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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이에버를 떠난 뒤에 많은 일이 있었지. 하나씩 설명해줄게. 우선, 네게 아들 셋과 오른팔을 모두 잃었던 란트레서 공작. 그 노인네는 북방의 영지로 돌아갔지만 그 해의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어. 팔을 잃었던 부상이 심해졌던 까닭이겠지. 남아있는 란트레서 가문의 사람은 그의 외동딸뿐인 거 기억나나?”
아르투르는 한 가문의 대를 끊게 된 것 같아 기분이 편치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로 돌아가서라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은 같았다.
“그랬던 것 같군.”
아르투르의 잔에 술을 따라주는 레오폴트.
“그 아가씨가 란트레서 공작이 되었지. 란트레서의 주디스. 큰오빠를 닮아 성질이 거칠고 가납 다더군. 그녀는 널 가문의 원수이자, 북부 전체의 공적으로 선포했다. 네 목을 가져오는 자와 결혼해주겠다고 선언했다.”
“흠, 그래?”
레오폴트는 비어있는 잔에 도로 맥주를 따라주었다. 그토록 강력한 가문을 적으로 돌린 것은 역시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북방 영토가 좀 험한 걸로 아는데, 영주들이 알아서 내쫓아주진 않을까?”
아르투르는 재차 잔을 들이켰다. 목줄기를 타고 시원하게 맥주가 넘어갔지만, 그가 전해준 소식은 아주 답답한 소식이었다.
“왕국을 오래 떠나있었더니 감을 잃었군. 북방 영주들은 늑대 가문에 수백 년간 충성을 바쳐왔어. 세대에 걸쳐 은혜를 입은 이들도 수두룩하고, 우호 관계에 있는 강력한 봉신들도 많지. 그들은 우리 오‘데르만 왕조에 충성한 지도 채 두 세대도 되질 않았어. 왕실이 내전을 벌이고 있는 지금이라면 아예 독립을 선언 하는 것도 꿈은 아니지. 문제는 그 뒤에는 자력으로 북구인 이교도들의 침공을 막아내야 한다는 거겠지만.”
레오폴트도 잔을 들이켰다.
“게다가 주디스는 우리와 비슷한 나이대인데, 잘 안 알려져 있어서 그렇지, 정말로 위험한 상대야.”
“어떤 의미에서? 뭘 잘하지?”
“북부인들답게 머리 굴리는 건 잘 못해. 하지만 아주 맹렬하고, 수단을 가리지 않지. 언젠가 반드시 널 잡으러 올 거다. 기억나지? 너의 세 형들이 내전을 벌이고 있는 것. 거기에 우리 아버지와 숙모도 서로 싸우고 있고.”
아르투르는 뭘 그런걸 묻냐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그걸 잊겠나. 잊을만하면 내전으로 파괴되고 있는 왕국에 대한 참상을 듣는데. 난 누가 이기건, 내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고향이 그립고, 잘되었으면 좋겠어.”
“주디스는 세 명의 왕에게 모두 서신을 보냈어. 북부는 네 목을 가져오거나, 널 잡아들이는데 도움을 주는 왕을 지지할 거라고 말이야.”
“그 여자가 이렇게까지 날 증오할만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그럴 이유는 충분하지만, 정당성이 없지. 그건 정당한 결투 재판의 결과였어. 만약 내게 책임을 묻고 싶다면 똑같은 결투로 묻는 것이 맞다. 이런 마구잡이 보복이 아니라.”
레오폴트는 아르투르의 대답을 들으며 흥미로워했다.
“넌 재밌는 놈이라니까. 냉정한 경우에 내리는 판단력은 노련한 왕족 같으면서, 정작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이 걸리면 일개 기사에 불과해지지. 넌 좀 머리를 식히고, 상황을 차분히 살피고 냉정히 결단하는 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어. 아니면 그런 걸 대신 해줄 사람을 측근으로 두던가.”
“카밀 정도면 괜찮은 편이 아닌가? 네 생각은 어때?”
카밀의 이름이 나오자 레오폴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글쎄… 지난번에 결투 재판 말이야. 그대로면 꼼짝 없이 네가 죽게 생겨서 도와주긴 했지만, 난 내키지 않았어. 그 자의 입장은 이해한다. 내가 그 자의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했을거야. 하지만 군주로서? 허용하지 못할 일이지. 망나니 귀족 한두 명의 일탈은 기껏해야 수십 명의 삶을 파괴하지만, 질서의 붕괴는 총체적인 재앙으로 들어가는 길이야. 저울을 잴 줄 알아야지. 본보기가 필요했다고 봐.”
두 신념이 충돌할 때는 항상 긴장감이 흐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아무리 친하고,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존중했다. 그들은 일치에 이를 수 없는 화제에 도달했음을 깨닫고, 잔이나 한번 부딪친 후 목으로 넘겼다.
“란트레서 가문의 주디스 이야기로 돌아가지. 그 여자는 가족을 전부 네게 잃었고, 완전히 눈이 돌아갔어. 모든 북부인들은 그녀의 감정에 공감하고, 복수의 명분이 타당하다고 여겨. 사실상 왕국의 북부는 너를 평생 적으로 돌렸어. 왕국령에 들어가서 북부의 기사를 만나는 순간, 바로 공격해 올거다. 몇몇은 널 쫓아서 레무리아까지 분명히 올 것이고.”
아르투르는 그들을 만나면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 전에 칼부터 뽑게 될 공산이 컸다.
“오라고 해라. 복수를 위해 찾아온다면 얼마든지 상대해주면 그만이니.”
“다음 화제는 그렇게 말하기 힘들걸. 루이스 형이 네게 소환령을 내렸다. 올해가 끝나기 전에 수도로 돌아와 왕의 재판을 받으라고 하더군. 그렇지 않을 경우 반역자로 간주해서 사형 선고를 내리겠다고 했다.”
아르투르는 큰형님 루이스가 왜 그런 판단을 했을지 돌이켜봤다. 큰형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인 인간이었다. 밥맛인 인간.
“큰형님다운 일이네. 잃을 건 사생아 아우의 미움뿐이오, 얻을 건 내게 가족을 잃고 분노하고 있는 명문 귀족들의 지지일테니, 정치적으로 현명한 일이군. 사법 정의 같은 건 염두에 두시는 분이 아니고.”
“그래. 이 새끼야. 한마디로 너 지금 좆 된거야. 어쩌자고 그런거야?”
잔소리가 섞인 레오폴트의 말에 아르투르는 짜증을 섞어 말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니 걱정부터 먼저 하는 게 좋겠는데.”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새끼야. 지금도 내가 도와주러 안 왔으면 계속 피똥 싸고 있었을 놈이. 그리고 왕국에 널 도운 일로 감히 나를 비난할 자가 있다고? 나오면 좋지. 시범 케이스는 언제나 필요하니까.”
“좀 좋은 소식은 없냐?”
“아, 하나 있어. 하이에버의 토너먼트를 주최한 아르길락 공작 가문은 완전히 세가 기울었어. 가문의 명예를 걸고 연 토너먼트에서 백 명이 넘는 손님이 죽었는데, 결투 재판도 엉망으로 치렀지. 봉신들은 그런 한심한 군주를 저버리고 왕의 직속 봉신으로 받아달라고 떠났고, 결국 아르길락 가문은 성 몇 개만 남아서, 이제는 내 아버지한테 모든 걸 의존하고 있어.”
“남의 가문이 망한 소식을 들으면서 기뻐하는 취미는 없는데.”
“짜식, 솔직해져봐. 널 죽이려고 들었던 놈들이 망했다는 거잖아. 참, 아르길락 가문의 후계자가 기억나나? 요제프 폰 아르길락 말이야.”
아르투르는 기억을 되새겼다. 하이에버에서 벌어졌던 마상시합 결승전에선 일곱 명이 넘는 마상창을 부딪친 뒤에나 승리했고, 삼 대 칠로 이뤄진 불공평한 결투 재판에서도 무서운 적수였다.
‘이기긴 했지만 간발의 차이였지. 급소를 찌르진 않았으니 살아 있을 텐데.’
“결투 재판에서 모인 모습은 한심했지만, 훌륭한 무인이란 건 부정하기 어려운 사내였지. 그 친구는 왜 말하나?”
“그 친구가 네게 사과를 전해달라고 하더군. 아버지를 만류하지 못한 것도, 공정치 못한 결투에 참가했던 것도 깨어나서 되돌아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고 하더군. 그럼에도 자신을 살려준 네게 감복했으니, 큰 빚을 진 것으로 여기겠다고 했다. 두 번,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도 두 번까지는 대가 없이 도와주는 것으로 무례와 호의를 되갚겠다고 했어.”
이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하이에버에서 벌인 싸움으로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자만 늘어났을 줄 알았건만,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이 한편으론 그를 기분 좋게 했다.
“그나저나, 제대로 말해봐라. 어째서 숙부와 왕대비가 전쟁 중인데 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당연히 숙부를 지원하러 간 줄 알았거든.”
레오폴트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졌다.
“앞서 말했던 그대로야. 집안 돌아가는 꼴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삼촌, 페르넬 대왕이 죽었으니 권력 공백이 생겼고, 우리 왕조의 오랜 적들이 기회를 호시탐탐노리고 있는데, 가문끼리 갈라져서 내전을 벌여? 현명한 일은 아니지.”
말을 거드는 아르투르.
“그런데 마침 우리 왕조와 적대적이던 랑트리뷔아체와 피오렌치아가 힘을 합쳐 반도를 석권하려 하길래 군사적 대응에 나선 걸테고. 내 말이 맞나?”
“맞아. 처음에는 변경 영주들에게 연락해보아도 통 반응이 없었어. 다들 숨을 죽인 채 내전의 결과만 지켜보고 있었거든. 하지만 금방 함락될 거라고 보이던 두라노가 네 덕분에 반년을 버텨냈고, 덕분에 다른 영주들을 설득해서 데려올 수 있었지. 그나저나, 이 전쟁. 어떻게 끝낼 거냐?”
연거푸 잔을 들이키던 레오폴트는 술잔을 저 멀리 밀어놓았다. 이제는 진지한 현안을 대화할 차례였다. 아르투르도 그렇게 했다.
“영주들의 수장은 너니까 네 의견을 들어보려던 차이었다. 난 여기서 전쟁을 끝냈으면 한다. 아무런 변화 없이 전쟁 전으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아무런 조건 없는 백색 평화인가. 나는 이 기회에 도시 국가놈들에게 본보기를 좀 보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왕조가 흔들리는 틈을 타서 놈들이 너무 거들먹거리고 있어. 네 아버지가 살아있던 시절이면 입 하나 뻥끗 못했을 놈들이 말이야. 가진 건 황금 밖에 없는 놈들이 뭘 믿고 저렇게 까부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아르투르는 정략적인 노림수들을 읽어보았다. 레오폴트의 판단은 합리적이었다. 어차피 자유 도시들과 봉건 영주 사이엔 항상 긴장과 대립이 있기 마련이었다. 기회가 될 때 그들의 세력을 꺾어두는 건 정확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두라노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무엇보다, 자신은 그런 이권을 위해 여기서 싸우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내가 아무런 조건 없는 평화 협상을 제안하면 따라줄 건가?”
레오폴트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우리가 평화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전쟁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할 테냐?”
다소 불쾌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아르투르.
“우리 사이에 서로의 생각을 떠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먼저 솔직해져야겠군. 도움은 고맙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나는 전쟁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어. 애초에 영지나 이권을 얻자고 시작한 전쟁이 아니다. 단지 전쟁의 참상에서 두라노 인들을 구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 행동은 기사로선 명예롭고, 인간으로선 고결한 일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볼 땐 가끔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는 해. 솔직히 털어놓자면 말이야.”
“계속 해봐.”
“이번 전쟁을 멈춘다 한들, 결국 전쟁은 또 벌어질 게다. 이곳만이 전쟁터냐? 그것도 아니거든. 네 이상을 비웃는 것이 아니야. 전쟁은 악한 일이다. 그걸 모르는 자는 바보지. 관건은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가져오게 하고 싶다면, 지금 같은 방식으론 불가능해. 삶의 목적이 역사에 네 개인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라면 모를까, 정말로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고 싶다면 방법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어.”
“그러면 용병들을 이끌어 도시를 파괴하고 마을을 불태워 온 세상들을 복종시킨 후, 이제 평화가 왔노라 선언하면 평화가 이뤄지나? 그런 방식으론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우리 아버지들이 증명했잖아.”
“우리 아버지들이 했던 철혈의 길이 완벽한 방법이었다곤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이전 시대보다 훨씬 평화로워 진 건 부정할 수 없어. 적어도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방식보단 많은 사람들을 구했을 거야. 지금 이 상태에서 그냥 전쟁을 끝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말해주지. 랑트리뷔아체는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다음 전쟁을 준비할 것이고, 피오레 가문은 책임 추궁을 피한 뒤 계속 모략을 꾸밀 거야. 그들의 힘을 완전히 꺾어둘 필요가 있다. 다른 국가들을 침공할 여력이 없게끔.”
“전쟁을 확전시키자는 소리군. 두라노 인들은 이미 충분히 고통 받았다. 동의할 수 없다. 하고 싶다면 너와 널 따르는 영주들을 데리고 해.”
두 사람은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오‘데르만 혈통 특유의 날카로운 녹안이 교차하며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은 채, 집요한 시선을 교환했다. 두 서로 다른 의지가 충돌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