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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 !
아그나델로 장군이 책상을 치는 소리가 작전회의실에 가득 울렸다.
“대체 일이 또 왜 이렇게 된 거요?! 당신네 제라니아 인들은 기사 한명 붙들어두는 것 하나 못하나?”
이때를 노렸다는 듯, 피오렌치아의 대표인 굴리엘모도 거들었다.
“당신의 부하인 북구 야만인 놈들이 사생아 왕자의 목을 가져오겠다고 장담하며 금화 상자를 받아 갔을 텐데요. 어떻게 보상하실 겁니까?”
카니아의 의원 역시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내며 해명을 요구했다. 제라니아의 참주, 데로드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분을 삭이고 있다가, 그들의 계속된 독촉에 고개를 들었다.
“시끄럽소! 내 부하는 엄중히 문책할 것이지만, 당신들도 뭐 하나 제대로 해낸 것 없는 주제에 말만 많군! 내 군대는 시내로 한번 진입이라도 했지, 그때 당신들의 군대는 뭘 했소? 어? 말해보시오. 당신부터 말해보시지. 피오레 가문의 도련님.”
굴리엘모는 삐딱하게 팔을 괴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을 지목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차마 데로드가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양,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누구? 나 말인가?”
“그래! 당신 말이야! 군대가 손 하나 까딱 안하면서 돈이면 다 되는 줄 아시오? 그런 식으론 아무것도 못해!”
“어딜 감히! 입조심하시오! 당신네 가문이 내게 빚진 게 한두 푼이 아닐 텐데? 당장 모두 상환을 요구하면 낼 방법 있소?”
그의 위협에도 데로드는 주눅 들지 않고 노려봤다.
“빌어먹을 그놈의 빚, 빚, 빚! 그것 때문에 나와 상관없는 전쟁까지 끌려와서 이 지랄을 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론 성이 안 차나 보군, 날 궁지로 몰지 마라! 애송이! 너희도 썩 좋은 꼴은 못 볼 테니까.”
“뭐야?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기어오르려 드는군! 누가 제라니아의 진짜 주인인지 보여줄까? 내가 쓴 서신 한 통이면 당신은 내일이면 쫓겨나.”
처음에는 화를 내던 아그나델로는 두 사람이 싸우자 속으로 미소 지었다. 제라니아와 피오렌치아를 분리시킬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그건 두라노를 함락시킨 뒤의 이야기였다.
“자, 자 두분 다 진정하시오.”
하지만 그의 중재에 두 사람은 오히려 역정을 냈다.
“이 늙은이가 뭘 잘했다고 껴들어! 당신들이 사전에 그 신무기의 존재만 알려줬어도 훨씬 많이 준비해 왔을 거고, 그럼 저 도시는 진작에 망했어!”
“끼어들지 마시오! 장군! 당신들도 잘한 거 하나 없으니까! 무적의 군대라고 그렇게 자랑을 떨어대더니, 애송이 기사 한 놈 처치 못해서 싸우는 족족 밀려나오는 게 자랑이오?!”
아그나델로 장군 역시 이런 모욕을 그냥 웃어넘기기엔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것들이 어딜 감히! 나는 랑트리뷔아체의 대원수이니라! 그나마 포위가 진행되고 있는 건 우리 랑트리뷔아체 인들 덕분이다! 한 놈은 민간인만 가득하고, 다른 한 놈은 통제도 못하는 야만인에 의존하고 있고! 네놈들의 군대를 군대라고 할 수 있나? 너희 주제를 알아라! 멍청이들아!”
그들은 결국 각자 삿대질을 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실패가 누구 책임이네 고함만 질렀고, 카니아의 대표는 그저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 때, 화려한 장식이 가득 달린 판금 갑옷을 입은 청년 한 명이 과장된 몸짓으로 들어왔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피오레 가문의 의뢰를 받고 온 금괴 기사단의 단장, 만프레드라고 합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용병단장! 돈만 주면 뭐든지 다해주는 기사! 최고의 멋쟁이!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들어온 만프레드는 설명을 멈추고, 머쓱한 표정으로 서로 삿대질을 하던 지휘관들을 보았다. 만프레드의 과장된 자기소개에 몇몇 사람들은 우스워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헛기침을 하며 붉혔던 표정을 원래대로 돌려놓기도 했다.
“음, 다들 바쁘신 것 같은데 나중에 올깝쇼?”
먼저 대답한 것은 카니아의 여성 대표였다.
“괜찮습니다. 콘도티에레. 지금 저희가 하던 이야기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니까요.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성전의 대가시라고 들었습니다. 상황은 전부 전달받으신 것으로 압니다. 묘안이 있으신지요?”
만프레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답했다.
“들으신 소문이 맞습니다! 제가 함락시킨 성만 서른 개, 도시는 열 개가 넘으니까요. 두라노는 규모가 좀 큰 편이지만, 뭐, 아군도 그만큼 많으니 괜찮습니다. 삼 개월만 주시면 도시를 여러분께 바쳐 보이겠습니다. 단, 제가 말하는 바를 잘 따라주셔야 합니다.”
아그나델로와 굴리엘모는 모두 못마땅한 눈치였다.
“삼 개월이나?”
만프레드는 그들이 못 마땅해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아그나델로는 속전속결로 승리를 거두어 두라노 함락을 온전히 자신의 공으로 삼는 것이 목적이었고, 굴리엘모는 최대한 전쟁 비용을 줄이고 싶어 했다. 뭐, 어차피 용병대장 노릇을 하면서 까다로운 조건을 내거는 고용주들을 어떻게 설득해야하는지는 잘 아는 바였다.
“음. 물론 선택은 고용주님들에게 달려있지만, 이미 투자하신 비용이 있으니 굳이 위험 부담을 무릅쓰시는 것보다는 확실한 승리를 거두는 데 집중하는 쪽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그나델로는 실망한 눈치였다.
“삼 개월이라면 지구전, 소모전을 하자는 뜻이겠지. 내가 그걸 몰라서 안한 줄 아나? 내가 자네를 고용하는데 동의했던 건 아르투르와 맞설 수 있는 기사단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어.”
여태까지 유들유들한 태도를 취하던 만프레드는 단호한 표정으로 선을 그었다.
“아뇨. 그렇겐 안됩니다. 제 형제들을 아르투르 앞에 고기 방패로 던지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겁니다.”
눈살을 찌푸리는 굴리엘모.
“원래 용병이 하는 일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 너흰 한두 푼 받는 것도 아니잖아?”
만프레드는 속에선 이미 두 사람에게 모두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한 새끼는 공적에 눈이 먼 꼰대, 한 새끼는 직접 사람 한번 죽여본적 없으면서 남들보곤 그냥 아무렇게나 죽으라는 새끼. 둘 다 아주 개같은 새끼들이었다. 하지만 용병대장으로 성공하려면, 사감 정도는 숨길 줄 알아야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헤헤 웃었다.
“아, 싸우지 못하겠다는 게 아니라, 저희만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다는 겁니다. 때가 되면 물론 저희도 기꺼이 싸울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거 하나만큼은 인정하셔야 한다는 걸 깨달으셨을 겁니다. 아르투르, 그 새끼는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가 아니에요. 인간 병기인 새끼라고요. 어디서 소드마스터라도 데려오지 않는 이상 그놈이랑은 근접 무기로 대화하면 안 됩니다.”
만프레드는 책상 위에 놓인 두라노 지도와 주변에 배치되어있는 모형 군대로 다가가 두라노 진영의 졸병들을 하나씩 치웠다. 그의 손짓이 이어질 때마다, 졸병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왕만 남았다. 만프레드는 보병과 기병, 궁병을 나타내는 모형으로 그것을 둘러쌌다.
“놈은 마지막에 잡을 겁니다. 적의 물자를 고갈시키고, 병사들을 지치게 하고, 도시 내의 전력을 완전히 소진시킨 뒤에요. 그럼 녀석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겠죠. 저희 금괴 기사단은 그때 나서겠습니다. 단, 위험수당은 추가 청구할 겁니다. 이에 동의하시면 지휘를 맡지요.”
네 도시의 의원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속전속결로 끝내는 쪽이 여러모로 좋았지만, 이제 와서 발을 뺄 수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만프레드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지휘를 맡기기로 합의했다.
만프레드가 지휘권을 인수한 순간부터, 연합군의 공성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도시를 향한 대규모 전면 공세는 없었다. 그 자리를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포격과 소수의 인원으로 교대하며 벌이는 교전이 대신했다.
“발포!”
사석포들은 동서남북에 고스란히 배치되어 매 시간마다 탄환을 날려댔다. 목표는 성벽이 아닌, 시내였다.
“피해 - !”
매 번 포격이 가해질 때마다 주택이 무너졌고, 사람이 그 밑에 가득 깔렸다. 장정들이 차출되어 잔해를 치우고 생존자를 구조했지만, 이내 새로운 포탄이 날아들었다. 그것도 똑같이 치웠지만 사방에서 쉬지 않고 포탄을 쏘아대니 끝이 없었다. 점차 두라노에는 폐가가 많아져갔고,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자들과 민간인 부상자들과 시체를 병사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아르투르의 부관인 조레스가 파견되었다. 그는 연합군 사령관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포고문을 외웠다.
“아르투르 공께서는 잠시간의 휴전을 제의하셨습니다. 무차별 포격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민간인들의 형편이 위태롭습니다. 피난처가 통째로 무너져 별도의 매장조차 힘든 희생자들이 많고, 민간인 부상자들이 끊이지 않아 이미 병원은 가득 찼습니다. 인도적 재앙을 막으려면 휴전이 필요합니다.”
연합군을 대표해서 맞이한 것은 아그나델로 장군이었다. 다른 대표들도 승리의 미소를 띄고 조레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우리 병사들은 모두 건강하오. 거부하겠소.”
“그렇다면 민간인 거주 구역에 대한 무차별 포격을 중단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의 행동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전쟁 범죄로서, 기사도 규약에 어긋납니다.”
태평한 표정을 짓는 아그나델로.
“우린 기사가 아니니 기사도를 지킬 필요도 없지.”
조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분의 마지막 제안을 전하겠습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도시에서 내보낼 테니,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전쟁이 끝나면 도시로 돌려보낼 것을 약조하는 국가 간의 공식적인 조약을 맺어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기사가 아니지만 군인이고, 무엇보다 우리는 약자에 대한 자비를 내세우는 구세주 발타리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조금의 명예라도 있거나, 신을 공경한다면 이 제안을 마땅히 받아들여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적 지도부는 모두 웃음을 지었다. 배꼽을 잡고 웃는 자도, 냉소 짓는 이도, 허무한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었다.
“맙소사! 아르투르 공께서는 여기가 어디라고 보고 계신 거요? 푸하하핫!”
“사생아 왕자 놈에게 전해! 사람이 죽는 게 두렵다면 항복하라고! 그러면 혹시 아나? 우리가 승자의 자비를 베풀어 줄지.”
“두라노의 독재관께서 하신 제안은 비현실적입니다. 인도주의적 위기를 빨리 마치는 유일한 길은 항복이 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들을 모두 독재관께 전하겠습니다.”
조레스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고 등을 돌려 주저 없이 걸어 나갔다. 만프레드는 의아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이봐, 아르투르의 부관.”
“말씀하십시오. 콘도티에레 만프레드.”
만프레드는 손에 들린 사과를 한입 깨물어 먹으며 말했다.
“네 주군은 정말로 그런 제안들이 승낙되리라고 본 거냐?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인데, 벌써부터 그런 감상적인 반응을 내보이면 어쩌려고 그러나?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그런다만. 네 주군이 타협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거라면, 내가 중재해줄 수도 있다.”
조레스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태평히 답했다.
“글쎄요. 그분의 생각은 저 같은 필부는 따라가기 어려운 경지에 있지요. 그저 말씀하시는 바를 따를 뿐입니다.”
“뭐, 그래. 명예에 미쳐버린 그놈이야 그렇다고 치고, 너랑 두라노 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진심으로 조언하건데, 지금 항복하는 게 나아. 잔뜩 악에 받친 병사들이 도시를 함락시키면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나? 야만인들이나 할 짓을 하거든. 남자는 꼬챙이에 꿰여죽이고, 여자는 눈에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어린아이들은 머리를 깨서 죽이고… 굳이 그런 끔찍한 광경을 볼 필요 있겠어? 그냥 지금 항복하지. 희생되는 사람이 좀 있겠지만, 다 죽는 것보단 낫잖아?”
조레스는 만프레드의 충고를 가장한 협박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지만,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도시가 함락된다면 말이죠.”
만프레드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도무지, 공성전의 고통을 겪고 있는 고향 사람이 내보일 반응이 아니었다. 격렬한 분노, 혹은 공포가 적절한 반응인데.
“신께서는 항상 저희 아르투르 공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어떤 모략을 짜건 감히 그분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 두라노 인들이 그렇게 신실한 자들이었나?”
“아니요. 하지만 눈앞에서 기적을 보게 되면 누구나 신의 존재를 믿게 되지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콘도티에레께서도 직접 보시면 인정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레스가 하도 확신에 찬 표정으로 걸어 나가서, 만프레드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질 수가 없는 상황인데, 왠지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새끼. 이번에는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