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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09화 (10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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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홀로 연합군의 진영을 향해 에쿠잘루스와 함께 달려 나갔다. 홀로 적진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말과 기수 모두 조금도 움츠려들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비어있는 왼손을 들어 화평의 뜻을 내보였고, 긴장하고 있던 적병들은 길을 열어주었다.

적의 진영을 지나는 아르투르는 슬쩍 상태를 살펴보았다. 적들의 수는 굉장히 많았지만 진영은 난잡했다. 무장병, 훈련 받은 시민군, 끌려온 징집병, 용병, 야만인들. 대충만 살펴도 참 다채로운 모습이었다. 훈련도나 무장 상태도 집단마다 달랐다.

적들의 1선 전력을 맡은 용병들은 무기를 관리하고 휴식을 취해 체력을 회복해야 할 시간에 막사에서 매춘부들과 뒹굴고 있었다. 일부 베테랑들만이 조용히 개인 정비를 하며 지냈다. 한 몫 잡아보려는 시골 청년과 미래가 없이 막 사는 사람, 산전수전 다 겪은 전문 살인자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 같이 모두 퀭한 눈이었다. 자신들과 아무 연고도 없는 싸움에 출세를 위해 전쟁터를 전전하며 사람을 죽인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르투르는 그 점 때문에 항상 용병들을 경멸했다. 이들은 서둘러 싸움이 끝나, 돈을 받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용병들을 지나치자, 이번엔 시민군 진영이었다. 각 도시의 번듯한 휘장이 그려진 질 좋은 갑옷과 잘 정비된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피오렌치아, 카니아, 랑트리뷔아체, 제라니아. 하나 같이 소속된 도시의 깃발 아래 규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청년들로 조국의 영광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엔 살기가 없었다. 사람 하나 찔러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쟁이 빈번한 시대였고, 참전 경험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유한 도시의 주민들은 전쟁을 용병들에게 맡겨왔었다.

‘백병전이 펼쳐지면 이들 중 절반은 바로 각오가 꺾일거야.’

잘려나간 사지가 쓰레기더미처럼 굴러다니고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동료들의 시체를 보는 순간, 머리는 멎게 된다. 그 순간은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런 곳 한 가운데 서 있다 보면 온갖 감정이 들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자신이 죽인 이들에 대한 미묘한 죄책감이 들거고, 그 다음엔 중독될 것 같은 전투의 흥분이 가져다주는 황홀경이 닥쳐오지.’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건 여인과의 잠자리보다 훨씬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그런 것을 몇 번 경험하고 나면, 도저히 평범한 사람으론 돌아갈 수 없게 된다.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도 별 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 된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도 맨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들만이 진정한 전사가 된다. 부적합한 자들은 전장에서 죽거나, 무기를 손에서 놓아버린다.

‘그렇게 사냥꾼이 짐승을 죽이듯 사람을 몰아서 붙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걸 기사들은 진정한 남자가 된다고 부르지. 경험이 오래 쌓인 용병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이곳의 청년들은 자신을 보며 대범하게 도발하면서 자신이 용감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들의 본심은 닥쳐온 두려움을 이겨내고 싶은 심리에 불과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저 불쌍한 자들은 살육이 시작되면 대부분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끼어들었다는 걸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일부는 살아남아 진정한 전사가 되겠지만.

시민군들을 넘어가자, 이제는 연합군의 최고 지휘 막사가 있었다. 아그나델로 장군과 굴리엘모가 나와 팔짱을 낀 채 아르투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백인을 벤 아르투르 공. 기다리고 있었소.”

아그나델로 장군의 말에 아르투르는 냉소적인 태도로 답한다.

“지난번에 왔을 때에는 얼굴조차 보질 못했는데, 이번엔 직접 나와서 마중까지 해주시는구려. 신기하지 않소?”

눈앞의 두 사람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지만, 가식으로 그것을 덮었다. 아그나델로는 여전히 자신감을 잃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굴리엘모는 딱 봐도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다. 한 명은 갑옷이 잠옷처럼 편해보였고, 한명은 온 몸으로 불편함을 내보이고 있었다.

“새로운 항복 조건을 가져오셨다고 들었소.”

아그나델로 장군은 기대가 담긴 시선을 아르투르에게 보냈지만, 아르투르는 거친 목소리로 말할 뿐이다.

“평화 협상이오.”

아그나델로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당신의 군대는 도망갈 수 없소. 퇴로는 차단되었고, 우리 군의 숫자는 세 배가 넘소. 기병 숫자도 두 배는 될 것이오. 양측에서 우리를 떠보던 만프레드는 돈만 가지고 달아났으니, 더 이상 당신의 아군은 없소. 얌전히 도시에 박혀서 대규모 개활지로는 나오지 말았어야지. 이제 당신이 진 거요. 받아들이시오.”

아르투르는 눈을 부릅뜨고 아그나델로를 마주 보았다.

“내가 당신들을 이곳으로 불러낸 것이오. 장군. 내 말 똑똑히 들으시오. 전투가 시작되면 두 시간 안에 끝이 날 거요. 전쟁과는 연이 없는 저 불쌍한 아버지와 아들들을 살육의 현장으로 몰아넣을 셈인가? 당신이 충성하는 조국의 아들들이잖소. 이 미친 짓을 멈춥시다. 내 제안에는 누구도 손해 보는 자가 없소. 모든 것을 전쟁 이전으로 되돌리는 거요.”

“물론! 두 시간 안에 끝이 나겠지. 당신의 군대가 포위되어 괴멸할 테니까. 물론 전투가 벌어지면 수천 명의 랑트리뷔아체 인들이 죽겠지. 하지만 그들은 무궁한 조국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각오하고 왔소. 당신이 수십, 수백 명을 베겠지만 우리 공화국은 그 정도 청년은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소. 사람인 이상, 당신도 말에서 끌어내려 석궁 세례를 퍼부으면 죽게 될 것이고, 등 뒤의 칼날은 막을 수 없을 것이오!”

“장군. 내 간절히 다시 부탁하겠소. 제발. 싸울 의지가 없는 용병들과 전쟁을 겪은 적 없는 애송이들을 우리들의 앞에 세우지 마시오. 당신네 병사들은 전쟁이 끝나고 여인의 품속에서 누릴 쾌락과 안정을 기대하지만, 우리는 죽음의 천사와 입맞춤할 날을 기다리며 전투의 흥분을 찾아다니는 미친놈들이란 말이오.”

여태껏 잠자코 있던 굴리엘모가 아그나델로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군, 피오렌치아는 의견을 바꾸겠습니다. 여기서 종전합시다. 나쁜 조건은 아닙니다. 지금 끝나는 손해는 감당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더 큰 피해를 입기 전에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작 두라노 하나를 위해 이런 위험부담을 무릅쓸 이유가 없습니다.”

굴리엘모는 군사적으론 무능했지만 분석력이나 생존 감각이 형편없는 자는 아니었다.

‘늙은 군인보다는 젊은 상인이 보다 말이 편하려나.’

굴리엘모마저 입장을 바꾸자, 아그나델로도 찜찜함을 느꼈다.

‘기사들은 정면에서 아주 강력하지만, 머리가 잘 안 돌아가지. 놈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을 가하면 고기 방패들로 속력을 저지한 뒤, 정예병들로 말부터 하나씩 처치하면 금방 잡아낼 수 있어.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애송이가 문제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야전의 승패는 우리가 조금 유리한 정도다.’

그러나 아그나델로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가 평생을 기다려온 꿈은 고향의 위대한 장군으로서 불멸의 명성을 얻는 것이었다. 지금, 그게 눈앞이었다. 평생에 걸쳐 패배 한번 없이 살아왔으며, 어떤 추문도 일으킨 적이 없었다. 오만함에 취해 대중의 눈에 거슬렸다가 처참히 몰락한 자들과 달리, 항상 공화국의 전통을 존중해왔다. 조금의 업적만 더 남긴다면, 랑트리뷔아체 시민들이 두고두고 기리는 가장 위대한 영웅의 반열에 들 수 있어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의회는 내게 실패한 원정의 책임을 묻고 은퇴를 명령하겠지. 다시 원수의 지휘봉을 잡을 일은 없을 것이고, 그러면 내 경력의 마지막에 오점이 남는 것이다.’

안될 말이었다.

‘난 평생을 조국에 헌신해왔어! 내게 합당한 말년은 조국의 수호자이자 존경 받는 국가 원로로 젊은이들의 숭배를 받아 마땅해! 할 줄 아는 거라곤 날 깎아내리는 게 전부인 기생충 정치가들에게 퇴물이라고 조롱 받아선 안 된다!’

그는 자신이 평생 동안 일궈온 빛나는 업적에, 하나의 오점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사생활을 포기하며 올라온 자리였다. 명예는 그의 인생이고, 모든 것이었다! 차라리 패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장렬히 싸우다 죽으면 순교자로서 위인의 반열에 오를 터이다.

‘이 늙은 몸뚱이, 어떻게 살든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 조국의 국기를 수의삼아 쓰러진다면 군인에게 그보다 큰 영광이 어디 있으랴?’

만약 승리한다면, 자신은 페르넬의 아들을 패배시키고 레무리아 반도를 수호한 영웅으로 떠오를 것이다. 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될 터이다! 랑트리뷔아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남으리라!

‘패배할 때 잃을 것은 없고, 이기면 모든 것을 얻는다.’

“굴리엘모. 겁쟁이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당신은 돌아가서 황금이나 만지시오. 나는 강철과 피를 택하겠다! 항복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 승리가 우리를 기다린다!”

“그렇다면 피오렌치아 군이라도 철수시키겠소! 항복, 난 항복이야!”

“이미 늦었소.”

아그나데로는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전령에게 손짓했다. 진격의 북소리가 나르지아노 평원에 가득 울려 퍼졌다. 평원을 가득 매운 연합군의 보병대가 파도처럼 전진하기 시작했다! 노장은 오랜 세월을 버텨온 바위처럼 굳게 서서, 아르투르를 노려보았다.

“자, 누구의 말이 옳은 지는 전장에서 가려보자! 페르넬의 아들이여. 승리하는 자가 역사를 손에 쥐리니! 나의 조국, 랑트리뷔아체 공화국은 불멸의 명성을 얻으리라!”

아르투르의 표정은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국가의 명성을 위해 아래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 당신의 명예요?”

“개인의 기사도 따위보다는 훨씬 추구할 만하지!”

아르투르는 곧장 말머리를 돌려 아군 진영으로 돌아왔다. 누구도 그의 앞을 가로 막지는 못했다. 남은 것은 일전뿐이었다.

***

“전원, 전투 대형으로!”

북소리에 맞춰 적들이 전진해오는 동안, 지휘권을 인수받은 레오폴트도 기민하게 명령을 내려 대응하고 있었다. 양익에 보병대가 배치되었다. 좌익은 시라노가, 우익은 조레스가 지휘했다. 중앙에는 알튼 남작의 지휘 아래 대규모 기병대가 사열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지휘하고 있는 레오폴트는 후방에 예비대와 남아있었다.

질풍과도 같은 속도로 돌아온 아르투르는 곧장 기병대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선두에는 마갑을 씌운 육중한 데스트리에에 올라탄 기사들이 마상창을 내민 채 도열하고 있었다. 그들은 몰려오는 적들을 보며 당장 말을 내달리고 싶어 했다.

“아르투르 공! 돌격은 언제입니까! 저 하찮은 놈들이 거들먹거리는 꼴을 더 이상 못 봐주겠습니다!”

“옳소! 돌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단숨에 모두 쓸어버립시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때가 아니오. 모두 대열을 지키시오!”

기사들은 근본이 거친 사내들이었고, 군인이 아닌 전사들이었다. 의무보다는 스스로의 영광과 명예를 중히 여기는 자들. 만약 명령을 내리는 자가 아르투르가 아니었다면 이미 돌격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적의 보병 대열은 아주 두텁고, 서로를 지켜주고 있다. 저런 곳에 돌격해봐야 한두 곳 무너뜨린 뒤엔 뒤가 없어. 레오폴트가 기회를 만들어주길 기다린다.’

노련한 기사들도 같은 판단을 하는 지 곁에 선 젊은 기사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레오폴트는 명령을 내려 군단 전체를 서서히 후퇴시켰다.

“도망가는 거요?! 아르투르 공! 당신의 사촌은 겁쟁이인가보군! 오‘데르만의 이름이 아깝지 않은가?!”

어느 젊은 기사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자 아르투르는 폭풍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닥치고 내 지시에 따라라! 항명하는 자는 나와 목숨을 건 결투를 하겠다는 의사로 알겠다!”

그러자 기사들은 다시 조용해졌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지시에 따라 말을 몰아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일사불란한 후퇴를 하는 아르투르 군과 달리, 다양한 소속으로 이뤄져있는 연합군은 행동이 제각기 달라졌다. 누군가는 곧 바로 따라갔고, 누군가는 멈춰 서서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 순간, 아르투르는 적의 보병대 사이에 있는 작은 간격을 보았다.

“나를 따르라! 영광스러운 승리가 너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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