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04화 (10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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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무너진 성벽 위에 의기양양하게 서서 퇴각을 준비하는 적들을 바라봤다.

“만세! 두라노 만세! 아르투르 만세!”

“기적이야! 기적이 일어났다!”

도시 바깥을 잔뜩 포위하고 있던 적군들은 막사를 걷은 후 가져갈 수 없는 모든 공성 장비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올 때는 승전의 확신에 가득 차서 왔던 군대는 이제는 패잔병이 되어 터덜터덜 돌아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들의 사기가 꺾였음이 가득 보였다.

이제야 소개하게 되긴 했지만, 포위가 시작될 무렵, 아르투르가 시작해둔 외교전의 성과이기도 했다. 빚을 갚지 못했으니 도시를 멸망시키겠다는 피오렌치아의 선언은 무도한 요구가 분명했다. 워낙 그 위세가 강해보여서 당시에는 다들 눈치만 보았을 뿐이지, 애초에 전혀 명분이 없는 전쟁이란 바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다가 피오렌치아 군사력의 실상이 드러나자, 각지의 세력들이 드러내놓고 비난 선언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국제 여론은 갈수록 연합군에게 나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피오레 가문의 영향력 아래 있던 교황청도 이렇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중재 의사를 드러냈다. 더 이상 사건이 커졌다간 피오레 가문과 교황청 간의 오랜 유착 관계가 문제가 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공격자들을 물러나게 한 것은 말뿐인 비난이 아니었다. 두라노 서쪽으로 사흘거리쯤에 구원군이 있었고, 이들이 포위를 풀게 한 실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라노 시민들은 팔천 여명에 달하는 중무장 병력이 도시로 접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각기 다른 일곱 개의 가문 문장들이 휘날렸다. 구원군의 선두에 선 깃발은 붉은 바탕의 포효하는 사자와, 앞발을 들어 올린 곰이었다. 다름 아닌, 그의 사촌인 레오폴트 백작과 전 약혼자, 아델라이데 백작의 깃발들이었다.

“레오폴트! 제때 와줬군!”

사자 깃발을 본 아르투르는 휘파람을 불며, 말에 올라 자신의 측근들을 데리고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갔다. 저쪽에서도 기사들로 이뤄진 일단의 무리가 말을 달려오고 있었고, 눈에 띄는 황금빛 갑옷을 입은 영주가 선두에 있었다.

양측은 가까워지자 말의 속도를 줄였고, 마침내 서로 마주했다. 황금 갑옷의 영주가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올리자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짜식, 아직 안 뒈지고 살아있었네.”

레오폴트는 이죽대었고, 아르투르도 간만에 구김 한 점 없는 순수한 웃음소리를 낼 수 있었다.

“네놈 상판이 반가운 날이 올 줄은 몰랐군!”

두 왕족은 의기투합하며 서로를 껴안았고, 그 뒤로도 서로 머리도 툭툭 치면서 험한 말을 주고받다가, 격렬한 레슬링을 벌이며 엎치락뒤치락 했다. 에렌이나 조레스 같은 자은 사람들은 말려야하나 난처해했지만 시라노와 레오폴트의 근위 기사들은 껄껄대며 웃어댔다.

“신경 쓰지 마시오. 우리 기사들은 원래 거친 사람들이거든. 두 분의 친분을 뜻할 뿐이니, 걱정할 것 없소.”

두 젊은 왕족은 나뒹굴면서 먼지 범벅이 되어 볼썽사나운 꼴이 되고도 뭐가 그리 좋은 지 실실 웃어댔고, 근위 기사들이 헛기침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아마 하루종일 그러고 놀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일단 해후는 미루기로 했다.

“네게 서신을 보낼 때만 해도 아무런 기대 없이 보냈던 일이다. 삼촌이 이미 왕대비와 전쟁 중 이시잖나. 너도 당연히 그쪽에 참전했을 줄 알았지. 이쪽으로 와도 괜찮은 거냐?”

“그건 아버지 전쟁이지, 내 전쟁은 아니야. 아버지의 후계자 자리만 약속해준다면 사촌들이랑 싸울 생각 별로 없어. 삼촌인 페르넬 대왕이 만든 왕위에도 관심 없고. 그런데 뭐하러 숙모랑 싸우겠어? 명절마다 보기 거북해지게.”

“흠. 내가 아는 숙부는 그런 걸 허락할 분은 아닌데 말이지.”

레오폴트는 피식 웃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이쪽 방면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어. 놈들이 두라노를 멸망시키면 그건 나한테도 아주 위협적인 일이지. 내 영지, 슈토벤이 저런 근본도 모르는 상것들과 국경을 접하게 되는 건 사절이다. 공화국이니 뭐니, 꼴 보기 싫어 죽겠더군. 왕족과 귀족, 평민이 엄연히 다르거늘 대중이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모두 쳐 죽일 놈들이지.”

아르투르는 자신의 두라노 부하들을 슬쩍 바라봤다. 그들은 표정 관리는 잘하고 있지만, 레오폴트의 말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 뻔했다.

‘레오폴트에게 자제해달라고 말한들, 소용없겠지. 자기 의견을 드러내는 걸 전혀 꺼리지 않는 녀석이니까.’

어쩌면 사생아 왕자인 자신과 녀석이 친구가 된 것 자체가 어려서 가능했던 일일지도 몰랐다. 어려서는 당연시 여겼던 것들을 되돌아봤다.

‘레오폴트는 금수저를 쥐는 귀족들 가운데서도 특출난 놈이지. 태어나자마자 가장 번영하는 백작령을 받았어. 그건 평생 왕실에 봉직한 왕실 기사들이 은퇴할 때나 받을 법한 거였어. 게다가 지금은 대공국의 후계자이자 왕위 계승 서열 5위에 있는 놈인데, 눈에 뵈는 게 있다면 그게 이상하겠지.’

레오폴트의 곁으로 구원군에 합류한 변경 영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강인한 기사 군주들이었고, 아르투르와는 구면인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이가 좋은 자도, 아닌 자도 있었지만 모두 사감을 뒤로 하고 당장 협력할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다.

이들이 참전한 이유는 레오폴트와 같은 이유였다. 랑트리뷔아체 - 피오렌치아 동맹은 거대한 군대를 일으켜 반도 내에 감히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작 거기에 자극 받은 건 레무리아 반도와 국경을 접한 변경 영주들이었고, 이들은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도시 국가들을 한번 손봐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차례로 그들과 악수를 하던 차에, 우락부락하고 강인한 기사 군주들 사이에 껴 있는 연약한 소녀가 보였다.

“다시 뵙게 되었네요. 아르투르 공.”

우아한 백색 옷을 입고, 의젓하게 말에 올라있는 소녀의 정체는 도파뉴 백작, 아델라이데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한층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제 그녀는 소녀에서 여자로 넘어가는 시기에 있었다.

“위르마넨 가문은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하러 왔습니다.”

그녀는 기품을 유지한 채,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고 아르투르도 목례로 답했다.

“이토록 위험한 시기에 호의에 보답해준 위르마넨 가문의 가주께 감사를 표하는 바요.”

아델라이데의 곁에서 그녀를 호위하던 덩치 큰 중년의 사내도 투구를 벗었다. 아르투르에게 구해지고, 함께 도적단을 무찌르던 알튼 남작이었다.

“저희 알튼 가문 역시 은혜를 잊지 않고 도우러왔습니다. 아르투르 공. 음유시인들이 그대의 명성을 노래해오더군요. 공께서 우리 가문과 도파뉴 영지를 구하셨으니, 저희 역시 공께 도움을 드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입니다.”

알튼 남작의 주변에는 위르마넨 가문의 기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고, 아르투르는 그들의 행동에 절로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자신의 동류들을 다시 만난 것이다!

“크레이스 경! 당신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이곳 사람들은 신의가 없고, 밥 먹듯이 편을 바꾸오. 신의 있는 기사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진정으로 기쁘군! 내 도움을 잊지 않고 먼 길을 와준 여러분의 공로에 내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겠소. 자, 일단 자리를 옮깁시다. 먼 길을 온 여러분을 위해 피로연을 준비해두었소.”

낯익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마스터, 왜 저는 안 찾으십니까?! 섭섭하게 말이에요!”

케이는 이제 제법 장정티가 났다. 그와 함께 있는 레오폴트의 종자, 막시밀리안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이며 예를 취했지만 케이는 주저함 없이 다가와 자신의 곁에 섰다. 그의 몸은 이제 소년티를 벗기 시작했고, 말도 능숙하게 몰았다.

“이제 제법 종자답구나. 녀석.”

아르투르는 손을 뻗어 케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저도 노력 많이 했다고요! 아직 마스터를 따라가려면 멀었지만, 아니… 평생 못 따라갈지도 모르지만… 노력만큼은 뒤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아르투르는 껄껄껄 웃어보였다,

“카밀도 왔느냐?”

고개를 끄덕이는 케이.

“네. 하지만 귀족 나리들과 함께 있으면 불편하다고 후방에서 보병대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여전하군. 둘 다 건강한 모양이니 되었다. 가자. 식사를 하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알려다오.”

아르투르는 행렬의 선두에 서서, 레오폴트와 함께 말을 몰았다. 종자들이 바짝 그들의 뒤에 따라붙었다. 영주들은 각자 서열에 따라 앞서거나 뒤에 서서 말을 몰았다. 아델라이데 백작은 아주 눈에 띄었다. 위르마넨 가문은 굉장히 오래된 가문이었고, 작위도 변경백으로서 영주들 가운데 가장 높았기에 그들의 선두에 서야했기 때문이다.

육중한 군마에 올라 중무장한 기사 영주들에 비해 그녀의 말은 크기도 작고, 몸집은 반만 하니 절로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향했다.

‘겁 먹지마. 움츠려 들면 안 돼. 허리 꼿꼿이 피고, 얼굴은 치켜들고. 말고삐도 잘 당기고.’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눈에 받는 것이 익숙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최대한 위엄을 지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린 소녀가 맞지 않는 큰 옷을 입고 용쓰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못했다.

그녀가 탄 흑마는 기사들의 것에 비하면 작기는 했지만, 그녀의 덩치에 비해선 너무 큰 것이었다. 나름대로 위엄을 살리고자 택한 말이었건만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족쇄가 되어있었다.

‘아르투르 공께서 내 옆으로 와서 같이 말을 몰아주시면 좋으련만. 조금이라도 나를 뒤돌아주셨으면.’

그녀의 간절한 눈빛에도 아르투르는 레오폴트 및 기사들과 담소를 나눌 뿐, 그녀가 바라던 대로 다가와서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물론 아르투르도 그녀가 도움을 원한다는 걸 느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를 돕는다면 아델라이데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이었다.

그녀는 남자건 여자건, 나이가 많건 적건, 한 영지의 통치자였고 기사들의 주군이었다. 그리고 기사들은 본능적으로 누구에게 자신의 목숨을 걸어도 될지 깨닫는 자들이었다.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은 가차 없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니, 그녀가 진정으로 영주로서 홀로 서고 위해선 이런 시련쯤은 스스로 극복해야했다.

아델라이데는 이를 질끈 물고, 승마에 대해 가르침 받았던 것에 집중했다. 곧 알튼 남작이 다가와 후열로 갈 것을 권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그녀는 꿋꿋이 선두를 고집했고, 결국 허벅지 힘으로 말을 다루는데 성공했다. 자신의 의지에 말을 복종시킨 아델라이데 백작은 두 왕자들의 사이로 말을 몰아들어왔고, 그들과 함께 두라노에 입성했다. 수십만에 달하는 도시의 모든 인파가 한 명도 빠짐없이 나와 거리를 가득 채우며 자신들의 성 내로 진입한 자들을 환영했다.

“아르투르! 아르투르! 아르투르! 아르투르!”

반년에 걸친, 기나긴 포위전이었다. 두라노 시민들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만 했지만 도시는 마침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두라노 인들은 심리적 긴장감에서 벗어나 구원군을 열렬히 환영했고, 그들의 머리 위로 꽃잎을 쏟아 부었다.

아르투르는 떨어지는 꽃잎을 손에 쥔 후,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군중을 향해서 그는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르투르는 그들과 자신이 특별한 유대로 결속되었음을 깨달았다. 비록 타고난 신분은 다르지만 평생에 걸쳐 잊지 못할 기억으로 엮어진 한 가족이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시민들에게 이토록 열렬한 지지를 받는 아르투르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투르가 대체 너희를 위해 무엇을 베풀어서 이리도 기뻐하고 있느냐? 도시의 해방이 그렇게 즐거우냐? 너희의 새 주인이 그렇게 존경스럽단 말이냐? 군주가 백성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의 손을 붙잡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어리둥절한 레오폴트의 목소리에 답한 것은 감격에 찬 에렌의 목소리였다.

“고귀한 분이시여, 아르투르 공께서는 저희의 주인이 아니십니다. 공께서는 저희 두라노 인들의 형제이며 국가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온 힘을 다해 그분의 자식들을 구해내셨으니, 자녀들은 감격 속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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