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08화 (108/248)

108

양 측 군대가 택한 전장은 드넓은 평지였다. 오른편으로는 물살이 거센 나르지아노 강이 흐르고 있지만, 주변에는 숲 하나, 언덕 하나 없는 정직한 평야였다. 양군은 모두 이곳에서 교전하길 원했기에 조우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유는 각기 달랐다.

“수적 열세인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사들의 돌격뿐이다. 그러니 최대한 땅이 평평하고 고른 전장을 택하겠다. 나르지아노 강가 옆으로 유인하도록.”

“적의 정예병들은 오랜 전쟁으로 단련되었지. 질적으로는 우리가 불리하니, 대군을 운용해서 양으로 찍어눌러야한다. 나르지아노 강가로 사생아 왕자놈의 군대를 불러내라!”

그리하여, 결전 당일 날, 아르투르는 평원을 가득 채운 연합군의 막사를 볼 수 있었다. 직접 에쿠잘루스를 몰고 나가 정찰을 해보니 최소한 3만 5천, 높게 잡는다면 4만 5천은 될 것이었다. 그토록 많은 패배를 겪고도 숫자 하나만큼은 정말 많았다.

‘이쪽은 다 합쳐서 1만 3천 남짓.’

양 측 모두 동원 가능한 병력을 닥닥 긁어모아온 결전이었다. 아르투르가 믿는 것은 이백 명에 달하는 기사들과 그들의 종자들이었다. 양 진영이 대치하며 싸움의 시작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맞춰보고자 노력하고 있을 때, 양 측 모두에 제 3자의 사절이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백인을 벤 아르투르 공, 그리고 존귀하신 레오폴트 백작께 인사를 올립니다.”

인사를 올리고 있는 차가운 인상의 사내는 금괴 기사단의 아밋서텐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그와 구면이었다.

“큰 전쟁이 있는 곳엔 항상 너희가 있더구나. 전쟁의 시체를 파먹는 까마귀들이나 다름없구나.”

아르투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사절은 허리를 바짝 숙인 채 그들의 용병단장, 만프레드의 제안이 담긴 서신을 양손으로 내밀었다. 그곳에는 메마른 필체로 쓴 간결한 한 문장이 있었다.

-제 용병대가 상대편에 가담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돈을 지불해주십시오. 경매는 지금 당장, 나르지아노 강가 옆에서 열겠습니다.-

그 결과, 아르투르와 굴리엘모가 각각 만프레드의 막사로 향했다. 금괴 기사단은 4천의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대형 용병단이었다.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라면 충분히 전세를 바꿀 여지가 있는 전력이었기에, 양 진영 모두 눈독을 들였다.

‘적어도 저쪽으로 붙는 건 막아야해.’

용병대장 만프레드의 막사는 왕의 막사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곳이었다.

“아, 오랜만입니다! 아르투르 왕자님! 아르길락 가문의 비천한 서자가 귀한 분을 뵙는군요.”

만프레드는 흠 잡을 것 하나 없는 자세로 예를 갖추었지만, 아르투르는 대꾸하지 않고 물과 소금부터 요구해서 그것을 삼켰다. 자신이 볼 때 만프레드는 접대의 관습을 어길 정도로 막 나갈 녀석은 아니었다.

“돈은 얼마나 가져오셨습니까? 왕자님. 아시다시피 저쪽의 뒤엔 황금 백조 은행이 있는데요. 우정을 봐서 제가 좀 깎아드릴 수는 있는데… 그래도 저희 고용비를 감당하실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아르투르는 의자의 팔걸이에 손을 얹은 채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대꾸도 없었다. 그 때, 굴리엘모가 들어왔다.

“맞는 말을 하시는군. 콘도티에레(용병대장). 이것만 기억하시오. 이 세상 누구도 우리 가문보다 부유할 순 없다는 걸. 선물을 가져왔소이다.”

굴리엘모가 장정 하인들을 시켜서 가져온 상자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얼마나 금이 많은 지, 번쩍이는 금빛이 막사 바깥까지 새어나갔다.

“이건 피오레 가문이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오. 같은 상자를 일곱 개나 더 가져왔소이다. 말씀하신대로 우리를 위해 싸워주신다면 모두 당신의 차지가 될 것이오.”

“오, 아주 좋군요! 좋습니다. 이번엔 아르투르 공의 제안을 들어보죠. 그대는 얼마나, 뭘 가져왔습니까?”

아르투르는 길게 하품을 하더니, 품에서 두루마리 한 장을 꺼내 만프레드에게 내밀었다. 처음에 만프레드는 공손하게 두루마리를 받았지만, 내용물을 보고는 얼굴을 팍 찌푸렸다.

“…이거 뭔데?”

“기억 안나나? 네가 무사히 퇴각하는 조건으로 지불한 돈이잖아. 그걸 저 친구네 집에 있는 은행인가 뭔가에 가져다주면 돈으로 바꿔준다면서 나한테 준 거야.”

“아니, 예금증서인건 아는데…. 허! 금화 2만 닢? 이걸론 턱도 없이 모자란데. 지금 저 상인 친구가 가져온 건 선물만 금화 10만 닢은 될 것 같은데. 이러면 내가 어디 붙어야 할 지는 뻔하잖아. 너랑 싸우고 싶지 않다니까? 조건을 좀 더 올려보는 게 어때?”

아르투르는 따분한 듯이 마했다.

“서로 사정 알텐데 흥정은 그만하지. 비교가 될 걸 해야지.”

만프레드는 정색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노려봤다.

“내가 정말로 저쪽으로 넘어가도 이길 자신이 있나보지? 네가 희망을 걸고 있는 건 기사들의 돌격 뿐일 텐데, 우리가 가세한다면 네가 랑트리뷔아체 군을 무너뜨리기 전에, 네 보병대가 먼저 무너질 것이다. 위기상황 이라는 걸 모르겠나? 내가 저쪽으로 넘어가면 넌 무조건 진다니까?”

아르투르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친근한 목소리를 자아냈다.

“이봐 친구. 거짓말하면 못 써.”

“거짓말이라니! 너도 바보가 아니니 알텐데. 우리 금괴 기사단의 저력을!”

“그럼. 잘 알지. 굉장히 잘 알고 있으니까 하는 이야기야. 왜냐면 너희가 저쪽에 붙을 리가 없거든.”

만프레드의 표정은 점차 분노로 일그러져갔다.

“우리의 명예와 자부심을 모욕 하는 거냐!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다. 아르투르! 같은 사생아 출신에, 기사라면 누구나 숭상할 무예! 거기에 올곧은 심성까지. 그런데 어째서 너는 나를 하나도 인정해주지 않는 거냐?!”

아르투르는 짜증나는 표정을 지었다.

“친구. 난 이미 네게 나머지 값도 지불했어. 그 금화 2만 닢이 전부가 아니라고. 너도 잘 알 텐데?”

순간 만프레드의 분노한 얼굴에 당혹스런 감정이 스쳐지나갔지만, 그는 계속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판이 커졌으니 2만 닢으론 어림도 없다! 우리 용병단의 명성에 걸맞는 비용을 지불해!”

“나머지 돈은 금화가 아니라 네 목숨값이다. 친구. 네가 나를 잘 알듯이, 나도 널 잘 알아. 그런데 왜 자꾸 거짓말을 하지? 남자랑 노닥거리는 취미는 내게는 없어. 얼른 끝내고 가지.”

그러자 만프레드는 정색하고 화난 표정을 완전히 풀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주면 안 될까?”

고개를 단호히 젓는 아르투르.

“응. 안 돼. 돌아가 나머지는 네 목숨값이면 충분하지. 솔직히 말해봐. 애초에 저쪽에 붙을 생각 없잖아. 여기 놈들이 용병대를 어떻게 운용하더라? 가장 위험한 곳에 몰아넣지 않나? 그러면 넌 얄짤 없이 내가 이끄는 기사대와 마주칠 거고, 그럼 승패에 관계없이 죽을 거다. 아니 내가 어떻게 해서든 죽일 거다. 너 뿐만이 아닌 기사단 모두를 죽일 거다. 네 아래에 있는 그 영악한 기사들이 그걸 모를 리 없지.”

“….”

“네가 말한 대로, 용병은 돈을 얼마나 주건 죽을 싸움은 안하잖아. 고위험, 고수익이라면 하는 놈도 있겠지. 하지만 나랑 싸우면 확정 사망, 고 수익인데 그런 의뢰를 받을 용병이 어딨겠어?”

험악한 표정을 연기하던 만프레드는 재차 한숨을 내쉬더니, 아르투르가 준 예금 증서를 품 안에 쑤셔넣었다.

“후우… 그래. 고맙다. 아주. 내 비자금이라도 돌려줘서. 젠장맞을 이래서 눈치 빠른 놈은 싫다니까, 이렇게 대놓고 강짜를 부리니 수작을 부릴 수가 없네. 이번에도 착한 내가 참는다 참아. 이번에 내가 널 도왔다는 걸 잊지마!”

아르투르는 칼 같이 그의 말을 잘랐다.

“싫다. 이번 일에서 난 너한테 빚진 게 아무것도 없다.”

“쌀쌀맞은 새끼… 젠장, 친해질 여지 하나 안주네. 들었지? 피오레 가문의 도련님. 이렇게 마무리 되었어. 가져오신 보물들 내버려두고 떠나.”

굴리엘모는 모욕감과 당혹감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저 보물들은 어디까지나 우리 군에 고용되었을 때 주는 용병료야! 잘 싸우면 그 배로도 보상할 수 있는데, 이런 어리석은 길을 정말로 택할 셈이냐?”

혀를 차는 만프레드.

“쯧쯧쯧. 이 친구야. 내가 보낸 서신을 다시 읽어봐. 뭐라고 되어있냐? 내가 상대편에 가담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금화를 지불해달라고 되어있지? 말 그대로야. 저 돈은 내가 아르투르 진영에 합류하지 않는 대가로 받아가는 돈이야.”

“아니, 그딴 억지가 어딨단 말이냐! 금괴 기사단의 명성도 헛것이었나 보군! 일을 하지 않고 돈만 받아가겠다니!”

만프레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굴리엘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허 이 친구. 상황 파악 안 되는 것 같은데. 내가 아르투르한테 제대로 용병료 받고 합류하면 너넨 무조건 져. 상황이 변하면 용병료도 다르게 지불하는 거지. 선례? 그거야 지금부터 만들면 그만이고.”

굴리엘모는 기막힌 표정으로 만프레드를 노려봤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계약을 맺은 고용주는 여태껏 없었다. 이건 고용이 아니라 조공 아닌가! 대 피오레 가문이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된 것인가?

“날 원망하지마. 친구. 너희 피오레 가문 평판이 이 업계에서 얼마나 안 좋은지 알아? 너흰 용병만 고용하면 가장 위험한 곳에 소모품처럼 던져대잖아. 지들은 손 하나 까딱 안하면서. 다른 새끼들은 맘대로 해. 하지만 내 단원들은 그런 식으로 죽게 할 수 없다. 명심해두라고. 도련님. 피 흘리는 일을 시키고 싶다면 너희도 스스로 피를 흘릴 줄 알아야 하는 거야. 돈을 지불하는 건 당연한 거고. 싸가지 없는 새끼들 같으니,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아나?”

굴리엘모는 가슴 깊이 굴욕감을 느끼며 재빨리 막사에서 벗어났다. 더 이상의 변수를 만들길 원치 않으니 가져온 보물은 그대로 두고 떠났다. 한 명의 적군이라도 줄여야 할 판국이었으니까.

‘제기랄. 이놈들, 전쟁 결과에 상관없이 다 죽여 버릴 거야. 흥. 칼 좀 잘 다루는 게 독약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나 보자고.’

“도련님이 엄청 화나신 모양이네.”

씩씩대며 돌아가는 굴리엘모를 보며 만프레드는 비웃음을 지었다.

“에휴. 피오레 가문 놈들 헛똑똑이라니까. 돈 버는데만 머리가 잘 돌아가지, 당연한 걸 생각을 못해요. 살아야 돈도 쓰는 거지. 덜 떨어진 놈들 같으니.”

“이야기가 끝났으면 이만 가보지.”

아르투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잠깐만. 아직 우리 이야긴 시작도 안했어. 네 억지를 내가 왜 받아줬는데. 나도 검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다. 죽을 위험을 감수하기 싫어서 용병 계약을 안했다고? 그건 내가 저놈들 꼴 보기 싫어서 대충 둘러댄 거야. 소모품으로 쓰는 문제야 지휘권을 넘겨주지 않는 조건으로 계약하면 그만이고.”

“뭐야, 그럼 다른 이유가 있었나? 그럼 저쪽 편들지 그랬냐?”

만프레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거 진짜 대책 없는 놈이네. 정말로 내가 저쪽으로 넘어가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싸울 뿐이지. 4만 5천이나, 5만이나, 별 차이 없잖아.”

“아, 이건 자존심 상하네. 아무튼, 본론은 이거야. 우리 둘이서 손잡고 레무리아를 정복하자. 분할 계획도 이미 다 구상해놨어. 부유한 북부는 네가 차지해, 남부를 내가 차지할게. 이곳은 정말 부유하고 풍요로운 땅이야. 반만 먹어도 왕 정도는 칭할 수 있을 걸?”

“관심 없다. 혼자 다 차지해서 왕이건 황제건 해라.”

아르투르는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야, 야! 어디 가!”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떠나버린 아르투르를 본 만프레드는 민망한 표정이 되었다.

“저거 이상한 놈이지, 안 그러냐? 내가 저놈 같은 용력에 상처를 치유하는 마법검을 가졌다면 대륙을 통일하고 제국을 세웠을 거야. 그럼 원하는 건 뭐든지 다 가질 수 있었을텐데.”

만프레드의 부관이 답했다.

“바로 그래서 기적을 일으키는 성검이 대장에게 나타나지 않은 겁니다.”

“이씨, 너도 마찬가지잖아! 다 같이 부귀영화 쫓아 잘먹고 잘살자는 주제에 너만 그러기야?”

“저는 염치는 압니다. 대장.”

만프레드는 입맛을 다시며 아르투르의 뒤를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피오렌치아의 용병 제안을 받아들여? 돈 하나는 엄청나게 많이 받을 수 있을 텐데.’

침착히 생각해본다. 연합군에 합류해서 아르투르 군의 뒤를 친다. 그러면 놈의 보병대는 속절 없이 무너질 것이다.

‘음, 녀석이 분노해서 날 노리고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오겠지.’

도파뉴에서 벌어졌던 전투 중, 할버드를 휘둘러 기사들을 잡졸처럼 죽여대던 아르투르의 수라 같은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놈이 이제 갑옷을 종잇장처럼 잘라대는 마법검까지 얻었다 이거지?’

그만두는 게 좋겠다. 적당히 이득을 봤을 때 빠지는 것이 장수하는 용병의 비결이었다! 아르투르 같은 놈과는 상종을 안하는 게 좋았다! 저런 놈은 아군이건 적군이건 안 만나는 게 최고다!

‘주님. 제발 저 새끼랑은 또 엮이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게 해주시면 헌금을 두 배로 늘리겠습니다.’

경건한 성직자들도 일생동안 기도에 한번 대답을 받을까 말까인데, 교회도 털어먹는 용병대장의 기도에 응할 신은 없었다. 금괴기사단은 굴리엘모가 주고 간 고용료 혹은 조공을 챙긴 뒤 바로 전장을 이탈했다. 아무도 죽지 않고 성공한 세 시간의 의뢰치고는 대단한 보상이었다. 단원들은 추가 급여를 받을 기대에 부풀어 올라 대장의 이름을 연호했다.

“만프레드! 만프레드! 만프레드! 비겁자 만프레드!”

“아, 새끼들아! 좀 더 그럴듯한 별명 있잖아. 하이에나 만프레드, 영리한 만프레드, 이런 근사한 게 좋지 않냐?”

“만프레드! 만프레드! 만프레드! 협잡꾼 만프레드!”

“이 새끼들이!”

나르지아노 강가에서 대규모 혈투가 벌어졌던 날은 금괴기사단의 용병들에겐 정말 즐거운 하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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