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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11화 (111/248)

111

전체적인 전황은 아르투르 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초기의 돌격에 수천 명이 쓰러졌지만 압도적으로 우세한 숫자를 이용해 양익에서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전투의 승패는 단 한 곳으로 모아졌다.

아르투르가 이끄는 기사들이 모든 장애를 뚫고 나가 적장을 베면 아르투르 군의 승리, 반대로 그것만 저지하면 도시 연합군의 승리였다.

***

아르투르의 기사대를 맞이한 건 적의 기병들이었다. 각종 도시에서 온 깃발을 휘날리는 혼성 기병대였다. 장비만 봐서는 꽤 그럴듯했다.

“자유민들이여, 진격!”

아그나델로 장군이 지휘봉을 휘두르자, 자유민 기병들은 기사들을 향해 돌격해왔다. 아르투르도 그에 맞서 기병대를 집결시켰다. 숫자로는 엄청난 열세였다. 당장 돌격할 수 있는 기사들의 숫자는 80여 명에 불과했고, 그들도 두 차례 보병 대열을 돌파하느라 지쳐있었다.

“하하하하하. 정말로 저런 놈들이 우리랑 싸우겠다고?”

그러나 그들을 본 알튼 남작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고,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레오폴트는 후방 지휘를 카밀에게 맡겨둔 채 근위 기병대를 데리고 도착했다.

“허, 뭐야. 지금 저 도시 국가 놈들이 우리에게 기병전을 거는 거야?”

아르투르와 함께 말을 달려온, 두라노 출신의 근위기병이 말했다.

“우습게만 보실 일이 아닐 겁니다. 저쪽에도 귀족들이 있고,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기병이 되거든요.”

그 말에 두 왕자는 물론, 다른 귀족들도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대답은 레오폴트였다.

“귀족이라, 이 땅에선 돈만 만지고 다닌 놈들도 귀족을 칭할 수 있었지.”

그는 마상창을 높이 들어올렸다.

“아르투르! 놈들에게 푸른 피가 무엇인지 보여주자. 우리는 싸우기 위해서 태어났다! 진정한 귀족이란 전쟁을 위해 훈련 받은 사나운 전사들이다! 왕들은 기사이며, 장군이다. 상인과 장인들 따위가 감히 우리에게 대항해! 쓸어버리자!”

“가자! 전우들이여! 상인 귀족들께서 우리 군사 귀족들에게 도전하신다면, 수가 좀 맞지 않더라도 결투를 받아드려야지. 돌격!”

재정비를 마친 기사대열이 돌격을 시작했다. 자유 도시의 기병대는 벌써부터 돌격 속도가 제각각이어서 대열이 흩어졌지만, 기사들은 똑같은 속도로 일사분란하게 공격을 가했다. 훈련도와 기량, 사기에서 모두 극명한 차이가 났다.

“진정한 기사가 어떻게 싸우는 지 가르쳐주자! 맹렬히 싸워라!”

“덤-벼-라아아아!!”

아르투르가 괴성 내지르며 여명을 휘두르자마자 적 기병이 둘로 갈라져버렸다. 그의 뒤를 따르는 기사들도 함성을 지르며 투혼을 발휘했다.

“아르투르 공이 혼자 공을 세우게 두지 말자! 돌격하라!”

시라노의 외침에 기사들도 호응해서 목소리를 높인다.

“이걸로 스물다섯!”

“난 서른이다!”

두 왕자는 이제는 여유롭게 숫자까지 새어가며 적들을 쓰러뜨렸다. 분명히 아르투르의 군대를 압도하고 있던 연합군 기병대는 서서히 밀려나며 대열에 구멍이 송송 뚫렸다. 직업 전사들과 일 년에 한 달만 훈련하는 예비군의 차이였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아그나델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괴물이 아르투르 한 놈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좋아. 이것도 버틸 수 있나 보자고. 왕자님들. 2진, 돌격하라!”

아그나델로의 외침에 맞추어 대기하고 있던 2열의 기병대가 창을 꼬나 쥐고 돌격했다. 이들은 나름 고르고 고른 정예 기병들이었다. 하지만 무너지는 댐을 몸으로 막아봐야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이미 기세가 오른 아르투르와 기사들은 눈에 보이는 적은 뭐든지 박살내버렸다.

단순히 그들이 기사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군인으로서도 하나의 완벽한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를 자신들의 손으로 쓰고 있다는 성취감이 그들을 움직였다. 모든 것을 잊었다. 오만한 자부심도, 생존의 욕망도 잊혀졌다.

생에 두 번 다시 할 수 없을 최고의 전투를 치르고 싶은 싸움꾼들의 마음! 후세의 기사들이 연대기를 읽으며 부러워 할 싸움의 현장에 있었다는 도취감이 그들을 지배한다.

“승리가 눈앞이다!”

“와아아아아 - !”

한 명의 기사가 적을 베면, 뒤편의 기사가 완벽히 그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해줬다. 완벽한 협동 공격과 상호 보조가 아르투르의 기사대가 이뤄내고 있는 전설의 원인이었다. 정면에서 몰려드는 도저히 감당 불가능할 것 같은 무거운 공세는, 두 왕자와 최정예 기사들이 정면으로 받아쳐버렸다.

“맙, 맙소사. 저게 뭐야. 단 둘이서 몇 명을 쓰러뜨리고 있는 거야?”

적군들조차 넋을 놓고 두 사람의 활약을 바라봤다. 악마가 따로 없었다. 조우하는 족족 채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리니, 아무리 수가 많아도 소용이 없었다.

“구경만 하고 있을 테냐! 모두 덤벼라!”

아르투르의 고함이 터질 때마다 적들은 투지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전염된 공포가 정신을 마비시키고 행동을 굼뜨게 만들며, 판단력을 잃게 한다. 이들도 나름 전투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선별된 정예병이건만, 그건 사람을 상대할 때의 이야기였다.

“승리다!!!!”

레오폴트는 달아나는 적들을 보며 함성을 내질렀다. 연합군 기병대의 대오가 완전히 깨지고, 다른 연합군들도 아군들이 달아나는 모습을 보며 도망친다. 그러자 모든 전선에 걸쳐 아르투르 군은 더욱 자극을 받았다.

“아르투르 공께서 적을 밀어붙이고 계신다! 모두 힘내라!”

“와아아아아아아!”

전세가 뒤바뀌는 것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전우들이여! 승리에 종지부를 찍으러 가자! 나를 따르라!”

대부분의 기사들은 너무 오래 싸워 쉴 필요가 있었지만, 의지를 쥐어짜내 그들을 이끄는 두 왕자를 따라갔다. 아르투르는 패잔병들 따윈 신경쓰지 않았다. 목표는 후방에 있는 지휘 막사였다. 직접 공격당하는 걸 막기 위해 여러 보병대가 배치되어있었지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도, 도망쳐!”

창과 방패를 버리고 도망치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바다가 갈라지듯 적병은 양 옆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를 두 왕자의 말이 내달린다. 그리고 뒤를 따르는 기사 무리들. 마침내 지휘 막사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방해물도 남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에쿠잘루스의 옆구리를 걷어차 속도를 더욱 높였다.

“히히히히히히힝 - !”

지금껏 에쿠잘루스는 아군들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지 않았다. 주인의 명령을 알아들은 그는 순간적으로 다릿심을 최대한 발휘했다.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며 아르투르의 금빛 머리카락이 투구 사이로 휘날렸다.

황소만한 백마가 피와 내장을 뒤집어 쓴 채 달려오는 모습은 흡사 신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아르투르는 여명을 쥐고 적들을 살폈다. 적은 정말로 마지막 예비대밖에 남지 않아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뛰어난 자들, 근위대이리라.

‘숫자는 삼 십 가량. 마찬가지로 장창병에 석궁수야. 하지만 훈련도가 잡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군. 진영도 완벽하고.’

그때, 백합의 문장을 휘날리는 피오렌치아의 귀족 기병들이 달려왔다. 선두에선 굴리엘모가 어렵사리 말을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정면에 있는 랑트리뷔아체 군만 보고 돌격했다.

“도, 돌격할까요?”

피오레 가문의 부관이 내뱉은 목소리는 판금 투구 속에서 울렸다. 실은 굴리엘모도 다를 바 없었다.

‘시발, 난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고. 아그나델로 놈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회군하고 있었을텐데. 저딴 놈들 상대로 검과 방패로 어떻게 이겨.’

결국 굴리엘모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지나가는 상황을 바라만 봤다. 그들을 변호하자면, 전부 전투 기량이 형편 없는 건 아니었다. 피오렌치아의 귀족들은 기사가 아닐지언정 기본 소양으로서 무술은 배웠다. 재력은 엄청나니 최고급 판금 갑옷들만 입었고, 전투마도 동방에서 수입한 최고의 것들이었다.

단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부를 저버리고 싸움질이나 하는 건 도저히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도망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그런 오묘한 상황이었다.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유리해지면 끼어들자.’

굴리엘모의 결정은 합당했다. 수지에 맞지 않는 일은 피하고, 이득이 보장되는 일엔 기꺼이 가담하고. 평생 해온 방식이었고 그의 성정은 잇속이 중요한 은행일에선 굉장한 재능이었다. 단지, 기사들이 끼어든 전쟁터는 비이성적인 투지가 지배하는 공간이었을 뿐이다. 합리성만 따져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광기의 공간. 결국, 피오렌치아 귀족들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

아그나델로는 돌격해오는 아르투르와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장군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놈이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군. 수만의 병력으로도 막지 못한 걸, 삼십 명의 근위대로 막을 순 없겠지.’

시선을 돌려보니 시민군 보병대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고 있었고, 자신의 근위대가 마지막 남은 병력이었다. 피오렌치아의 얼간이들은 도망 칠거면 도망치고, 싸우려면 싸울 것이지,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도망치는 와중에, 랑트리뷔아체 출신의 병사들만은 대열을 이루며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제때 자신을 도와주러 도착할 공산은 없었다. 아그나델로는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나도 한 때는 저 젊은 기사들만큼 강인했지. 기사 세 명과도 동시에 싸울 수 있었고.’

이제는 기사 한 명분의 역할도 겨우 해낼법한 늙은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은 싸우다 죽을 용기정도는 있었다. 노장군은 근위병들의 앞으로 나서며, 기수병에게 그리폰 깃발을 건네받았다. 아그나델로는 오른손으로 검을, 왼손으로 깃대를 쥐었다.

“도망치고 싶은 자는 떠나도 좋다!”

근위병으로 선발되는 자 중에 여기에 항복할만한 자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은 여기까지라고 해도, 이 젊은 병사들마저 데려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항복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나?

‘그럴 순 없어. 그냥 조국을 위해 죽겠다. 영광스러운 아그나델로로서 죽겠다. 그들도 랑트리뷔아체인이다. 그리폰의 깃발 아래 쓰러지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겨 마땅하다.’

홀로 질주해오는 아르투르가 눈앞에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기사들은 거의 백여 명. 자신에게 주어진 호위병은 서른 남짓이고.

“제군들, 우리가 조국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지금 달려오는 저 금발의 기사를 죽여라! 저 자가 바로 우리의 고향을 짓밟고 파괴하려는 자다! 최후의 명령이며 최후의 부탁이다! 모든 것을 걸고 놈을 쓰러뜨려다오!”

“명령 받들겠습니다!”

“놈의 아버지가 너희의 부모, 조부모들의 목을 베었음을 기억해라! 오‘데르만의 왕들을 여기서 막지 못하면 너희의 후손들도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랑트리뷔아체여, 영원하여라!”

“랑트리뷔아체여, 영원하여라!”

아그나델로는 가장 먼저 검을 휘두르며 돌격했다. 근위병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투철한 사명감으로 가득 찬 그들은 정복자의 아들로부터 고향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던졌다. 아르투르는 그들의 맹공에도 작은 부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얼마 뒤, 다른 기사들이 도착해서 그들을 도륙했다. 그러나 근위병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다. 모든 동료들이 도망치고 싸움에 승산이 없음을 알아도,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달려들었다.

최후의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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