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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12화 (11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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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나델로 장군과 그의 근위병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지만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도시 연합군의 많은 부대는 규율을 잃지 않은 채 항전했다. 특히 랑트리뷔아체 군은 총지휘관의 사망 소식에도 오히려 복수를 부르짖으며 맹렬히 공격해왔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결정된 뒤였다. 전투의 승자가 아르투르 군이라는 것을 흔들 수 있을 변화는 없었다. 결국, 도시 연합군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각기 싸운 이유나 출신지가 다른 지라, 항복하거나 철수하는 과정도 다양했다.

우선 랑트리뷔아체 공화국의 군대는 마지막까지 규율을 전혀 잃지 않았다. 전장 후방에 있던 언덕으로 모여 들여 재집결했다. 아르투르는 그들에게 카밀을 보내 화평을 제의했다.

“아르투르 공께서는 그대들의 용맹을 높이 사, 명예로운 퇴각을 제안하셨소. 여러분이 병력을 추슬러 퇴각한다면 추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셨소이다. 오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니 이쯤에서 끝내자는 말씀도 하시더군.“

딱딱한 카밀의 말에 랑트리뷔아체의 젊은 사령관, 잔다이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곳에서 물러나면 패배를 인정하는 게 된다. 국익도 막대한 손실을 입을 거고, 내가 존경해 마지않던 아그나델로 장군의 유산도 끝이 나겠지. 레무리아 통일의 대업도 저 멀리로 사라질 것이다.’

휘하 병사들은 단칼에 거절하고 재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여전히 벌판에 다른 동맹군들이 많으니, 자신들이 반격에 나선다면 그들도 합세할 거라는 논리였다.

“사령관 각하! 당장 장군의 복수를 하고 조국을 지킵시다.”

잔다이스는 그들보다 더 멀리 보아야했다. 그가 볼 때 소위 “동맹군”이란 놈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잔여 병력을 되살려서 돌려보내야 할 책임도 있었다. 이런 시기에 군사력은 곧 도시의 생존과 직결된다.

‘도시의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지.’

“그대들의 주군이 포로와 군기에 대해선 언급하신 바가 있었소?”

“걱정 마시오. 여러분이 포로를 해치지 않는 한, 결코 포로를 해하실 분은 아니오. 군기도 평화의 대가로 요구하신다면 돌려주실 거요.”

“그렇다면 수락하지. 그대의 주군의 제안에 경의를 표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우리는 이곳에서 사흘거리 이상으로 물러나겠습니다.”

랑트리뷔아체의 강군들은 잔여 병력을 수습해 조직적으로 나르지아노 벌판에서 빠져나갔다. 가장 강력한 세력이 떠나니 나머지의 항복을 받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피오렌치아의 군인들은 곧 바로 목숨만 살려두면 전원 항복하겠다고 했다.

“그러지.”

피오렌치아 인들은 주저 없이 무기를 내던지고 자진해서 수갑을 찼다. 아, 굴리엘모와 귀족 기병대는 그제서야 뭔가를 해보려다가 아르투르에게 사로잡히는 결말을 맞이했다. 도시에 고용된 여러 이름난 용병단들은 아르투르에게 돈만 지불해준다면 편을 바꾸겠다는 제의를 했다.

“전투 도중에 흥정하는 용병들을 뭘 믿고 쓴단 말이오? 당신들이 해야 할 건 항복이오.”

“그렇다면 무사히 떠나게라도 해주십시오. 우리는 용병일 뿐이니, 관련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르투르는 용병들을 원래부터 경멸했는데, 이들의 작태를 보니 그런 사고가 굳어졌다. 대패를 당했는데 용병단들은 대부분 멀쩡했다. 그 말은 즉슨, 의도적으로 전투를 피했다는 말이었다.

“아니, 너희는 무조건 항복이다. 목숨과 몸값을 지불할 권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내 재량 하에 들어간다. 알겠나?”

“그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뭉쳐서 싸우겠습니다.”

얼음장 같은 아르투르의 표정.

“그럼 그렇게 하고.”

“……아, 저게 그게.”

“너희들 편한 방식대로 해라. 생각할 시간은 한 시간 주겠다. 그 사이에 마음대로 도망치려 하면 공격의 대상이 될 거다.”

“저기, 랑트리뷔아체 군은 저희보다 훨씬 수도 많고, 여러분도 많이 죽였고, 더 위협적인데 그냥 보내주시지 않았습니까? 저희에겐 왜 그런 자비를 베풀어주시지 않는 겁니까?”

아르투르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아니, 랑트리뷔아체 애들이야 누가 봐도 최선을 다해 싸웠잖나. 적이라도 존중받을만한 자들 아닌가? 반면에 너희들은 전쟁 중에 무엇을 했는가? 이곳저곳 노닥이다가 돈이나 타먹으려 한 게 전부지 않나? 한심한 놈들 같으니.”

“그, 그게 결과적으론 공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네 이야긴 별로 더 듣고 싶지도 않다. 난 용병들이랑 협상 안하거든. 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결투 재판은 받아주마. 억울하면 너도 승자해.”

난감해진 용병대장들은 돌아와서 대원들에게 의사를 물어보았다.

“저기 대장, 듣자하니 은방패 용병단 포로들도 그냥 풀어줬다고 하던데요. 목숨 걸고 싸울 필요까지 있겠어요?”

“하지만 무기를 압수당하면 앞으로 우린 뭘 먹고 살란 말이냐….”

“무기야 다시 사면 그만이지만, 목숨은 잃으면 끝이란 걸 명심합시다.”

결국 용병들도 모두 항복했다. 군소 도시들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카니아와 제라니아가 관건이었다. 카니아의 군대는 앞으로 백년 간 두라노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해왔다. 그래서 아르투르는 조약을 맺고 그냥 보내주었다.

제라니아와의 군대는 북구인들을 거쳐서 협정을 맺었다. 몇 가지 보상을 받고 무사히 보내준다는 조건이었다. 북구인들은 아르투르와의 약속에 따라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제라니아 참주의 개인 호위병으로 남아있었다.

북구인 3인방, 즉 베오릭, 힐데군드, 토르스탄이 아르투르를 찾아왔다.

“배상금 좀 물고, 다신 두라노 땅을 넘보지 않겠다고 선서하는 것, 그리고 제라니아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할 것. 데로드는 앞의 두 조건엔 동의했지만, 마지막 문제는 내정이니 너희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하던데.”

짜증 섞인 아르투르의 목소리.

“지금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닐 텐데?”

힐데군드는 협상테이블 위에 군홧발을 올려두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 귀찮으니까 이쯤에서 수락하자고. 우리도 데로드의 신변은 책임져줘야 되는 입장이거든? 그쪽도 피해 심해 보이는데, 대충 넘기지?”

“그건 힐데군드 말이 맞다. 전쟁에는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데로드는 내 친구라서 보호해주고 있다. 이런 조건으로 정리해줬으면 하는데.”

아르투르는 따져 물으려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던 터라 결국 수락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그쪽 고용주는 별 말 없던가? 갑자기 다 이긴 것처럼 보이던 전투를 네가 물러나서 진 셈이잖아.”

베오릭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응? 마음에 안 들면 지가 군대를 이끌었어야지. 뭐, 어차피 그 자식 내 친구야. 별 일 없을 걸? 상황이 정리되면 곧 바로 찾아가겠다.”

아르투르는 돌아가는 북구인 삼인방을 보며, 조만간 저쪽 진영에 무슨 일이 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뭐,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긴 하군.’

아르투르의 시선은 나르지아노 강가에 멈추었다. 강가는 핏물로 붉게 물들었고, 강을 건너지 못하고 살해당한 이들의 유해가 강물에 떠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벌판에는 쓰러진 자들의 유해와 병장기만이 가득 널려있었다. 까마귀 때와 들개들이 귀신 같이 먹잇감을 찾아 몰려들었다.

‘저 녀석들이야말로 이번 전투의 진정한 승자로군.’

아르투르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여명을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오늘 자신이 지휘했던 돌격은 전쟁사 길이 남을 예술 작품이었다. 자신이 옛 거대한 싸움들에 대한 기록을 보며 공부를 해왔듯, 후대의 기사들은 오늘의 싸움을 완벽한 기병 돌격의 사례 중 하나로 삼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전투가 가진 정치적 함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정면에서 자유 도시 연합군을 완파해버렸다. 만 명도 넘을 적들이 쓰러졌고, 그보다 많은 이들을 포로로 잡았다. 살아남은 적들조차 달아나기 바빴다. 즉, 자유 도시들의 야전군이 완전히 소멸했고, 방위 능력을 상실한 이상 전쟁은 끝난 것이었다.

‘전혀 개운한 기분이 느낌이 들지 않는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투의 흥분에 몸을 내맡기고 적들을 도륙해왔건만, 자신의 정신은 그걸 자랑하기보다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지금의 음울함과의 괴리를 느꼈다. 다른 이들은 어떤가 싶어 바라봤다.

레오폴트와 기사들은 벌써 자기들끼리 모여들어, 무기에 가득 묻은 피조차 닦아내지 않은 채 왁자지껄하게 서로의 전공을 자랑하고 있었다. 누가 더 큰 공을 세웠는지, 누가 가장 큰 보상을 받아야할지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는 아군 무장병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주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이들은 상처 부위를 붕대로 싸맨 후, 가치 있는 것을 찾아 시체를 뒤지고 다녔다. 이 전문 살인자들은 아주 냉정했다. 부상자를 발견해도 신경 쓰지 않고 돈이 될 만한 것만 털어갔다. 저항하려 들면 곧 바로 죽이려 들었다. 만약 아르투르가 없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두 집단과 달리, 두라노 출신 병사들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부상병들을 실어 날랐고, 쓰러진 전우들의 시체를 수습했다. 몇몇은 복수심에 가득 차 포로들을 향해 무기를 뽑아 들었다.

“포로는 무슨 놈의 포로야! 다 죽여 버려!”

동료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모습을 보자, 포로 호송병들은 마음속 복수심과 아르투르가 내린 명령 사이에 갈팡질팡 하느라 대응할 시기를 놓쳤다. 한 사내만이 그들 앞을 정면으로 가로 막았다.

“쓸데없는 짓 말고 대열로 돌아가라.”

그들을 가로 막은 사내는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노련한 살인자의 풍모가 온 몸에서 느껴졌다. 등에는 장궁을 짊어지고, 오른손은 장검의 손잡이에 놓아둔 채였다. 그의 사나운 눈빛에 젊은이들로 이루어져있던 병사들은 주춤했다.

“당, 당신이 뭔데 날 막아! 우리의 복수는 정당하다고!”

카밀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너희 심정을 이해하느니, 공감한다느니, 용서해야한다느니 하는 소린 안하겠다. 다 좆같은 개소리니까. 이놈들을 살려 둬야하는 유일한 이유는 몸값을 낼 놈들이 때문이다.”

“고작 돈 때문에 내 친구를 죽인 놈들을 살려두겠다고?! 그런 개소리 따위!”

한 병사가 곧장 무기를 뽑아들려고 했지만, 그 전에 카밀의 강철 같은 주먹이 날아가 놈의 안면을 강타했다. 바닥에 나뒹구는 병사를 보며, 카밀은 굉장히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애송아. 친구의 유가족들에게 네가 생활비를 지급할거냐? 팔 잘려 농사 못 짓는 놈들은 대신 지어 줄 거고? 말해봐라. 네놈에게 그럴 돈은 있나? 능력은 되고?”

무기를 집고 일어나려던 청년은 카밀의 말에 이를 질끈 깨물 뿐이었다. 흥분해서 달려들던 병사들도 카밀의 분위기와 말에 압도되어서, 어영부영 물러났다. 뒤늦게 에쿠잘루스를 타고 달려온 아르투르는 정리된 상황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었네. 카밀,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 일이 났을거야.”

카밀은 무표정한 태도로 답했다.

“원래는 끼어들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그런가? 아무튼 자네는 끼어들어서 비무장한 포로들이 죽는 것을 막았네. 내가 명예를 논해봐야 반발심만 들었을 테지만, 자넨 그것도 무마시켰고.”

카밀은 냉소적인 태도로 말했다.

“당연한 이치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전쟁을 처음 경험해본 어린애들은 그 경험에 사로잡혀서,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게 되어버리죠. 하지만 아닙니다. 그 뒤로도 삶은 이어질 뿐이죠. 그 경험을 극복할 수 있든지, 없든지, 세상은 그냥 흘러갑니다.”

카밀의 대답을 들은 아르투르도 허무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전투의 흥분도, 승리의 영광도 한 순간이지만 싸움의 결과는 그 뒤로도 수십 년을 이어진다. 자신이 믿는 명예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여야겠는가. 무엇보다, 이 끝에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나는, 정말로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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