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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릭의 탄식에도 아르투르는 짜증 섞인 표정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시끄럽고. 덤벼라. 너희가 뭐라는 지 관심 없다. 나는 이 도시를 구해야한다.”
“잠깐. 배신자 신의 검이 다시 나타났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네 존재는 신들의 주의를 끌 것이고, 결국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을 파멸 속으로 몰아넣겠지. 이건 너와 네 주변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에 대한 일이야.”
베오릭은 매우 진지한 어조였지만, 아르투르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런 놈이 돈 받고 와서 사람들이나 죽이고 있나? 난 그딴 신탁이니 예언이니 안 믿어. 내가 아는 것은 이 검이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구현할 힘을 준다는 것뿐이다. 신들이 뭐라 생각하건, 나는 이 힘을 주저 없이 빌리겠다. 성검을 아는 놈이라면 일반적인 무기론 대적할 수 없다는 걸 잘 알 테지, 당장 꺼질 테냐? 아니면 성검에 반 토막이 날 테냐? 오래 기다리지 않겠다.”
베오릭은 굉장히 머뭇거리다가, 자신도 허리춤에 있던 또 다른 검을 뽑아들었다. 아니, 그건 검이 아니었다. 그저, 달빛 같은 광채를 내는 광석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날을 두터운 천에 묶어 들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소름끼치는 사기가 느껴졌다.
“그 저주받은 검에게는 다른 한 쌍의 검이 있고, 이것이 남은 잔해이다. 이것이라면 그 검에게도 능히 맞서고 남지.”
“좋아. 내가 먼저 가지.”
광채를 내뿜는 검을 내세우며 아르투르가 다가서려할 때, 베오릭은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아니, 숨겨져 마땅한 기적을 남들 앞에서 대놓고 보일 셈이냐? 그건 불경한 일이다. 신들의 기적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남겨져야만 한다. 이렇게 하지. 지금 이대로 너와 내가 싸운다면 금방 결판이 나진 않을 것이다. 설령, 네가 나를 이기더라도 도중에 너와 검의 힘은 대부분 소진될 것이고 그러면 넌 내 동료들에게 죽게 되겠지. 그러면 이 도시의 함락은 시간 문제다.”
아르투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이번 전쟁이 끝난 후, 종말의 검을 두고 나와 결투를 하자. 물론 그 검은 사용하지 않고. 만약 네가 이긴다면 검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
“그것만으론 거래가 성립되기 어려운 건 알겠지.”
차분하게 답하는 베오릭.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너희의 신과 명예에 걸고 약속한다면, 내 통제 하에 있는 모든 군대를 성벽 바깥으로 물린 후, 나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
…
두라노를 지키는 게 가장 급한 일이었다. 일 대 일 결투야 이기면 그만인 것이었고.
“좋다. 나, 아르투르는 나의 명예와 구세주 발타리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용의 후손, 베오릭이 검의 소유권을 두고 결투를 청해온다면 한번은 무조건 받아들이겠노라고. 대신, 베오릭 역시 패배한다면 자신이 아는 모든 이야기를 해줘야한다는 조건이다.”
“나, 베오릭 역시 종말의 선고자 안칼라타르와 모든 신들의 이름에 걸고 같은 내용을 맹세한다. 맹약에 대한 증표로서 즉각 군대를 철군시키고, 더 이상의 싸움에 가담하지 않겠다.”
둘은 엄숙한 선서를 마치고 돌아섰다. 순수한 군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우스꽝스러운 짓이었고, 순진한 행위였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전사라고 인식했고, 명예는 그들을 단순한 살인자에서 그보다 나은 무언가로 만들어주는 귀중한 것이었다.
“토르스탄, 후퇴 나팔을 울리도록.”
아르투르의 성검을 보고 굳어있던 그는 뿔 나팔을 힘껏 분 후, 허겁지겁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른 북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힐데군드는 김빠진 표정으로 날이 빠진 검을 내던진 후, 아르투르에게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즐거웠어. 다음엔 결판을 내보자고.”
아르투르도 피식 웃었다.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민가를 약탈하거나,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있던 제라니아 군대는 후퇴 나팔이 울리자 어리둥절했지만, 전황이 좋지 않겠거니 생각하면서 후퇴했다. 남쪽으로 들어온 적들이 완전히 빠져나가자, 아르투르는 곧장 에쿠잘루스에 올라타 서쪽으로 향했다.
‘제기랄! 남쪽에서 시간이 너무 오래 끌렸군!’
베오른이 했던 말이나, 북구인들 자체에도 흥미가 갔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해볼 여유조차 없었다. 서쪽, 서쪽 전선이 진짜였다. 병력이 잘 버텨주고 있기만을 바라며 아르투르는 다시금 말을 내달렸다.
***
“전진! 전진하라! 너희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어라!
무너진 성벽의 틈. 우락부락하게 생긴 중년의 장교가 서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왼손에는 우뚝 솟은 그리폰 깃발이, 오른손에는 검을 든 그는 머뭇거리는 이들에게 고함을 쳐서 도시로 진입시켰다. 피오렌치아의 인들과 달리, 랑트리뷔아체인들은 호전적인 자들이었다. 그들은 애국심과 호국심, 그리고 약탈품에 대한 열망에 가득 차 일사분란하게 시내로 진입했다.
“놈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시라노는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채, 앞장서서 수비대를 지휘했다. 그가 내리는 구령에 맞추어 두라노 시민군은 일제히 방패와 창을 앞세우며 전진했다. 엉성하긴 했지만, 하나의 군대로 기능하기는 했다. 오랜 훈련의 결과가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발을 맞춰라! 앞 사람이 쓰러지면 바로 뒤로 들어가서 메꾼다!”
하지만 랑트리뷔아체의 병사들은 피식 웃어보였다.
“샌님들이 제법이군. 중대, 집결하라!”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건만, 도시로 진입한 랑트리뷔아체 병사들은 이미 한 곳에 뭉쳐 방진을 만들고 있었다. 이들은 다른 도시 국가의 시민군과는 달랐다. 매년 훈련을 꾸준히 받았으며, 도시가 융성해지면 그만큼 일반 시민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갔다. 그렇기에 평범한 시민들도 정복 전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훈련과 전쟁에도 적극적으로 응하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군사 복무 중에 봉급을 많이 줬다.
“도리에론 중대! 눈의 탑에 우리 중대의 깃발을 꽂아야 하지 않겠나! 돌격하라! 성스러운 그리폰을 위하여!”
“성스러운 그리폰을 위하여!”
정식 구령이 내려지자 그들은 일제히 여러 겹의 열로 된 방진을 짰다. 랑트리뷔아체 군은 일반적인 창보다 두 배는 긴 창을 앞세웠고, 그러고서도 전혀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다가왔다. 두라노 인들의 눈에 공포가 퍼져나갔다. 그들 자신이 잘 알았다. 자신들은 몇 달 전에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급조된 병력, 저들은 수년 간 훈련 받은 정예.
“돌겨어어억 - !”
돌격 구령에 맞추어 병사들이 일제히 전쟁 구호를 외쳤다.
“랑트리뷔아체 만세!”
시라노는 이를 악물더니, 자신도 직접 창을 쥐고 앞장서서 뛰쳐나갔다.
“두라노 만세 -!”
각각 길고 짧은 창을 든 수백 명의 병사들이 돌격해서 서로에게 부딪쳤다. 여러 겹의 창병으로 이루어진 대열이 부딪치자, 첫 교전에서 수십 명의 병사들이 쇠꼬챙이에 당해 처절히 죽어갔다. 너무나도 격렬한 첫 충돌이 끝나자, 양측은 서로 몇 걸음 물러나 숨을 고르고 백병전의 충격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양측의 사상자가 명확히 보였다. 더 긴 창을 들고, 훌륭한 갑옷을 입은 랑트리뷔아체 군이 크게 우세했다. 승세를 타고 있음을 깨달은 랑트리뷔아체 인들은 돌격의 충격에서 벗어나 돌격을 반복했다.
“성스러운 그리폰이여! 돌격!”
랑트리뷔아체의 전투 함성이 들릴 때마다 두라노 인들이 가득 쓰러졌지만, 그래도 그들은 아득바득 버텼다. 이 지점이 함락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력으로 버티는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들이 포기하기 직전, 마침내 백마 탄 기사가 나타났다.
“제군들! 잘 버텨주었다! 이제부터 나를 따르라! 승리가 너희를 기다린다!”
아르투르는 짤막한 인사만을 남긴 후, 에쿠잘루스에서 번쩍 뛰어내린 후, 그리폰 깃발을 향해 달려갔다. 고슴도치처럼 장창을 내세운 창병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아르투르는 여명을 거칠게 휘둘러 앞을 가로막은 창들을 치워낸 뒤, 대열에 몸통으로 들이박았다.
“크헉!”
선두에 있던 병사 몇이 나뒹굴었고, 잘 조직되어있던 장창 방진의 일부가 허물어졌다. 그 뒤로 아르투르가 파고들어 손에 잡히는 모든 적들을 도륙했다.
“뭘 하는가! 모두 독재관을 도와라!”
시라노는 곧장 병사들을 이끌고 돌격해 아르투르를 도왔다. 랑트리뷔아체 병사들도 쉽사리 물러나진 않았다.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이번 싸움만 이기면 도시는 함락되리라. 여기까지 오고자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쓰러졌는가,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양 군은 그리폰 깃발을 두고 싸움을 벌였다. 아르투르가 정신없이 적들을 전면에서 상대하는 사이, 한 두라노 청년이 깃발을 지키던 수비병을 쓰러뜨리고 그것을 차지했다. 자신들의 깃발이 넘어간 것을 본 랑트리뷔아체 인들은 분개했고, 온 힘을 다해 깃발을 되찾기 위해 공격해서 쓰러뜨렸다. 하지만 그들이 깃발을 되찾기 무섭게, 또 다른 이들이 공격해왔다.
그 날, 서쪽 성벽에서의 전투는 해가 떠오를 때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물러간 쪽은 랑트리뷔아체 군이었다. 숨을 고른 아르투르는 그리폰 깃발을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는 최후의 적들이 남아있었다.
초인적인 체력을 지닌 그조차, 싸움이 너무 오래한 모양인지 눈이 감겨오고 있었다.
“퇴로는 막혔고, 너희 본대는 물러갔다. 항복한다면 포로로서 대우해주겠다.”
그리폰 군단 기를 지키고 선 랑트리뷔아체 인들은 푸른 눈의 십인대장과 절반도 남지 않은 그의 부하들이었다. 그들의 눈에선 죽음의 결의가 느껴졌다. 십인대장은 단호히 답했다.
“우리 군단의 깃발은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소.”
두라노 병사들은 석궁을 조준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들은 동료들의 죽음에 격앙되어 있었고, 피값을 받아내고 싶어 했다. 아르투르는 손을 내저어 그들을 저지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쉬어버린 목소리를 쥐어짜내 답했다.
“주변을 보라. 오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이 정도면 전쟁의 신에게 바칠 공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아르투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십인대장을 바라봤다.
“군단기는 유지해도 좋다. 명예를 아는 자들이니 따로 구속구를 채우진 않겠다. 다만, 무장은 반납하고 눈의 탑에 구금되어 있어야한다. 너희는 포로 교환이 이루어질 때 군단기와 함께 풀려날 것이다. 이런 항복 조건이면 받아들이겠나?”
병사들의 눈은 모두 젊은 장교에게 향했다. 죽고 싶은 자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대한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들은 아르투르의 제안에 따라 무기를 반납한 후, 자진해서 감옥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들을 당장 죽여서 동료들의 원혼을 달래야한다는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왔지만, 아르투르는 엄숙한 목소리로 그것을 묵살했다.
“랑트리뷔아체 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싸웠다. 그들의 상징인 그리폰처럼 말이야. 비록 적일지라도, 그들의 용맹에 합당한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다.”
여전히 납득하지 않는 자들이 많은 눈치였다. 하기야, 하루아침에 터전이 침략 받은 이들이니 공감하기 어려울 테지.
“게다가, 그쪽에도 잡힌 우리 포로가 있을거다. 우리가 포로를 합당하게 대우해줘야, 그들에게도 같은 처우를 요구할 수 있다. 이들을 구하는 것은 우리들의 동료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제서야 대부분은 납득을 했다. 아르투르는 내심 안도했다.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도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것 외엔 다른 도리가 없을 터였다.
‘오늘 밤엔 너무 많은 피가 흘렀어. 적어도 오늘만큼은 더 이상 사람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군.’
새롭게 떠오른 태양이 두라노를 밝혀내고 있었다. 도시는 그렇게 하루를 또 버텨냈고, 실낱같은 생존의 희망을 이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