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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02화 (10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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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침묵했다. 아니, 그녀는 피오렌치아의 귀족이고 약혼자가 피오레 가문의 후계자가 아닌가? 뭘 대체 어떻게 하면 피오렌치아의 패배와 피오레 가문의 몰락, 그것도 정인의 패배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설령, 그런 것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그런 걸 바랄 수 있는가?

기사로서 교육받고, 살아온 그로선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발상이었다. 샤를로트는 지체 없이 말을 이었다.

“지금 상태가 좋진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어. 연합군은 도시를 혼란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공격을 계속해 올 거야. 내가 군사 쪽으론 자세히는 몰라. 그렇지만 이번에 랑트리뷔아체에서 대포라는 신무기를 도입했던데, 꽤 치명적이라고 하던데 맞나? 공성전의 향방을 바꿔 놓을 만큼이나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투르.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라니, 유래가 없었지. 물론 장전도 느리고 위력도 제한적이지만… 분명히 충격적인 일이다. 보급되면 공성전의 양상은 바뀔 수도 있겠어. 그래서 네 제안과 대포는 무슨 관련이 있지?”

“차분히 들어봐. 내 장기인 재정관리란 측면에서 볼 땐 약점도 굉장히 많거든. 우선 제작하는데 기존 공성병기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무엇보다, 탄환 한 발이 너무 비싸. 한번 쏠 때마다 쇳덩이를 날려 보내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커. 상계해보면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예산 지출이 빠르고, 심각해.”

아르투르의 대답은 쌀쌀 맞았다.

“그러면 뭐하나? 어차피 이번 전쟁, 경제성 따위를 보고 일으킨 전쟁 아닐 텐데. 아, 혹시 두라노 사람들을 노예로 팔면 그만한 수익이 나오나 보지?”

“함락만 시킨다면 적자를 메꿀 정도는 되는데… 그것도 제때 함락될 때의 이야기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쪽 상태도 지금 안 좋다는 거야. 그래서 다들 조급해지고 있고, 빈틈이 많아지고 있지”

“그러시겠지. 모두 들었다! 네 가문이 다스리는 도시, 피오렌치아가 노예 무역의 중심지라고 하더군. 특히 네 약혼자가 소속한 피오레 가문 말이야! 그런 사악한 제도 위에 부를 쌓아올린 것이 좋더냐? 너희가 그런 자들인 줄 알았더라면 왕국에서 가만 놔두지 않았을 거다. 그때 내가 아직 너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거야.”

성난 어조로 적대감을 표출하는 아르투르였지만, 샤를로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 정말 남들의 비난쯤은 아무래도 없다는 태도였다.

“잠깐. 현안에 집중하지.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모인 게 아닐테니까.”

아르투르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는 샤를로트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기에 꽤 배신감을 느꼈던 차였다. 그동안 피오레 가문에 쌓였던 분노가 표출되었다.

“네게는 이 참상이 냉정할 수 있는 문제인가 보군! 나한테는 그렇지 않다. 너도 부끄러움이란걸 안다면 네 도시가, 네 가문이 속한 일들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짓인지 알아야 할 텐데! 같이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샤를로트는 허리에 손을 얹더니, 오히려 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진정해 아르투르. 동기는 너와 다르지만, 노예제엔 반대하는 입장이야. 임금을 주고 부리는 쪽이 능률이 훨씬 좋거든.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피오레 가문에서, 또 우리 도시에서 힘을 드러낼 수 있던 입장은 아니거든. 기존 이해 관계자들도 아주 많고.”

그럼에도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르투르였다.

“이건 나중에 좀 더 적절한 자리에서 해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아무튼, 명백히 하자. 아르투르. 너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만났고, 나도 사담이나 하자고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지금 우린 개인적 친분, 혹은 대의로 뭉친 사이가 아니야. 공동의 적이 있고, 거기에 서로 도울 수 있다는 이해관계가 있는 거지.”

아르투르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자 생각이 좀 뚜렷해졌다. 그래, 애초에 이 사람에 대해 뭘 얼마나 알았다고. 잠깐 만나서 노닥거린 게 전부지. 그녀가 좋은 사람일거라고 생각한 건 순전히 자신의 기대였을 뿐이다.

“그래. 네가 말한 “이해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보지. 그 점에 대해서도 의문인 게 아주 많거든.”

만족스럽게 웃어보이는 샤를로트.

“기대했던 대로야. 지도자라면 감정 조절쯤은 할 줄 알아야지. 자기감정에 휘둘려 사는 형편없는 녀석들이 얼마나 많은 지. 군주들이 홧김에 싸우는 일만 줄여도 전쟁의 절반은 줄어 들거야.”

아르투르는 침묵으로써 본론으로 들어가란 의사를 내보였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대포알 가격까지 이야기했군. 레무리아 인들은 경제적 동물들이야. 그래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할 때도 정확한 값으로, 가성비를 맞춰서 이기길 선호하지. 그래서 최소한의 대포알만 만들어왔는데, 이미 그게 다 떨어졌어. 당장 내일부턴 대포알이 도시 내로 날아가는 일이 없을거야.”

“그건 꽤 유용한 정보군. 만난 보람이 있는데.”

샤를로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하긴 이르지. 네 말대로 연합군은 돈은 많고, 새로운 대포알들을 주문했거든. 이번엔 아주 많이. 오백 발 정도? 그 정도면 시내를 엉망으로 무너뜨릴 정도는 되겠지?”

아르투르는 입을 다물었다. 적일지 모르는 사람에게 굳이 아군의 사정을 알려서 좋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 오백 발을 싹 다 없애버릴 생각인데.”

아르투르는 노골적인 불신을 얼굴에 드러냈다. 그녀는 교육 받은 귀족이었고, 뛰어난 상재와 다방면의 학식을 지니고 있다는 건 대화를 나눠봐서 알고 있는 일이었다. 집안일에 며느리가 관여하길 원하는 가문이라면, 아주 매력적인 신붓감 일터이다. 하지만, 군사 작전의 명운이 달린 보급품을 빼돌리는 건 완전히 다른 능력을 요구하는 이야기였다.

“네겐 아무런 공식적인 직함이 없잖나. 피오레 가문의 후계자의 약혼자가 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엔 너무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백 명의 기사들로 습격해도 쉽지 않은 일 일거다.”

샤를로트는 옅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말이 맞아. 그리고 다들 내 역량을 그 정도로 생각하지. 덕분에 내 경쟁자들은 누구에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하나씩 자리를 잃고 있고.”

그녀는 눈빛을 고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피오레 가문에서 내 입지는 단순한 굴리엘모의 약혼자가 아니야. 차기 가주를 보필하기 위한 훈련을 받았고, 그를 위해서 필요한 여러 교육을 받았지. 그 중에 네가 높이 여기는 군사 교육이나 무술 단련은 없었지만, 나머지 분야는 전부 잘해냈어. 나중엔 스승들도 뛰어넘었고.”

샤를로트는 머쓱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 자랑을 하려고 한 건 아니고. 능력은 충분하단 거지. 지위도 있어. 피오레 가문은 철저한 실력주의로 돌아가는 곳이고, 덕분에 아직까지는 외부인인 나도 일정 부분 역할을 맡고 있어. 지금 두라노엔 8만에 달하는 원정군이 있고, 이들의 보급 문제를 해결하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과업이야. 너도 잘 알거 아니냐. 돈만 있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

“그건 맞는 말이지. 단순히 식량과 물, 무기를 나눠주는 일만해도 인원수가 이 정도가 되면 그 자체가 심각한 장애물이 되지. 그래서?”

“그 보급로의 유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나야. 원래라면 피오레 가문 사람만 앉히는 자리지만 이걸 어쩌나, 내정해둔 담당자가 뭘 잘못 먹고 식중독에 걸려서 병원에 실려가버렸네. 그래서 내가 급하게 대행으로 투입되었지. 즉 모든 물자가 언제 어디에서 올지 모두 아는 게 나란 말이야. 이제 내가 대포알을 어떻게 없애줄 수 있다는 지 이해하겠어?”

아르투르는 누군가를 평가할 때 항상 눈을 마주쳤다. 그 속엔 많은 것이 담겨있었으니까. 거짓을 말하는 자는 눈동자가 복잡했고, 진실을 말하는 자는 훤했다. 그리고 지금, 샤를로트의 눈웃음 짓는 눈동자 속에는, 순수한 열망이, 먹이 사슬의 위로 올라가려는 열망이 보였다.

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그것에 대한 열망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 열망을 눈앞의 여자처럼 비정함과 냉정함, 엄격한 자기 규율로 빚어낼 수 있는 자들은 소수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항상 권력을 두고 벌이는 게임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는 자들의 공통점이었고.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면모를 숨기고 있었군그래. 샤를로트.”

아르투르는 본능적인 경계심에 바짝 날을 세웠다. 샤를로트는 슬며시 웃어보였을 뿐이다.

“긴장할 것 없잖아.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비밀 통로 속에서, 혼자서 백인을 베는 기사와 호위병 없인 동네 한량 한명 상대로도 제압될 아녀자가 만나면 어느 쪽이 무서워해야겠어?”

“아, 나랑 악연이 있던 사람 중에 너랑 비슷한 사람이 있어. 그 사람 때문에 밥 먹을 때 독이 들었나부터 확인하던 습관이 있어서 말이지. 이런 느낌이 별로 좋지는 않아.”

“네 아버지의 아내, 엘레노어 왕대비 말이네. 닮았다는 건 나한텐 칭찬이야. 그 여자 정말 멋지거든. 난 그 사람을 능가할거고. 뭐, 사담이나 하러 온 건 아니니 본론으로 돌아가자. 너만 승낙한다면 연합군은 대포알을 더 받을 수 없을 거야.”

“네가 그것들을 일부러 늦게 보급하거나, 어디로 빼돌린다고 해도 계속 제조해서 공급하면 곤란해지는 건 마찬가지 일 텐데.”

“음. 보급 중에 그게 습격당해? 그건 내가 용의선상에 오를 테니 곤란하지. 애초에 그럴 의심조차 안 들게 할 생각이야. 제조 단계에서 폭파 시키는 거지. 랑트리뷔아체가 대포를 극비 기술로 다루고 있어서, 자국 도시에 있는 병기창에서만 대포알을 제조하거든. 그런데 알아보니까, 거기에 폭발 물질이나 불을 다루는 시설이 좀 많더라고? 누군가 까딱 잘못하면, 사고가 나서 모든 게 날아가기 딱 좋은 환경 아닐까?”

아르투르는 상쾌한 표정으로 음모를 늘어놓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살벌함을 느꼈다. 동시에, 경험과 배움을 통해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던, 수상쩍은 사건들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깨달았다. 궁중 생활을 돌이켜보면, 우연한 일로 인해서 누군가가 혜택을 보는 일이 간혹 있었다. 그때는 기사 훈련에 전념하느라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나선 무언가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 찝찝함이 이제야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배운 기사의 규율에 따르면, 귀족 숙녀들, 소위 “레이디”들은 순전히 기사들이 지켜줘야 할 대상이었고, 연약하게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교육 받은 “정숙한” 레이디들은 자신의 구혼자와 친족들을 그렇게 대해왔다.

지금 보니 전혀 아니었다. 레이디들은 아버지, 남편, 아들들 앞에서 사랑스런 딸, 아내, 자애로운 어머니의 얼굴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뒤돌아서서는 거미줄 같은 계책을 짜내서 누군가의 것을 빼앗고, 한편으론 지켜왔겠지.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비밀을 딸들의 귀에 속삭였을 것이다.

‘딸아, 네 남자 앞에서는 항상 얌전하고, 사랑스럽고,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처녀 행세를 하 거라. 그것이 네 방패가 될 거다. 누구도 너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너는 그림자 속에서 네 적을 기습할 수 있을 게다.’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니?”

샤를로트는 눈웃음을 지으며 아르투르를 상념에서 깨웠다.

“방금 새로운 전쟁 방식을 배운 것 같은데 말이야. 이곳 사람들, 레무리아 인들은 그렇게 싸우는 것에 익숙했던 거구나. 그래서 이곳을 단검과 망토의 땅, 계략의 땅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똑똑하네. 대부분의 기사들은 이곳에서 몇 년을 지내고도 끝까지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지. 성공 여부에 대해선 걱정 하지 마. 나도 내가 음모 짜는 실력에 자신이 있거든. 네가 칼싸움에 가지는 자신감만큼이나.”

샤를로트는 재차,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며 말했다.

“나의 거래 제안, 받아들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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