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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가장 치열해졌을 때는 평화롭기 그지없다가, 전투가 끝나고 모두가 한숨을 돌릴 때 진짜 전쟁이 시작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상병들을 빨리 옮겨주십시오!”
적색 십자가를 내건 의료 막사로 부상병들이 끊이지 않고 실려 왔다. 상처 입은 자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던 터라, 나중에는 아예 야외에 막사를 차려놓고 그들을 수용했다. 환자들을 돌보는 자들은 교회의 수도자들, 즉 수도사와 수녀들이었다. 신에게 봉헌된 그들의 회색 누더기 옷은 피와 오물로 물들어갔다.
수도사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의료 막사는 비극적인 현장이었다. 붕대와 약초 등의 의료 물품도 턱 없이 모자라고, 몰려드는 부상병들에 비해 의료인의 숫자는 모자랐다. 침상마저 부족해 뒤늦게 온 부상병들은 들 것에 실린 채로 기다려야했다.
“어머니! 어머니, 구해주십시오!”
젊은 병사들은 고통 속에 절규했다.
“… 이 말을… 애엄마에게 좀, 전해주게. 평생 그녀만을… 사랑했다고. 딸에게도… 잘….”
가정이 있는 자들은 자신을 싣고 온 동료들에게 아내와 자식들을 부탁했다. 응급 처치를 하면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들조차 방치된 채 죽어가고 있었다.
“살려줘! 살려줘! 나부터 살려줘!”
이런 아비규환 속에선 수도자들도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상황에 압도되기 마련이었다. 그나마 현장이 돌아가고 있는 것은 그들의 대표인, 수도원장 프란체스 덕이었다.
“형제자매 여러분! 더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의 행동이 빨라질 때마다, 주님의 자녀 한 사람이 살아납니다! 응급처치는 위험한 사람부터! 나머지는 찾아온 순서대로!”
한편, 그는 자신들의 동료를 먼저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병사들을 향해서도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상황을 똑바로 보시오! 우린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모두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은 안하겠소. 우린 찾아온 순서대로 치료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현장이 엉망이 되어 모두 죽게 될 거요! 차례를 기다리시오! 멀쩡한 사람들을 우리나 좀 돕고!”
연약해보이던 수도원장의 단호한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병사들은 그가 내보이는 성스러움과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물러났다. 규율이 잡히자 이 엉망인 상황에서도 현장은 어떻게든 운영될 수 있었다. 수도자들은 정말로 모든 힘을 다해 사람들을 구해냈다. 가장 뛰어난 의술 실력을 지닌 수도원장 본인은 수술을 집도했다.
“모두 길을 비켜라!”
한 무리의 사내들이 거칠게 대기줄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병사들은 거칠게 성을 내며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댔다.
“어떤 새끼야!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금발의 미청년 레오폴트 백작과 그의 근위 기사들이었다. 레오폴트는 굉장히 싸늘한 눈으로 욕설을 퍼부은 자를 노려본다.
“다시 말해봐라.”
“아, 아닙니다. 들어가십시오.”
줄을 밀치고 들어온 사람의 정체가 밝혀지자 모두 침묵했다. 레오폴트의 품에는 목에 화살을 맞은 중년의 기사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프란체스는 상처가 극심하던 병사의 수술을 집도하려던 참이었는데, 기사들이 다가가 그 병사를 양손에서 번쩍 들고 일으켰다.
“크허억 -!”
양쪽에서 마구잡이로 들린 병사는 곧 바로 피를 토했지만 기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병사를 막사 바깥에 내던지고 왔고, 레오폴트는 침상 위에 자신이 데려온 기사를 뉘였다.
“무슨 짓이오!”
수도원장의 호령에도 레오폴트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오만한 태도로 프란체스를 내려다보았다.
“이 기사를 치료해라. 지금 당장!”
“나는 분명히 찾아온 순서대로 치료하겠다고 선언했소.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당신의 의사에게 데려가시오. 우리 수도회는 어느 진영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소!”
레오폴트는 침착한 태도로 답했다.
“시간이 없지만 이유가 필요하다니 말해주마. 고드프루아 폰 벨프 경은 삼 대에 걸쳐 왕가를 섬겼다. 그 와중에 정통 신앙의 보존을 위해 이단자들을 불태우고 북구인 약탈자들에 맞서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왔다. 그의 생명을 구해낸다면 내 큰 보상을 내리마. 땅? 황금? 아니면 교황청에 추천장을 써줄 수도 있다.”
“주님 앞에선 황제나 농노나 다를 것 없고, 모든 생명은 존귀하오. 순서를 기다리시오.”
레오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
다음 순간, 레오폴트의 허리춤에서 번득이는 강철이 뽑혀져 나와 수도원장의 목에 겨눠졌다. 주변 수도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내 말을 듣고 보상을 받을 테냐. 여기서 목이 잘릴 테냐.”
프란체스는 목에 칼이 겨눠졌음에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레오폴트를 똑바로 마주보며 오히려 고압적인 목소리를 냈다.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그분의 권위를 대신하여 땅을 통치하는 군주가 주님의 종복을 죽일 셈인가? 진정 신의 징벌이 두렵지 않은가?”
레오폴트도 한 치도 물러나지 않은 채,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시고, 내 칼은 여기 있다. 너와 네 동료들을 죽이는 건 아주 쉽다. 어쩔 테냐?”
그러자 프란체스는 더욱 더 큰 목소리로 일갈했다.
“이런 불경한 자 같으니! 진정으로 신의 은총 외에는 바라지 않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가? 그분의 뜻을 따르다가 죽는다면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거늘, 어찌 그것을 두려워하겠나? 하지만, 수도사를 죽인 군주가 얼마나 통치를 지속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이쯤 되자 레오폴트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레오폴트는 오른팔을 움직여 신기에 가까운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새로운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고, 잘려나간 머리가 나뒹굴었다. 모두 비명을 내질렀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신성한 장소에서 무엇을 하는 짓인가!!!”
프란체스는 분노한 외침을 내뱉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머리는 다름 아닌, 옆 침상에 있던 부상자의 머리였다.
“수도사답지 않게 세상 물정을 잘 알더구나. 그런 배짱도 부릴 줄 알고. 맞다. 나는 너희를 죽일 수 없겠지. 하지만 이곳에 있는 부상병들은 아니다. 이곳에선 적도, 아군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줬다지? 고드프루아가 죽는다면 모든 의료 막사를 찾아다니며, 적군의 부상병들을 모조리 찾아내서 죽이겠다.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이니.”
레오폴트의 말을 들은 프란체스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갔다.
“이 무슨 저주 받을 짓이란 말이냐! 약자를 지키기로 맹세한 기사가 몸도 가누지 못하는 부상병을 죽이다니! 비열하다! 비겁하다! 불경하다! 너는 누구의 존경도 받지 못할 것이다!”
레오폴트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대신에 사람들은 날 두려워하겠지. 그건 존경보다 쓸모가 많아. 수도원장, 이제 벌어질 일은 둘 중 하나야. 고드프루아가 살아나서 내 영지에 너희 수도회의 자리가 생기거나, 고드프루아가 죽어서 분노한 내가 모든 포로를 처형하거나. 네 의사와는 관계없다. 주님께서 어떤 결과를 내게 주실지 궁금하군.”
“이, 이이익!”
“내 말 듣지 않고, 계속 하던 대로 땅 파먹던 놈들이나 구해도 된다. 하던 일이나 계속해. 수도사 양반. 고드프루아가 죽으면 당신이 구한 놈들 중 절반은 처형될테지만.”
레오폴트의 위협에 정적이 돌았다. 그의 근위 기사들은 일부러 칼자루를 툭툭 치며 위협감을 증대시켰고, 나머지는 그가 위협을 현실로 옮기게 될 까봐 공포에 떨었다. 오직 프란체스만이 분노로 이를 떨고 있었다.
“…수도원장님.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만은 원칙을… 굽히시지요.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길 같습니다. 주님도 그걸 바라실 겁니다.”
벌컥 화를 내는 프란체스.
“인간의 섭리를 말하면서 신성한 주님의 이름을 담지 말게!”
프란체스는 이를 부르르 떨다가, 자신의 치료를 기다리며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그는 자리에 앉아 고드프루아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오폴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잘했다. 수도원장. 결과도 좋길 바란다.”
***
레오폴트의 소란이 있고 얼마 후, 아르투르 역시 성 십자 수도회의 의료 막사로 향했다. 레오폴트의 일에 대해선 알지 못했기에 그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품에 죽어가는 소년을 들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무지막지한 무언가에 베인 상처가 있었다.
“다 왔다! 정신 잃지 마!”
그러나, 소년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변해버린 뒤였다. 아르투르는 그제서야 성검의 존재를 떠올리고, 허겁지겁 그것을 꺼내들었다.
‘황금의 검이여, 응답해라! 응답해!‘
그러나 성검은 조그마한 빛을 낼 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정도의 힘을 내지는 않았다. 이미 두라노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리라. 아르투르는 멈춰서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소년의 시신을 내려두었다.
눈앞에는 산처럼 쌓인 시체들이 쌓여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피의 강줄기는 웅덩이를 이루었다. 그곳에 미친 자신의 얼굴은 알던 모습과 전혀 달라져있었다.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윤기 나던 머리카락은 피로 엉겨 붙어 엉망이었다. 갑옷에는 피와 살점이 가득 묻어있었다. 눈마저 피로로 붉게 충혈되어 있으니 전설 속의 흡혈귀처럼 보였다.
‘맙소사. 이게 나인가?’
전설 속의 흡혈귀도 이렇지는 않으리라. 승리의 흥분이 덧없게만 느껴졌다. 의료 막사 주변에는 수술 중에 잘려나간 팔다리가 쓰레기마냥 쌓여있었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가득했다. 아르투르는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단 한 사람조차 치료하지 못하면서, 수백 명의 목숨은 참 쉽게 뺏어갔구나.’
아르투르가 멍하니 막사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옆 측에서 수도원장의 까칠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도 남들보다 앞서 치료받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 왔소?”
아르투르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입고 있는 회색 옷과 주변머리만 남아있는 기이한 두발 양식은 수도자라는 신분을 드러냈다. 체구는 작았지만 몸은 아주 다부졌으며, 눈에는 결의가 가득했다.
“그렇다면 먼저 오시오. 불만이야 나오겠지만, 아까처럼 싸우느라 시간 낭비할 순 없으니까.”
“무슨 사건이 있었나보군. 일단 나는 그런 건 아니오.”
“그럼 높으신 분이 왜 이 더러운 곳까지 오셨나? 후방으로 가서 승리 축하연을 여셔야지.”
수도원장은 가위며 칼 같은 수술 도구를 받아둔 물양동이에 꼼꼼하게 씻었다. 아르투르는 쓴 웃음을 짓는다.
“그저, 허탈해하고 있었을 뿐이오. 죽이기는 정말 쉬운데, 구하기는 훨씬 어려우니 이런 이율배반적인 일이 어디 있겠소? 사람을 죽여오기만 했으면서 누군가를 구한다고 착각하고 있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더군. 당신은 수행을 오래 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르투르는 숙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쟁터에서의 삶과 죽음은 많은 부분이 운으로 좌우되었다. 갑옷을 입지 않은 자는 쉽게 죽었고, 훈련받은 않은 자는 더 쉽게 죽었다. 그런데, 둘 다여도 그냥 운이 없으면 죽었다. 역전의 기사가 누가 날린 지도 모르는 화살이 화살로 떨어져서 사례가 한 두건인가? 자신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답을 진지하게 원하시오?”
“그렇소. 나한테는 아주 진지한 문제요.”
“내가 답을 해드리지. 대신 지혜를 얻으려면 노동을 좀 해야 하오. 일부터 합시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깨끗한 물이 부족하니 저기 비어 있는 양동이에 깨끗한 물을 받아주시오. 반드시 깨끗한 물이어야 하오. 강가는 핏물로 더럽혀졌으니 서쪽에 있는 큰 호수로 가야 하오, 지치지 않는 체력과 질풍 같은 말을 가진 당신만 가능한 거지. 자, 어서 가시오!”
수도원장은 비어있는 양동이를 손으로 가리켰고, 아르투르는 사람을 구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은 심정에 따라 양동이를 쥐고 에쿠잘루스에 올라탔다. 백 명을 베는 역전의 기사가 소독에 쓰이는 물을 길러 말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