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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05화 (10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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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식에 이어 축제가 열렸다. 포위가 풀리자 도시에 물자가 공급되었고 시민들은 지난 반 년 간 참아왔던 욕구를 마음껏 배출했다. 이러한 축제의 중심은 아르투르와, 그가 데려온 구원군 이었다. 병사들은 한 번의 전투도 없이 이런 큰 환대를 받자 아주 기뻐했다.

한때는 참주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큰 홀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찬을 즐겼다. 아르투르는 각 테이블을 돌며 축배를 든 후, 가장 크고 화려한 테이블로 돌아왔다. 참석자는 레오폴트와 두 명의 종자, 아델라이데 백작, 두라노에서 만난 그의 세 측근이었다.

“네 새로운 신하들에게 들어보니 여기서도 말도 안되는 일을 많이 저질렀더군. 어려서 나한테 쥐어터지던 새끼가 많이 컸네.”

레오폴트의 말에 아르투르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쥐어터지긴 새끼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나한테 두들겨 맞던 건 너였고. 새끼야.”

레오폴트도 활짝 답하며 넘치는 맥주잔을 들어올린다.

“이제 머리 좀 커졌다. 이거지. 그래 좋아. 오늘은 네가 승리한 날이니 너한테 맞춰주마.”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며 한 번에 들이마셨고, 아델라이데는 기다리고 있던 것마냥 두 사람의 잔에 맥주를 채워주웠다. 아르투르는 당황해서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뭐하시는 거요. 백작. 술을 따르는 것은 아랫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합당한 일이오.”

“그저 소녀가 대접해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랍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아르투르는 그녀가 따라준 잔을 들지도, 내려놓지도 못한 채 난처해했다. 레오폴트는 막시밀리안과 케이의 머리를 한 대씩 후려쳤다.

“아이씨. 종자란 놈들이 빠져가지고는! 잔을 비우면 재깍재깍 채워 넣어야지! 너희가 일을 늦게 해서 백작이 직접 술을 따랐잖아! 한번만 더 이런 일 벌어지면 연회는 집어치우고 연병장 도는 거야, 알았어?”

레오폴트의 살벌한 말에 막시밀리안은 바짝 얼어붙으며 대답했다.

“네. 넵.”

반면 케이는 그게 왜 내 탓이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로는 알겠다고 답했다. 레오폴트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어서 혀를 차다가, 결국 웃어버리고 말았다.

“새끼, 종자가 표정관리도 안하고 말이야. 좋은 날이니까 봐준다.”

그 사이, 아델라이데는 아르투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언제 마실 거냐는 듯이. 아르투르는 속이 채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아델라이데는 얼굴을 내밀며 눈웃음치며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제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으음… 그러고 보니, 섭정인 백작의 어머니께서 나를 돕는 일을 달가워하진 않으셨을 텐데, 어떻게 오게 된 거요?”

아델라이데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쾌활하게 답했다.

“짐 싸라고 해서 외할아버지 집으로 보내버렸어요. 저 잘했나요?”

어머니를 내쫓았다는 게 천진난만하게 할 소린 아닌 것 같다지만, 어쨌든 그건 위르마넨 가문의 일이었다. 그쪽 가주가 그렇다는데 어쩔 테인가. 아르투르는 내심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건 조금 내려두었다.

“이유가 어쨌건, 나는 백작의 사촌오빠들을 죽였소. 그것도 셋이나. 그 점에 대해서 나한테 유감이 없지 않을 텐데, 날 도와주기로 해서 고맙소.”

하지만 아델라이데는 더욱 환히 웃어보인다.

“아, 그 사람들이요? 저는 잘 몰라요. 도적들이 제 영지를 짓밟고 삼촌이 절 죽이려고 할 때, 사촌들은 어디 있었나요? 그때 절 구해주셨던 건 아르투르 공뿐이시지, 어머니의 조카들이 아니에요.”

아르투르는 아델라이데가 변했음을 느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소녀 백작은 더 이상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대략 일 년 전 이건만,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하기야,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 자기 백성들을 죽이고 삼촌이 자기 목숨을 노린 걸 보았으니 정상적인 심성을 가지고 자라긴 힘들었을 터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나이에, 그런 충격을 겪었으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겠지.’

“사실은 말이에요. 이번에 제가 어머니를 내쫓은 건 아르투르 공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랍니다. 어머니는 공이 위험에 처한 걸 알고는, 원군이 아니라 복수를 위한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음, 어리석은 짓이었어요. 우리 엄마는 영지에서 엄청나게 인기가 없는데, 아르투르 공은 모두가 사랑하거든요. 그래서 알튼 남작의 도움을 받아서 추방해버렸어요. 지금은 명목상의 섭정은 알튼 남작이 하고 있지만, 실무는 제가 보고 있답니다.”

아델라이데는 칭찬에 목마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아니, 내가 뭐라고 된다고 이렇게까지 인정받길 바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딸이 어머니를 내쫓았다는데 거기 박수를 쳐주기에는 아르투르는 고지식한 편이었다.

“원래는 그 간사한 혀를 뽑아버리려고 했는데…. 그건 봉신들이 못하게 하더군요.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면 안되니까 그건 그만 뒀죠. 역시 혀를 뽑아올 걸 그랬나요?”

아르투르는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소녀스러운 천진난만함이 귀족 사회의 잔인함과 합쳐진 모습을 보자니, 그 기분이 실로 묘했다.

“아, 아니. 그건 잘하신 거요. 뜻이 맞지 않는 사람을 내치는 건 군주의 고유한 권한이지만, 그렇다고 한들 불필요한 폭력을 휘둘러서는 아니 될 말이오. 그건 옳은 일이 아니외다. 특히 친족이라면 더욱 그렇소.”

“역시 제 판단이 옳았군요! 다행이에요! 사실 저희 어머니, 정말 싫어했어요! 영지에 필요도 없었고요. 사람들도 다~ 싫어했고요. 아르투르 공도 험담했고요. 그리고 또….”

아델라이데는 그 뒤로도 쫓아낸 어머니에 대한 긴 험담을 늘어놓았다. 아르투르는 듣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심정이 너무 처참했다. 나중에 알튼 남작을 통해 사정을 들어보니 이미 봉신들이 그녀를 내쫓을 계획을 준비중이었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지요. 미치광이 도적놈 하나 다루지 못해 영지를 초토화시켰을 때 저희의 마음은 이미 소피 부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영지의 은인이자 누가 보아도 차기 백작으로 적합한 아르투르 공을 내쫓다니요? 그건 배신입니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 뒤는 뻔했다. 군사권도 없고, 백작도 등을 돌렸으니 그 세상 물정에 어두운 부인은 얼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영지를 떠났다. 알튼 남작은 아델라이데의 변화에 대해서도 말했다.

“백작 각하께서는 반란을 전후에서 완전히 사람이 변하셨습니다. 이전에는 제 딸과 별 다를 바 없는 소녀이셨죠. 멋진 구혼자와 가슴 끓는 사랑을 원하셨고,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대로 자랐다면 훌륭한 아가씨가 되셨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변의 안전에 극도로 예민해지셨습니다. 때문에 밤낮 없이 영지를 파악하는데 전념하시더군요. 그건 군주로서 권장할만한 좋은 일이지만,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는 변해버린 모습을 보는 것도 안쓰러운 일입니다.”

아르투르는 아델라이데가 지나치게 잔인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점잖게 충고를 하려고 했지만, 알튼 남작의 말을 듣고는 그만 두었다. 자신은 명예롭지 않은 길은 추구하지 않기로 했지만, 영지를 다스리는 방법이 그것 뿐은 아니란 점도, 항상 그게 통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용맹한 기사가 자비를 베풀면 다들 관대함을 칭송하지만, 소녀 백작이 같은 행동을 한다면 나약함의 증거로 보이고도 남을 것이다.

‘결국 그녀도 남의 보호를 받아야하는 소녀가 아니라, 한 명의 군주로 성장하고 있는 거겠지. 도를 넘는 일이 아닌 이상, 내가 개입 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답게 자랄 수 있다면 좋겠건만, 시대가 그렇지 못했다. 아델라이데보다 사정이 훨씬 나쁜 이들도 있다는 걸 실감하고 나니, 딱하다는 마음도 깊지는 않았다. 어린 날의 자신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서 귀족으로부터 태어나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특권이었다. 평생 밭일이나 하다가 화살받이로 차출되는 소년들이, 집에 먹을 게 없으니 알아서 빌어먹으라며 부모의 손에 이끌려 사창가에 팔아넘겨지는 소녀들이 즐비한 세상이었다. 아르투르는 재차 술잔을 들이키며 과거를 돌이켜봤다.

‘나의 유년기는 어땠지?’

왕족들 사이에서 매일 눈칫밥을 먹었고, 항상 알 수 없는 냉대를 받았다. 어머니가 이교도 여전사라고? 자신이라고 이교도의 아들로, 사생아로 태어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몇 번이고 생각했었다. 저렇게 아름답고 강인한 왕비의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진짜 왕자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더라면 모두의 존경과 사랑 속에서 자라나 위대한 왕이 되었을 것을.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자신은 항상 친구가 있었고, 스승이 있었으며, 아버지가 있었다. 장검의 레오폴트, 무적의 기사 바야르, 페르넬 대왕. 평범한 사람들은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평생을 기억할 정도로 비범하고 위대한 자들이었다. 자신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자랐고, 그들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잘 나서, 내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야. 그저, 운이 좋았을 따름이다. 아버지를, 스승을, 친구를 잘 두는 운 말이다. 내가 하찮다고 여겨온 지위조차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임을 잊지 말자.’

축제는 이어졌고, 아르투르는 이번에는 레오폴트와 깊은 대화를 했다. 둘 다 얼굴에 취기가 오를 정도로 가득 마시면서 말이다.

“너는 스스로의 힘으로 인정받았구나. 아르투르. 타고난 핏줄의 힘이 아니라 네 무용과 명예에 힘입어 이들의 아버지로 인정받았어. 이건 실로 엄청난 업적이다. 아르투르. 우리 나이가 고작 스물 둘이야. 이제. 그런데 넌 벌써 네 힘으로 왕국을 차려가니.”

아르투르는 레오폴트의 혀 꼬부라진 말에서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둘이서 한창 이야기하던 주제였다. 위대한 아버지의 후계자로 낙점된 아들들에게는 그들만이 가지는 시련이 있었다. 아버지를 능가하지 못하면 평생을,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한다는 시련.

“우리의 스무 살 생일에도 똑같은 이야길 했었지. 내 대답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 삼촌은 위대한 분이야. 비록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졌지만, 알 사람들은 모두가 알아. 서부 대륙을 통일한 자는 두 형제이지, 한 명이 아니라는 것.”

“이 새끼야.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 내가 어딜 가든, 뭘 하든, 페르디난트의 아들이라고 불려. 위대한 페르디난트의 아들이니 그 정도는 해낼 거라는 기대를 받는다고! 내가 정말로 온 힘을 다 바쳐서 뭔가를 해내도, 페르디난트의 아들이니 그 정도는 당연히 할 거라고 말한단 말이다! 제기랄, 너는 사생아니까 조금만 잘해도 주변에서 인정해주잖아!”

말을 내뱉은 레오폴트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순식간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그러려던 게 아니고…내 말은….”

아버지의 그림자가 자신의 삶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면 아르투르에겐 출생이 일생의 문제였다. 아무리 친해도 건드려서는 안 될 문제가 있는 법이었다. 출생 문제는 항상 아르투르의 콤플렉스였고, 레오폴트는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말을 주워 담아야되나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아르투르는 그냥 피식 웃어보였다.

“하기야, 니 말도 맞다. 어떻게 보면 사생아로 태어난 게 도움이 된 걸지도 모르겠어. 왕자로서 받을 수 있는 교육은 모두 받았음에도, 의무는 하나도 지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정당하게 나로서 평가 받는 데는 사생아로 태어난 게 좋은 일 일지도 몰라.”

아르투르는 회한이 섞인 목소리로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레오폴트는 순간 아르투르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분명히 같은 나이고, 같이 자랐건만, 아버지의 심복들에게 느끼던 무게감과 연륜이 느껴졌다.

“… 진심이냐?”

아르투르는 킥킥 웃으면서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쳤다. 술이 흘러넘쳤다.

“당연히 아니지! 이 금수저 중의 금수저 새끼야! 아, 배 아파 죽겠네. 스티리아 대공국에 묻힌 은광이 금화로 환산하면 매년 얼마나 산출된다고? 금화 이십만 닢이라고 했냐, 오십만 닢 이랬냐? 씨발! 난 칼 하나 물려받은 게 전분데!”

“너 이 새끼, 그거 마법검이잖아! 니 부하들한테 다 들었어 임마!”

“그럼 마법검이랑 대공국이랑 바꿀래?”

“아, 그건 아니지.”

두 사람은 껄껄 웃으면서 잔을 부딪친 후 내려두었다. 레오폴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네가 하이에버에서 난장판을 피워둔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아델라이데에게 들었나?”

“아니?”

“뭐, 여러 흥미로운 일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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