하는 자세가 신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니 신을 섬기는 자라면 항상 겸손해야겠지요.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프란체스는 부끄러운 듯이 말했지만 아르투르는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이 수도사를 높이 샀다. 선한 일만 하면 신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 샌님이라면 애초에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일 따윈 하지 못할 터였다.

‘이 자는 경건한 삶을 추구하면서도 필요할 땐 단호한 의지를 내보일 줄도 알아.’

한편, 프란체스도 구김 한 점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 역시 아직 고귀한 자들 가운데 깨어있는 자가 있는 것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온갖 지역의 전쟁터를 지켜봤지만 고귀한 출생의 기사가 천한 병사들을 위해 이토록 노력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정작 전쟁을 일으키고 이득을 보는 건 그들인데 말이지요.”

아르투르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부정할 수 없는 고귀한 피였고, 전사 계급의 일원이었으며 그런 사실에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꼈으니까.

“자, 형제님께서도 쉬러 가셔야 할테니 물어보신 것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공께서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싸움을 했건만 누굴 죽이기만 할 뿐, 구한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패배를 모르는 기사가 그러한 고민을 한다는 일 자체가 고무적입니다.”

아르투르는 계속 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세간에 알려져 있는 아르투르 공의 싸움은 대부분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던 경우였습니다. 도적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으니 빼지요. 하이에버에선 명예를 모르는 귀족들에 맞서셨습니다.”

프란체스는 아르투르에게 존중이 담긴 시선을 내보였다.

“지금 싸우신 이곳, 두라노에선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참주를 벌하셨습니다. 끝내는 부도덕한 상인과 두라노인들 스스로의 광기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셨죠. 적어도 대의를 위한 싸움이라는 것을 반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진정으로 기사다운 일이고, 신앙인다운 일이었습니다.”

아르투르는 오랫동안 면도하지 않아 자라난 턱수염을 매만지며 여전히 의혹에 가득 찬 시선을 보냈다.

“그대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로 맹세한 신의 종복이잖나. 그런데 내 행동에 대해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건가? 내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도?”

“말씀하신대로, 저는 어떤 사람도 해할 수 없습니다. 그건 금지된 일입니다. 하지만 아르투르 공은 다르지요. 우리는 맡은 직분이 다릅니다. 저는 기도하는 자이고, 공께서는 싸우시는 자이지요. 즉, 우리는 각자 다른 일을 통해 신의 뜻을 받들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뜻이라, 아르투르로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이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신성한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완벽한 확신을 가진 것 역시 아니었다. 그러나 신의 뜻을 받들려는 자들은 언제나 좋은 가르침을 퍼뜨렸기에 그들을 존중하는 입장에 있었다.

“도적들을 소탕한 일과 명예를 저버린 기사들과 싸운 것은 전혀 후회하지 않네. 자네 말처럼 명백히 옳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싸움… 이겼지만 내가 옳은 선택을 모르겠단 말일세. 선과 악이 깨끗이 나뉘는 싸움이 아니었어. 내가 쓰러뜨린 자들의 대부분은 그저 누군가에 의해 떠밀려나온 청년들에 불과했어.”

“무엇이 마음에 걸리시는 지 압니다. 이번에는 이겼어도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으시겠지요. 사실, 수많은 전쟁터를 돌아다녀본 제 입장에서 보다보면 대부분의 싸움이란 게 이번 일처럼 흑백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이 싸움이지요. 그때마다 조금이라도 옳은 편을 들어 싸우다가는 공의 말씀처럼 찝찝한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 바로 그 부분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말일세. 일개 기사로서 전쟁을 멈추긴 너무 어렵더군. 무력감과 회한, 그게 지금 내가 느끼는 걸세.”

프란체스는 차분한 얼굴로 아르투르를 올려다보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조언은 이렇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당신의 깃발 아래 불러 모으시고, 아르투르 공께서 주장하는 정의의 기준을 널리 알리십시오.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주십시오.”

겸연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아르투르.

“새 왕조라도 창설하란 말인가? 지금보다 큰 규모의 전쟁을 몇 차례 치루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프란체스는 씁쓸한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도 사람들은 죽고 있습니다. 또한 강철과 불만이 새로운 왕조를 형성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현세의 왕들이 의무를 등한시하여 잊혀 졌을 뿐, 왕들은 본디 신민들의 수호자이며, 평화를 가져오는 자입니다. 아르투르, 당신에게는 그런 힘과 자질, 자격이 있습니다. 저는 수많은 인간 군상을 보아온 사람이니 신뢰해도 좋습니다. 이것이 내 대답입니다. 이러한 혼란을 끝내고 싶다면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내십시오. 그것만이 평화를 가져올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말을 마친 수도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로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뒤로도, 아르투르는 그가 가진 기이한 분위기를 떠올리며 그의 말을 곱씹어봤다.

‘내가 바라던 건 평범한 사람들이 소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것이 기사의 일이니까. 적어도 처음에는 그런 목표였어.’

물론 자신도 권력을 원했다. 아버지의 왕좌를 물려받고 싶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선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는 자부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내 이익을 위해 싸운 것은 아니었다고.

‘약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건 일개 기사가 이루기엔 너무 원대한 꿈이었을지 몰라. 나 혼자서 명예로운 행동을 한다고 전쟁을 막을 수도, 상황을 좋게 만들 수도 없다는 걸 깨달을 때가 되었어.’

아르투르는 무의식적으로 왕이 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대관식에 쓰이는 보석 박힌 왕관의 광채 속에서, 자신은 왕권의 상징이 홀과 보검을 들고 서 있었고, 수많은 기사들이 칼을 뽑아 들어 올려 충성을 맹세했다. 어린 시절부터 몇 번이고 꿈꿔왔던 것이지만, 이제 그 꿈의 동기는 어렸을 적에 꿈꾸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만인이 두려움에 떠는 정복왕의 후계자는 자신이 바라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건 분명했고, 스스로 저버린 길이었다. 하지만 명예에 입각한, 기사들의 왕이라면 어떨까?

‘그런 자리라면 언제든지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들어 밝아오는 태양을 바라봤다. 인간들이 서로를 얼마나 죽였건, 해는 그 자리에 있었고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아르투르는 그토록 많은 이들이 죽었건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다.

그는 단지, 스스로의 오랜 방랑에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 다가왔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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