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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07화 (10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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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레오폴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평화 협상이 뭐가 필요해. 그냥 다 쓸어버리자고. 보아하니 랑트리뷔아체군 말고는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던데. 천하의 아르투르가 겁이 나는 건 아니겠지?”

“에헤이. 유치하게 그러지 마라. 승리는 의심하지 않아.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많은 두라노 인들이 죽을 가고, 그건 네 부하들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만만치 않은 적들이고, 큰 희생을 감수해야만 할 거야.”

“전쟁이 벌어지면 어차피 사람은 죽어. 그리고 기사된 자로서 싸우다 죽는 것만큼 영광스런 일도 어디 있단 말이냐? 오히려 침대에서 편안히 죽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겠지.”

“우리 같은 기사들이야 그렇다 치자. 나도 그렇게 편히 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 생에 가장 거대하고 중요한 전투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고 쓰러지는 건 우리 모두의 꿈이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죽음을 원치 않아. 평화롭게 살다가 자식들의 곁에서 임종하길 바란다고.”

아르투르의 목소리는 매서웠다.

“레오폴트, 우린 지금 서부 대륙의 지도 위에 장기말을 올려두고 게임을 하던 소년들이 아니야. 수십만의 생명이 달린 결정을 하고 있는 거다. 책임감을 가져라.”

“모든 위대한 왕조는 불과 칼로서 세워졌어. 사촌형들이 내전에 정신 팔린 지금이 우리만의 세력을 일굴 절호의 기회 아닌가? 나약한 상인들을 쓸어버리고 이 땅을 정복할 수 있어. 우리가 어린 시절 내내 이야기해왔던 거잖아. 꿈이 눈앞으로 와 있어. 즉각 잡으라고.”

레오폴트의 말을 들으며 아르투르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위대한 정복왕이 되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되새겼다. 자신은 여전히 전투의 영광을 바랬다. 그러나 어떤 꿈은 꿈으로만 남아야할 터였다.

“좋아. 네 뜻이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우리가 너를 도왔으니, 이번엔 네가 우리를 도울 차례다. 도움은 서로 한 번씩 주고받아야 공평하겠지. 그렇지 않나?”

“단순히 그렇게 퉁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란 걸 알잖아.”

그들이 다시 기싸움을 벌이려고 할 때, 뒤편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레오폴트 공.”

아델라이데는 두 사람의 방의 문간에 서서, 취기가 오른 얼굴로 조심히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혹여 질책이라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느낌이었다.

“엿들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제 의사는 명백히 표명하고 싶어요. 저희 위르마넨 가문은 아르투르 공의 은혜에 보답해 도우러 온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그러니 이대로 평화 조약을 추진하신다고 해도 그 결정에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레오폴트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답한다.

“감정적으로 정하실 문제가 아니오. 백작. 영지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이해관계를 먼저 살피고 신중히 결정하시오.”

“아뇨. 저한테는 그런 것보단 은혜를 갚는 게 중요해요. 다시 분명하게 말씀드릴게요. 위르마넨 가문은 순수히 아르투르 공을 도우러 왔습니다. 그러니 보답을 위해 원치 않는 전쟁을 지속해달라는 요구는 부당합니다.”

레오폴트는 뭐라 설득해보려고 말을 꺼내려했지만, 아델라이데의 태도가 굉장히 완강했다. 결국 레오폴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려보였다.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삼분의 일은 아델라이데 백작의 군대였다. 그녀가 빠진다면 나머지 영주들도 빠질 터였다. 자신의 직할부대로 레무리아를 정복하는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뭐, 위르마넨 가문의 가주가 그렇게 결정하셨다면 끝난 일이군. 네 뜻대로 가자고.”

아르투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따라줘서 고맙군.”

“단, 일방적으로 네 결정을 따라주는 건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군. 우리는 사촌이고, 둘도 없는 친구잖아. 그러니 서로를 계속 도우면서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섭섭한 일 없게 정산도 제대로 하고.”

“알겠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네 도움을 잊을 리가 없지 않느냐.”

아르투르도 궁중에서 자란 귀족으로서 레오폴트가 자신을 최대한 존중해주고 있다는 점을 잘 알았다. 애초에 방랑기사와 대공국의 후계자는 동등한 입장일 수 없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동격으로 대해주어 온 것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어쨌든 합의가 이뤄지자 랑트리뷔아체 연합군에 사신을 보내 평화 협상의 의사를 타진했다.

아르투르가 내건 유일한 조건은 전쟁 이전으로의 복귀였다. 하지만 돌아온 요구는 두라노의 영토 할양이었다. 아르투르는 짜증나는 표정으로 전령이 가져온 서신을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아르투르 진영은 모두 격분했다. 조레스는 격분해서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분노를 표출했다.

“랑트리뷔아체 놈들이 자신들만 전쟁을 할 줄 아나보군요. 두라노 인들도 물러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겠습니다!”

레오폴트는 냉정한 표정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쪽도 이런 미적지근한 결말 따위는 원하지 않는 거겠지. 즉각 군대를 준비하겠다.”

아르투르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힘의 우위를 제대로 보여줘야겠군. 왜 다들 꼭 싸워보지 않고는 승패를 짐작해보지 못하는 건질 모르겠네.”

아델라이데 백작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다 같이 죽고 싶나보네요.”

***

맨 처음 아르투르의 평화 제안이 도착했을 때, 도시의 정부들은 덥석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본국은 전비만 무진장 지출하고 얻은 건 없는 이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장의 장군들은 생각이 달랐다. 이대로 돌아가면 자신들의 정치 생명, 혹은 물리적 생명이 끝날 판이었다. 어떻게든 만회해야했다는 절박감이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결국, 그들은 전쟁을 지속 할 적당할 명분을 찾아내기로 했다.

그 때, 적 구원군의 지휘관이 레오폴트 백작이라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전쟁을 지속할 명분을 찾아냈다.

“옳거니!”

레오폴트 백작이 개입했다는 말은, 페르디난트 대공이 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결정적인 순간에 페르디난트 대공이 그의 조카인 아르투르를 도우러 왔겠는가? 뻔한 일이다. 두라노를 시작으로 레무리아 전체를 정복할 생각일 것이다!

-따라서 오‘데르만 왕가가 본토를 침공하기 전에 이들을 뿌리 뽑아야합니다. 공성전은 시원치 않았을지 모르나, 우리의 숫자가 두 배가 넘으니 야전에선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장군들의 보고서를 받아본 도시국가 정부들은 경각심을 느꼈다. 백색 산맥 너머에 있는 거대한 통일 왕국의 존재는 언제나 그들에게 군사적 압박이었다. 그 나라의 왕족들이 산맥 너머에 자리 잡는다면 자신들의 자유와 주권은 위협 받으리라!

“아르투르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그는 두라노를 차지한 후 형제들과 연계해서 우리 도시들을 정복하려 들 것입니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숙원을 이루려고 온 겁니다!”

“아그나델로 장군의 말이 옳소.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시민군을 동원하겠소! 반드시 두라노에서 저들을 저지해야 하오!”

중립을 지키던 도시 국가들도 오‘데르만 왕가의 위협이라는 명분 아래 결집될 움직임을 보였다. 물론 아르투르는 이걸 해명해보려고 했다. 자신은 사생아이니, 본국의 왕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이다. 오히려 범죄자로 수배되어 있는 판국이라고까지 설명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정복자 페르넬의 아들이 두라노를 영토로 삼을 생각이 없고, 본국과 연관이 없다고? 세 살 배기 어린 아이도 안 믿을 거짓말이었다. 명예로운 이라고? 레무리아에선 아무도 그런 걸 믿지 않았다. 이곳에서 외교란 미소 속에 비수를 감추는 것이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아르투르는 누구보다 완벽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참주정을 전복한 이유? 두라노의 군주가 되기 위해서지. 두라노의 독재관이 된 이유가 무엇이겠나? 두라노를 발판삼아 반도 전체를 정복해서 자기 왕국으로 삼으려는 생각이겠지. 뻔하다! 뻔해! 봉건 영주 놈들은 절대로 이 땅에 발을 붙일 수 없다!”

레오폴트와 아델라이데의 개입? 그것도 뻔하지! 아르투르를 도와 향후 반도의 이권을 차지하려는 행위인 것이 분명하다! 사촌이라서 도와주러 왔다? 은인이라서 도와주러 왔다? 모두 거짓말이다! 그런 걸로 움직이는 순진한 영주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맞는 말이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레무리아에선 그런 용기로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반드시 이득, 이득만이 레무리아의 영악한 정치가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사생아 왕자가 영주들에게 약속한 이득이 무엇이겠나? 모르면 바보지! 우리의 땅을 나눠주겠다고 밀약한 것이다!”

“옳소!”

이미 결론을 내어버린 자유 도시의 수뇌부들은 전력을 다해 반격을 준비했다. 중재에 나서려던 교황청도 생각을 바꿔서 지켜보기로 했다.

‘뭐, 애초에 교회가 뭔가 제대로 할 거라는 건 기대도 한 적이 없었고.’

아르투르는 적들의 다시 모이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전 레무리아가 단결한다면, 그건 정말로 지는 길이었다. 신속한 공격만이 승리의 유일한 길이 되리라.

“전군 진격! 전쟁이 두려워서 피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

영악한 레무리아의 정치가들은 두라노의 봉기를 선동하는 격문을 뿌리곤 했다.

“이대로면 너희들도 군주들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어서 들고 일어나라!”

두라노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우리를 진짜 노예로 만들려고 했던 게 누구였더라?”

변경 영주들의 군대는 평소에도 잘 훈련된 정예병들이었고, 백 명이 넘는 기사들이 있었다. 아르투르는 전 대륙에서 군사적 능력과 무용을 인정받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전체의 군 지휘권을 쥐었다. 그는 군대의 상태를 보자마자 대단히 공격적인 전략으로 전환했다.

“적들이 모이기 전에 급습해야하오!”

아르투르가 이끄는 군대는 각 자유 도시의 군대가 집결지로 향하기 시작할 때, 그들을 각개격파하기 위해 나섰다.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기병대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적들을 급습했다.

“도시 샌님들에게 진짜 싸움이 무엇인지 보여줘라!”

자유 도시들은 숫자는 제법 나왔지만, 불시에 정예 기병들의 습격을 받자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였다. 한 군대를 패퇴시키면, 그 군대가 패퇴했다는 소식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 다른 곳을 공격했다. 아르투르는 언제나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적들을 도륙했다. 금세 아르투르의 귀신같은 무용에 대한 공포가 퍼져나갔다.

군소 도시들의 병력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사라져갔고, 랑트리뷔아체와 피오렌치아 같은 거대한 도시들의 군대는 너무 둔중해서 아르투르를 쫓지 못했다. 소수 정예를 파견하면, 그냥 사지로 보내는 셈이었다. 소수 단위 전투에서 아르투르를 앞세운 기사대는 무적이었다.

“돌격하라- !”

기사들의 마상창을 옆구리에 끼고 돌격하자마자 시민병들의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그 뒤는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재능을 타고나고, 훈련된 호전적인 살인자들 앞에 도시 속에서 아늑하게 살던 이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항복 - 항복이오!”

이런 방식으로 두 달 사이에 열일곱 번의 승리가 계속되자, 적병들은 이제 아르투르의 깃발만 휘날리면 백기를 들기에 바빴다. 항복한 포로들은 안전을 보장 받았고, 감옥에 갇히는 것을 빼면 별 다른 수모도 겪지 않았다. 군소 도시들은 큰 도시들의 눈치만 보며 병력을 보내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다.

“이놈, 잘도 요리저리 피해 다니는구나! 싸우기만 하면 끝장낼 수 있을 것을!”

분견대가 모두 전멸했다는 소식을 또 다시 들은 아그나델로는 분통을 터뜨렸다. 얼마 뒤, 정찰병이 여섯 시간 거리에 아르투르의 본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드디어, 놈이 왔군.”

아르투르도 길게 끌 생각은 없었던 터라, 조무래기들을 정리한 대로 곧 바로 적의 본대에 싸움을 건 것이었다. 나르지아노 강가에서 만난 양군의 참가자들은 모두가 깨달았다. 임박한 대회전에서 이번 전쟁의 승자가 결정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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