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아르투르는 차분히 답했다.
“네 실력은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껏 네 발톱을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것만으로도, 넌 일류겠지. 내가 섣불리 네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다른 이유야.”
샤를로트는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다.
“내 실력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면 고민할 이유가 없는데? 네 입장에선 좋은 일이잖아. 그것도 엄청나게.”
아르투르는 시종일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기술자들을 사고로 위장해서 죽인다니, 그건 그냥 민간인 살해잖나. 그런 불명예스런 방법을 쓰라고?”
샤를로트는 아르투르의 말이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기사다운 생각이야. 정정당당하네. 기사들의 땅이라면 그런 모습이 존중받겠지만, 이 땅에선 정정당당이란 곧 바보란 뜻이거든. 우린 이렇게 보거든. 전쟁 기술자들이 어떻게 민간인이야? 칼만 안 들었지, 놈들이 만든 무기로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는데. 오히려 병사들보다 더 악랄한 놈들 아닌가? 자긴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남을 죽이니까.”
아르투르가 선뜻 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에게 전쟁이란 가능한 한 기사도적 양식에 따라 치러지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적들은 기사도적 양식은 물론, 민간인 학살 금지라는 최소한의 선마저 지키지 않고 있었다. 이건 그냥 바보짓 아닌가? 무엇보다 그에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레무스에선 레무스의 법을 따라야겠지. 승낙하겠어. 다만, 민간인은 가급적 덜 휘말렸으면 좋겠군.”
샤를로트는 표정을 바꾸더니, 슬그머니 웃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왕자님.”
아르투르는 어째선지 그녀의 행동이 비아냥같이 느껴졌다. 어쩌면 자기 기사도가 이 땅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지도.
“좋아. 그렇다면 네가 대가로 바라는 건 뭔데? 그리고 나를 왜 도왔는지도 납득이 가게 해명해봐. 여전히 네가 날 돕는지,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가니까.”
샤를토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냥 도와줬다고 하면 안 믿겠지?”
아르투르는 불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장난 칠 기분은 아니다만.”
“뭐, 반 정도는 사실이었어. 분위기나 풀어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네. 오늘은 시종일관 진지하네. 그런 면은 나쁘지 않아. 아무튼 왕자님이 원하시는 대로 동기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피오레 가문은 능력주의로 돌아간다고 내가 앞서 이야기 했었지. 그런 상황에서, 만약 이번 원정이 실패하게 된다? 그러면 굴리엘모는 가문 내에서 입지가 대단히 줄어들 거야. 아무리 현 가주의 아들이라고 한들 이 정도 규모의 프로젝트를 성과 없이 날려버리면 가문 내에선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지. 좀 더 경륜 있고 안정적인 사람을 차기 가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생기겠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인 아르투르.
“그럼 네 미래의 남편이 가주 자리를 잃는 거잖나? 네 자식들이 가주를 승계할 가능성도 낮아질거고, 그럼 그게 어떻게 네 이득일 수 있지?”
귀족 가문의 약혼은 사실상 결혼의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혼기가 찬 나이까지 약혼 상태로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글쌔, 그건 개인적인 애정 문제나 집안 문제가 얽혀 있는 것이라서 네게 말하긴 좀 그렇고, 이렇게만 말할게. 걔랑 결혼할 생각 없어. 알다시피, 결혼은 우리 귀족들에게 인생 최대의 비즈니스잖아? 난 권력 꼭대기를 원하고, 그러니 그런 조건에 맞는 사람과 해야겠지. 굴리엘모는 최상층 권력을 원하지도 않고, 가진다한들 다룰 줄도 모를 거야. 이 정도면 내가 약혼자를 배신하려는 이유가 설명이 될까?”
그래. 처음으로 재회했을 때부터 그녀에게 느꼈던 꺼림칙함의 근원이 이것이었다. 그건 권력에 대한 끝없는 야망이었고, 숨길 생각조차 없는 적나라한 욕망이었다.
“네 말대로,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아르투르는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어쨌든 내 기준으론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약혼을 했다면 큰 하자가 없는 한 결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혼을 서약했다는 것은 죽음이 갈라놓기 전까지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마음의 열정이 식었건,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건 약속을 했다면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은 해야 하지 않나?”
샤를로트의 얼굴에 순간 씁쓸한 표정이 지나쳐갔다.
“네 말에 틀린 건 없어. 네 관점에선 옳고 그름이 명백하고, 흑과 백으로 세상을 구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 스스로가 그렇게 엄격하게 살아가니까.”
아르투르는 그것이 샤를로트가 자신의 부도덕함을 시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지. 맹세, 약속, 증표,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어.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지. 평범한 사람들은 너와 달라. 아르투르. 그들은 처음에 뜻한 바를 끝까지 끌고 가지도 않고, 눈앞에 이득이 있으면 그것에 먼저 눈이 가기 마련이야. 자신들이 신의 대리인이라는 성직자들도 다를 바 없어. 그때그때 갈등하며, 자신에게 좀 더 이득이 되는 길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아등바등할 뿐이지. 일개촌민이건, 왕이건 다르지 않아. 그게 죽을 운명을 가진 우리 인간들의 삶이야.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는 회색 지대야말로 평범한 인간들이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곳이라고.”
샤를로트는 후드를 뒤집어쓰며, 통로를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나 역시 그런 평범한 사람일뿐이야.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 너 같은 특별한 인간과는 다르지. 나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들고,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고 너와 거래를 하러 왔다. 아르투르. 나는 외상은 받지 않지만, 네 말에는 신의가 있으니 당장 보상을 요구하진 않겠어. 필요한 게 있다면, 그 때 적당한 가격으로 되돌려줄 것을 기대할게.”
“내가 볼 때 셈이 맞는다면, 또 그것이 내 명예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이 빚은 반드시 갚겠다고 맹세하마.”
슬며시 웃어보이는 샤를로트.
“난 공정한 거래만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야. 적지도 많지도 않게, 이 호의에 딱 동등한 보상을 요구하겠어. 그럼 살아남으라고. 빚을 떼어 먹히는 건 결코 바라지 않는 바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돌아섰고,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아르투르는 돌아가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기사도에 입각한 정정당당한 싸움만 하고자 했던 자신이, 언젠가부터 적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그들 사이에 배신을 부추겼다. 완전히 결백하지는 않더라도 무기를 들지 않은 이들을 죽이는 것을 사주 하는 게 맞을까?
나쁜 일인가?
이것이 과연 기사다운 일일까?
이것이 과연 명예로운 일일까?
아르투르는 걸어가며 성검의 일부분을 슬쩍 뽑았다. 자신이 의지의 힘을 불어넣자 강하게 빛이 났다. 아르투르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도로 검집에 집어넣은 후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무엇이 옳은 지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해야 할 때였다.
‘전쟁의 참화로부터 무고한 이들을 지키는 것만큼 명예로운 일이 어디 있겠어?’
***
그 뒤의 양상은 방어 측 입장에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포탄이 바닥난 상황에서 새롭게 보급해주어야 할 랑트리뷔아체의 무기 공장에선 정체불명의 원인으로 인한 대규모 사고가 일어났다. 수십 명이 죽고 다쳤다고 했다. 포탄이 바닥난 사이 두라노 인들은 성벽을 재건하고 바리케이트를 쳐서 두터운 방어선을 형성했다. 공격 측 병사들이 몇 번 조심스레 공격을 가해봤지만 별 효과는 없었고, 병사들 사이엔 무기력과 회의감이 퍼져나갔다.
그럼에도 군사적으로 보면 연합군이 불리하지만은 않았고, 이제야 백중세가 맞춰진 셈이었지만 실패가 누적되자 공격측 지도부들의 의지가 먼저 꺾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안을 모색하는 대신 서로 간에 책임 공방을 벌이며 비난을 벌였고, 공동 작전에도 비협조적인 태세를 취했다.
“대체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포탄 공장이 그런 꼴이 난단 말이오?!”
“말 함부로 하지 마시오! 피오렌치아는 여태 해놓은 공적이 하나 없으니까!”
“제라니아가 다 이긴 전투에서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진작 끝났을 거 아닙니까!”
“아, 불만 있으면 당신이 내 북구인 친구 앞에서 직접 말해보시오. 나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니까?”
그들 사이에 끼여서 가장 난처한 입장이 된 것은 만프레드였다. 상황이 바뀌자 지도부는 충분한 시간을 들인 공성 전술이 아닌, 즉각적인 해법을 원했다.
“아니, 여러분, 분명히 장기간의 포위 전술로 가야한다고, 지휘권을 제게 맡기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전 신무기 없이도 도시를 함락시킬 자신이 있단 말입니다.”
“그 전에 이대로면 연합군이 와해될 판이야. 더 늦기 전에 전면 공격을 가해서 함락시킬 준비를 하게. 선봉은 자네들 몫이야!”
단호히 고개를 젓는 만프레드.
“아뇨. 이건 계약 사항과 다르니 저희는 이번 전투에선 빠지겠습니다. 여러분들끼리 잘해보시지요.”
그렇게 금괴 기사단과 만프레드가 이탈했다. 다시 지휘권을 잡은 건 아그나델로 장군이었지만 상황은 이전만 못했다. 더 이상 각 군 지휘부가 제대로 협력해주지 않았으니, 뭘 하든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각자 인력들을 차출해서 내게 보내주시오. 강에 댐을 쌓아 도시로 들어가는 물길 자체를 막아버립시다. 그러면 항복하지 않고선 배기지 못 할 거요.”
그것은 시행만 되었다면 분명히 위력적인 작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투르가 그걸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해가 저문 후, 결사대를 이끌고 나가 공사의 진행을 방해하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출격 시간은 해가 저문 직후, 자정, 동트기 직전을 번갈아가며 변칙적으로 공격해댔다. 공격군 병사들은 점차 희망을 잃어갔고, 통제도 느슨해졌다. 그 첫 번째 징후는 피오렌치아 군대에서 나타났다.
“백인대장님, 언제까지 이런 가망 없는 짓을 해야 합니까? 어제도 적의 급습에 마리오와 루이지가 죽었습니다. 상급 장교 놈들은 우리를 고기 방패로만 알고, 무작정 돌격하란 말만 하지 않습니까? 자기들은 안전한 후방에만 빠져있으면서 말입니다.”
자칫하면 항명으로 처형될 수 있는 이 불온한 말을 먼저 입에 올린 사람은 피오렌치아 제 1 백인대의 신임장교, 십인대장 마르코였다. 그는 국가의 영광에 심취했던 청년이었고, 승전이 가져다 줄 진급과 약탈물에 대한 기대도 크던 사내였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건 국가에 대한 실망과, 전쟁에 대한 환멸이었다.
“이게 무슨 위대한 군대입니까? 매일 제 친구들이, 형제들이 하나둘씩 죽고 있는데 정작 전쟁을 결정할 이들은 후방에서 편히 지내고 있고, 우리는 적의 야습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자질 못합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우리를 보고 용기가 부족하다, 애국심이 부족하다, 이딴 말이나 지껄이고 있지 않습니까!”
개전 당시에 마르코의 지나친 호승심을 가라앉히던 백인대장 레니에는 이번에도 그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쉿. 듣는 이들이 많네.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일단 조용히 있어주게.”
그 날 밤, 레니에는 자신과 뜻이 통하는 몇몇의 백인대장들을 불러 모아 상황을 논의했다.
“내 경험상, 이렇게 되면 도시를 함락시키는 건 글렀네. 저 독종 놈들이 항복할리도 없고.”
“내 생각도 그래. 왜 지도부는 퇴각을 명하지 않는가?”
“벌써 전사자만 오천 명이 넘고, 시의 재정을 그렇게 쏟아부어놓고 아무것도 얻은 게 없잖나. 이대로 돌아가면 반드시 책임 추궁이 있을 테니 그러진 못하는 게지.”
“쯧. 자기네 욕심으로 전쟁만 벌여놓고 추하기 그지없군.”
레니에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내가 고위 관계자에게 직접 들은 정보가 있네. 지도부가 숨기고 있는 내용이네만, 외교적 상황이 그렇게 좋게만 돌아가진 않는 모양이야. 애초에 남들이 보기에 이건 아무런 명분이 없던 전쟁이야.”
“그렇다면 우리에게 반감을 가지던 자들이 반격해올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정식으로 회군을 제의하세.”
레니에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면서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서 교수형에 처해 질 거야. 우리가 도움을 받아야할 곳은 썩어빠진 상부가 아니라, 도시로 돌아가 시민들에게 전쟁의 실상을 알려야 해. 오늘 밤에 떠나세. 바로.”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고 흩어졌다. 공격할 때는 발걸음 하나 맞추질 못하는 피오렌치아 시민군이었지만, 탈영하는 날만큼은 세상 어느 군대보다 빠르고 조직적이었다. 병사들은 날래게 움직이고, 장교들은 앞장서서 망을 봤다. 모두가 빠릿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순박한 병사 안토니오만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지 아군 진영을 바라봤다.
“저, 백인대장님. 정말로 저희 군대를 저버리고 떠나도 되는 겁니까? 저희는 국가에 목숨 바쳐 충성하기로 서약했잖습니까.”
울먹이는 안토니오를 두드리는 레니에.
“안토니오. 잘 듣게. 앞으로 살다보면 자네보고 이런 저런 이유로 목숨을 바치라는 놈들이 많을 거야. 국가를 위해, 신을 위해, 혹은 출세를 위해. 다 남 좋은 일 하자고 가족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 바보짓이야! 피오렌치아의 사내가 목숨을 바칠 건 단 한 가지! 사랑뿐이다!”
그날 밤, 세 개의 백인대가 탈영했다. 다음 날은 다섯 개. 그 다음 날은 일곱 개. 엄청난 양을 자랑하던 피오렌치아의 군대는 스스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