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01화 (10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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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신께서 함께 하신다!”

“오오….”

구호소에 몰려든 인파는 아르투르가 행하는 기적을 보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신과 기적이란 먼 존재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신이 있다고 배워왔고, 기도해왔으며, 기적도 실존한다고 믿었다. 가장 냉소적인 사람들조차 함부로 그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남들에게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과,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적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아르투르가 그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 대포알이 쏟아져서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속출했을 때, 그는 성검을 뽑아들었다. 검이 가진 치유의 빛은 부러진 뼈를 붙이고 잘린 살을 재생시켰다.

“팔을 움직여보게.”

기둥 사이에 깔려 완전히 부러졌던 병사는 반신반의한 팔을 움직여봤고, 온전히 기능하는 것을 보고 믿기지 않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오오! 독재관님! 당신은 진정 신이 보낸 사자인 것입니까!”

“그런 거창한 사람은 아니라네. 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그저 우연히 마법의 힘이 담긴 검을 얻었을 뿐이지.”

아르투르는 극구 부인했지만 성 내에는 그가 행하는 기적에 대한 소문이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갔고, 도시 내의 거의 모든 사람이 몰려와 그 광경을 바라봤다. 두라노 시민들은 교육 수준이 높은 편이어서 미신은 잘 믿지 않았지만, 정말로 기적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데 달리 믿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마스터 에렌. 보셨습니까?”

조레스와 시라노조차 기적을 행하는 아르투르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에렌은 경외심이 담긴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며 답했다.

“다시 저 마법의 검을 뽑으실 줄이야. 나는 저것보다 더 한 것도 보았네. 입에서 불길을 내뿜는, 용의 피가 흐르는 반신 영웅이 있다면 믿을 건가?”

시라노는 황당한 듯이 말했다.

“에이, 그건 신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닙니까.”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에렌.

“자네도 배운 사람이니 그렇게 생각할 법하지. 나 역시 그랬네. 기적, 신화, 마법, 이런 것들은 미신을 좋아하는 농부들이나 믿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걸 직접 보고 나니 부정할 수가 없더군. 아까 말한 반신 영웅을 쓰러뜨린 분이 바로 아르투르 공일세. 어쩌면 우리는 후대에 길이 남을 기이한 시대의 주역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걸지도 몰라. 아니 분명하네. 이 시대에 아르투르 공은 결코 평범한 인물로 남지는 않을 것이야.”

시라노는 입을 떡하고 벌렸다.

“맙소사. 그렇다는 말은 옛 신화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이야기가 전부 다 맞을 수도 있다는… 그런 이야기 아닙니까?”

“나도 언젠가 그 부분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군. 내 생각엔 그들의 말이 온전히 사실이 아닌 것만큼이나, 사실이었던 부분도 많지 않나 싶네. 아무튼, 아르투르 공은 여러모로 가치관을 흔드시는 분이야.”

“그것만큼은 분명하군요.”

아무튼, 아르투르가 행하는 기적은 두라노 시민들에겐 자신들이 패배할 리가 없다는 증표로 작용했다. 심지어 포위군들에게조차 기적을 행하는 검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지휘관들은 그걸 적이 퍼뜨린 헛소문이라고 일축했지만, 병사들의 불안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연합군은 계속 기세 좋게 공격을 이어가는 듯 했지만, 사실 그들도 썩 사정이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우선 신형 무기, 사석포는 분명 위력적인 무기였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포탄이 지나치게 비싸서, 한번 공격을 가할 때마다 일개 소대의 한 달 급여분이 사라지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 둘, 셋. 발포! 으악!”

펑 - !

포위 일정을 앞당기기 위해 무리하게 쏘아대던 대포들은 지나치게 열이 올라 스스로 폭발해버리는 일도 잦았고, 그 때마다 사격수들과 대포는 수십 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버렸다. 아르투르는 공포의 존재였고, 아무튼 이런 대규모 공성을 하고 있는 이상 적병들도 결코 편한 상태는 아니었다.

패전에 대한 두려움, 정치적 분열, 비용 문제, 고된 포위 생활이 연합군을 엄습했다. 결국 전쟁은 누가 더 열악한 상황 속에서 끈질기게 버틸 수 있는가에 대한 인내심 싸움으로 이어져갔다. 전투 초기에 있던 치열한 격돌은 사라지고, 지루한 대치가 뒤를 이었다.

***

“독재관님, 긴히 드려야 할 말이 있습니다. 자리를 옮겨주실 수 있을까요?”

한창 사람들을 치료하고 쉬고 있던 아르투르를 찾아온 것은 루크레치아였다. 그는 도시의 다른 젊은 여성들처럼 구호소와 배급소에서 일하는 등, 비전투 분야에서 활발히 일하고 있었다. 참주의 정부로 지내던 시절과 달리, 화려한 비단 옷과 값비싼 화장 대신,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헤진 누더기를 입고 있었지만 아르투르는 지금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루크레치아, 자네는 항상 합당한 일이 있을 때만 나를 찾아왔지. 이번에도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 믿겠네.”

아르투르는 루크레치아와 함께 한 집으로 들어간 후, 문을 닫았다. 루크레치아는 듣는 이가 없는 지 세심하게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포위군의 중요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 독재관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협상을 원하신다더군요.”

그녀의 말을 들은 아르투르는 턱에 손을 올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무엇부터 물으면 좋겠나? 자네가 어떻게 적군들과 교섭했는지? 아니면 나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우선 상황부터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게 협상 의사를 타진하신 분은 수년 전부터 저를 후원해 주셨던 분입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저는 두라노의 소식을 종종 전달해드렸고요. 다만, 독재관님께서 집권하신 뒤로는 소식을 전한 적이 없으며, 그분이 별도의 방법을 통해 제게 연락해오신 겁니다. 저는 그걸 소개해드리는 것이구요.”

아르투르는 팔짱을 끼고,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전에 자네가 내게 말했던 것과는 다른 것 같은데. 자네는 두라노 빈민들을 위해 움직였다고 했고, 루드비코를 지지하고 도운 것도 그런 까닭이라고 했네. 하지만 루드비코의 품에 안겨 지내면서도, 다른 사람의 밀정 노릇을 했다는 일은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나? 사실상, 지금도 나 말고도 외부의 공성자중 누군가와 손을 잡고 있다는 말 아닌가.”

루크레치아는 침착하게 답했다.

“정직한 행동은 아니란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선 여러 방법이 필요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남자들이 탐내는 몸뚱이와 목소리만 가지고 있었다면 진작 누군가의 인형 노릇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흠.”

아르투르는 계속 턱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얼마나 말에 진실성을 담고 있는 지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와 이런 대화를 해본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 여자는 항상 가슴에 비수를 숨기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저희 같은 사람들은 이런 험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양한 길을 열어둘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공께서는 저와 제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의 이익을 가장 잘 대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있는 것이지요.”

아르투르는 그녀가 행간에 숨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으로선 당신을 지지하긴 하지만, 만약 패배해서 빈민가 사람들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당신도 저버릴 수 있다고.

‘그녀의 말을 무시할 근거는 못 되겠군.’

마음에 드는 태도는 아니었다. 특히, 그녀가 기사나 귀족 부인이었다면 지조 없는 행동이라 지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평민들이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건 이미 익히 경험했다. 그러니 그들이 비수를 몇 개 쯤 숨겨둔다 한들,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자를 믿을 수 있다는 것도 아니지만.’

하지만 서로 이득이 되는 면모가 있다면 힘을 합치는 거겠지. 적어도 레무리아 반도라는 곳은 그렇게 돌아가는 곳으로 보였다.

“좋다. 자네가 말하는 그 후원자에 대해 들어보고 싶군.”

“후원자께서는 아르투르 공께서 이미 자신을 잘 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즉각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좋아. 따라가지.”

“단, 홀로 오셔야합니다. 그분께서는 아르투르 공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신원을 밝히길 원치 않으시거든요.”

아르투르는 다시 상황을 되짚어봤다. 적군의 지도부가 협상을 빌미로 비밀스러운 장소로, 아무 수행원도 없이 아군 지도자를 불러낸다? 떳떳하면 공개적인 협상을 제안하면 될 일이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호위정도는 데려올 수 있는 게 상식이었다. 특히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호위병을 데려 올 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뭐, 상관없지.’

하지만 아르투르는 곧 생각을 지우고 루크레치아에게 안내를 지시했다. 어차피 완전무장한 지금이라면 암살자가 열 명이 있건 스무 명이 있건 사실 자신의 알 바는 아니었다. 모두 베어죽이면 그만이니까.

***

루크레치아가 인도한 곳은 오래전에 버려진 하수도였다. 워낙 미로같이 복잡하게 얽혀서 어느 길이 어디로 향하는 지도 알기 힘들었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싸움이 끝나고 시체가 널브러진 전쟁터에 버금갈만한 썩은 내가 풍기고 오물이 튀는 경험은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이런 장소를 횃불 하나만 들고도 제집 찾듯 다니는 걸 보니, 루크레치아는 이 통로를 자주 이용해본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르투르는 루크레치아도 그 나름대로의 강함을 지닌 인물이란 걸 재차 인정했다.

‘이 여자는 훌륭한 교육을 받진 않았고,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신의를 지킬 줄은 모르겠지만, 용감하고 고된 일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군. 곱게 자란 ‘레이디’들이야, 이런 광경을 보자마자 코를 싸매고 도망갔겠지. 아니, 애초에 이런 위험해 보이는 곳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거부했을 거고.’

그 때, 반대편에서 다른 횃불이 보였다. 양측은 동시에 서로를 목격하고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아르투르는 긴장 속에서 여명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루크레치아도 왼손에 단검을 쥔 모습이 보였다. 아르투르는 그녀가 저 자와 한패일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극도의 주의를 기울였다.

루크레치아가 먼저 입을 떼었다.

“만개한 보름달 속에서 작은 소년이 수레바퀴 속의 물을 길어갑니다.”

대답해온 것 역시,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아르투르가 언젠가 들어본.

“엉겅퀴 풀로 만든 찻잎을 바다 위에 띄우니 황금이 쏟아지네.”

두 여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데려왔구나. 잘해줬어. 부를 때까지 물러나있어. 루크레치아.”

“분부하신대로 하겠습니다. 마님.”

루크레치아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건너온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야. 아르투르. 이런 식으로 재회할 줄은 몰랐네?”

횃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는 장신의 여인으로, 분명히 아르투르와 구면이었다.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아르투르는 그녀의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후, 검집에서 손을 떼었다.

“이곳에서 볼 줄은 몰랐다만. 샤를로트. 때와 장소가 좋았다면 환영해줄 수 있었을텐데.”

아르투르의 목소리는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어디까지나 지금 두 사람은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다. 한때 좋은 추억을 가졌건 어쨌건, 그건 지금 사안의 중대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고개를 지으며 슬며시 미소지어보이는 샤를로트.

“곧 환영하게 될 거야, 네가 환영할만한 거래 제안을 가져왔으니까.”

“무슨 소리냐? 네 약혼자가 이 원정에 많은 것이 달려있을 텐데. 내가 절대로 입장을 바꾸지 않으리란 건 아주 잘 알거고.”

피식 웃는 샤를로트.

“왕자님, 똑같은 깃발 아래 서 있다고 다 같은 입장이 아니랍니다. 난 이번 원정이 실패해서 약혼자가 재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길 바래. 정확히는 그의 가문이 아주 처참히 흔들렸으면 좋겠는데.”

아르투르는 그녀의 번득이는 눈빛의 변화를 느꼈다. 감각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던 눈웃음은 가면처럼 순식간에 사라졌고 아주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는 야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노련한 정치가들에게 흔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네가 싸움에서 이기도록 도울 수 있어. 네 명예를 걸고 보상만 약속해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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