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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98화 (9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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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가 말을 타고 달려오며 본 도시 남쪽의 광경은 처참했다. 방어선이 한번 무너져버리자 나머지 시민군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달아나기 바빴다.

“도시가 함락되었다! 도망쳐서 목숨을 구해라!”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병사들은 각자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서부 대륙의 관습에 따르면, 성벽이 무너진 뒤에 점령된 도시는 사흘간의 약탈 대상이 되었다. 병사들은 그동안 점령지에 있는 재물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취할 수 있었고,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평소에는 범죄 행위로 취급 받았을 일탈 행위들도 용인되었다. 그것이 승자의 권리였다.

“우하하하하하- ! 도시는 우리 것이다!”

시내로 입성한 제라니아의 군대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거리낌 없이 억눌러왔던 욕망을 분출했다. 도시의 병사들은 특히 재물에 눈이 멀었다. 경험 많은 병사들에겐 한 밑천을 잡아 지긋지긋한 전쟁을 때려치울 기회였고, 도시를 선망하던 시골 청년들에겐 평생 땅이나 갈 운명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였다. 아르투르는 그놈들은 일단 내버려뒀다. 다 이긴 전투를 약탈에 전념하다 패배한 군대가 한 둘이 아니었다. 적들이 그런 짓을 똑같이 해준다면 나쁠 게 없었다.

반면, 야만인 부대는 그가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야만인들에게 도시로 대변되는 문명의 화려함은 항상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동경의 대상을 마음대로 빼앗고 짓밟을 수 있다는 기대감은 광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죽어라 -! 쓰레기들아!”

분노한 아르투르는 그들 사이를 마구 휘저으며 야만인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쓰러뜨렸다. 도망치는 도시민들을 보며 비웃던 야만인 부대는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고, 아르투르가 나타나 그들을 쓰러뜨리기 시작하자 노획물을 챙겨서 급히 달아나기 바빴다.

양 손에 하나씩 쥔 여명을 휘두르며 이어진 검무는, 쉼 없이 적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앞 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형편없는 판단력을 지닌 자는 그의 상대가 아니었고, 판단력을 갖춘 자라면 약탈 좀 하려고 아르투르와 싸우는 일은 어리석다는 걸 단숨에 깨닫고 도망갔다. 피를 뒤집어쓴 채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아르투르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다.

“인상적이군. 네가 백인을 베었다는 아르투르로군. 난 베오릭이라고 한다.”

눈앞의 사내, 베오릭은 자신만큼 체격이 컸다. 풍성하게 자란 붉은 수염과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불꽃과 같았다. 늑대 가죽으로 만든 두터운 망토를 휘날리는 그는 호기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늘어선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눈빛이 살아있군. 마음에 들어. 남부 놈들 가운덴 너 같은 놈이 드물지. 더 강해질 수 있는 적을 찾아 남부로 내려왔건만, 적이 없어서 실망하던 참이다. 너라면, 만족스럽게 싸울 수 충분하겠어.”

그 때, 은발의 여전사, 힐데군드가 끼어들어서 성을 냈다.

“잠깐, 이놈은 내꺼야. 저번에 싸웠던 놈은 널 줬잖아. 이번엔 내 차례지.”

베오릭은 언짢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안돼. 이놈만큼은 양보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힐데군드는 으르렁거리며 그를 노려봤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그러자 베오릭의 목소리가 불쾌하게 변하더니, 노기를 띄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이 무리의 대장이다. 시키는 대로 해. 내가 널 형제처럼 대우해준다고 기어오르지 마라.”

베오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가운 칼날이 베오릭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힐데군드가 가한 공격이었다. 장난이나 떠보려는 일격 따위가 아니었고, 베오릭이 대검을 들어 쳐냈지만 뺨에 긴 흉터가 남았다. 만약 그의 행동이 조금만 굼떴더라면, 힐데군드의 칼날은 두개골을 그대로 꿰뚫었을 것이다.

“Viltu Leita?”

북구어였기에 아르투르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베오릭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북구어로 고함치며 무기를 내리쳤다.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도전적인 어조에서 욕설과 도발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무기가 두세 번 정도 교차할 쯤, 숨을 고른 아르투르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너희 다 같이 덤비면 될 것 아니냐?”

아르투르의 말에, 검과 방패를 부딪치며 격렬히 싸우던 두 전사가 모두 모욕당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함부로 입을 놀린 대가로 혀를 뽑아가마!”

힐데군드는 고개를 돌려 돌격해왔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치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가진 격렬한 적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두 사람의 호승심에 불을 붙였다. 상대를 꺾고야 말리라!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은 이미 칼이 부딪치기도 전에 치열한 수 싸움을 벌였다. 아르투르의 팔과 검은 모두 힐데군드의 것보다 길었다. 그러니 아르투르가 먼저 공격할 것이다. 하지만 힐데군드에겐 참나무로 만든 두터운 방패가 있으니 막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아르투르의 공격을 쳐내고 나면, 그녀에게도 공격 기회가 주어질 터이다.

‘하지만 그 방패가 내 공격을 견딜 수 있을까?’

대부분의 방패는 그의 공격을 일합도 막아내지 못했고, 막더라도 힘에 짓눌려 방어자가 나가떨어졌다. 아르투르는 호기심과 적대감이 섞인 기묘한 감정을 보이며, 그것이 가능할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야 - !”

아르투르는 힘을 가득 주며 여명을 내리쳤고, 힐데군드도 원형 방패를 내밀어 공격에 대비했다. 불을 뿜는 용의 문양이 조각된 방패였다.

캉 - !

아르투르가 힘에 의지해 검을 내리치는 순간, 힐데군드는 미묘하게 방패를 뒤틀어 힘의 일부를 흘려냈다. 잔존한 힘만으로는 방패를 부술 수도 없었고, 그녀의 자세에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르투르는 자신도 모르게 절로 미소를 지었다. 잇달아 힐데군드의 칼날이 자신의 목, 가슴, 안면을 노리고 잇달아 찔러왔다. 흡사 동시에 세 번의 공격을 가하는 듯한 신속한 공격이었다.

아르투르는 오른손으로 여명의 앞부분을 쥐면서 차례로 공격을 튕겨냈고, 세 번째 일격을 받아낸 뒤엔 어깨로 들이받았다. 체급에서 차이가 나면 힘 싸움은 결과가 뻔했다. 힐데군드도 그걸 알았기에 옆으로 구르며 아르투르를 피해냈고, 오히려 허벅지를 노리고 민첩하게 공격했다.

아르투르는 잽싸게 발걸음을 뒤로 빼면서 주저앉은 힐데군드를 향해 검을 내리쳤고, 그녀는 이번에는 하늘로 잽싸게 뛰면서 공중제비를 돌며 물러났다. 이 모든 움직임이 불과 몇 초 남짓한 시간에 벌어진 결과였다. 경지에 이른 전사들만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눈으로 쫓을 수 있었고, 대부분은 그저 두 달인이 현란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만이 보였다.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는 여자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힐데군드의 칼날이 뺨을 스쳐지나가며 혈흔을 남겼지만, 아르투르는 오히려 호기로운 표정을 지으며 더욱 전투에 흥미를 드러냈다.

“그렇게 말하다 내 해골 술잔이 된 놈이 몇 놈 있거든. 너도 곧 추가 될 거고.”

힐데군드 역시, 전투에 굶주려있던 자신의 본능이 만족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투다운 전투, 노래로 기록되어 전해질만한, 더욱 높은 경지로 자신을 이끌어줄 수 있는 전투! 그것이 자신이 꿈꿔왔던 것이었다. 다른 북구인들은 놀란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을 뿐, 개입 의사는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쯧. 내가 저 상대자였어야 하는데.”

북구인들의 수장인 베오릭과 토르스탄은 입맛을 다셨지만, 끼어들 의사는 없었다. 북구인들은 언제든지 달려들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느낌이었지, 끼어들려는 마음은 없었다. 물론, 전술적으로 보자면 가세해서 아르투르를 쓰러뜨리는 것이 맞았다. 전술적으로 보자면 아르투르가 만만치 않은 강적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으니 그렇게 해야 했다.

“끼어드는 새끼는 내 칼에 뒈질 줄 알아라.”

오히려 수세에 몰려있던 힐데군드가 으르렁거렸다.

북구인들에게 일 대 일 결투란 무의 궁극을 향하는 예술이자, 수행이었다. 동시에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신성한 재판이건만, 재물이나 권력 따위를 위해 그걸 무시하겠다는 건 문명인 놈들이나 저지를 신성 모독이었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한숨도 쉬지 않고 공방을 이어나갔다. 대체로 아르투르가 주도권을 쥐며 밀어붙였지만, 힐데군드는 그때마다 효과적으로 대처하며 반격을 가했다. 힘에서는 아르투르가 우세, 민첩함에선 힐데군드가 우세, 기량은 아르투르의 근소한 우위였다. 이대로 오래도록 쭉 싸웠더라도 결국은 아르투르가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승부는 더욱 급속히 기울었다.

그녀의 검은 여명과 부딪칠 때마다 무뎌져갔고, 어느 샌가 금이 갔다. 사슬을 엮어 만든 그녀의 갑옷은 여명에게 형편없이 꿰뚫렸지만, 두라노의 장인들이 만든 철판 갑옷은 관절부가 아니면 타격조차 줄 수가 없었다.

“쳇.”

결국 힐데군드는 거리를 벌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몸 곳곳에는 잔상처가 가득해서 피가 흘렀고, 이미 갑옷은 헤진 뒤였다. 반면 아르투르는 뺨에 난 상처를 빼면 싸울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것 참 강하군. 끝까지 즐길 수 있겠어.”

아르투르는 호흡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왔다.

“무장을 해제하고 포로가 되겠다면 항복을 받아주지.”

“용의 자손은 노예로 잡히지 않는다!”

힐데군드가 곧장 반격할 자세를 취하려 할 때, 베오릭이 사이로 끼어들며 아르투르에게 대검을 겨누었다.

“자,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날 먼저 상대하는 게 맞겠군. 그녀는 내 동료고, 우리 집단의 우두머리는 나라서 말이지.”

베오릭이 힐데군드의 앞으로 나설 때, 아르투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기야, 저 야만인들은 이미 자신을 포위하고 있었다. 원하면 얼마든지 자신을 포위 공격해올 수 있었다. 다른 일곱 명이 힐데군드의 실력의 반만큼만 되더라도 당해내기 힘들 터였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무인들을 보아온 직감이 말했다. 이 붉은 수염의 사내는 힐데군드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위험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 수는 없어.’

북구인들과의 싸움은 대단히 즐거웠다. 순수한 기량만으로 싸움을 겨뤄서 누가 더 뛰어난 무인인지 증명하고 싶은 호승심이 마음속에 가득 했다. 하지만, 지금은 검술 대련이나 마상 창시합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고, 사람들이 죽고 있었다. 자신은 그들을 지켜야 할 독재관이었고.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는 명백했다. 아르투르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성검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상황이 절박한가?’

분명히 그랬다. 여기서 적들과 싸우다가 자신이 죽거나, 시간이 지체된다면 도시는 함락을 면치 못하리라.

‘성검의 힘을 청할 수 있는, 정당한 싸움인가?’

분명히 세속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자들과의 싸움이지만, 자신이 패배하면 수십만의 무고한 이들이 죽고, 약탈당하고, 노예화되리라. 이것은 정당한 싸움이었다. 결심을 마친 그는 오른손으로 허리춤에 있던 황금의 검을 빼들었다. 황금의 검을 본 북구인들이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부름에 응하라.”

아르투르가 의지를 담아 내뱉은 언령에, 성검은 황금빛 광채를 내뿜으며 공기를 반전시켰다. 하이에버와 겨울산에서 소진되었던 모든 힘들은 시간을 거치며 어느 정도 기능을 되찾은 뒤였다. 베인 상처를 즉각 재생하는 기적까지는 아니어도, 부딪치는 모든 강철을 짚단처럼 베어버리는 힘은 여전히 있었다.

“자, 시간이 없으니 한 놈도 빠짐없이 덤벼라. 오래 상대해줄 순 없으니까.”

그런데 북구인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미지의 힘을 본 모든 적병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에 드러난 표정은 아주 구체적이고, 극대화된 공포였다.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베오릭과 힐데군드뿐이었다.

“맙소사, 저거 실존하는 거였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던 것을 보아서 놀란 힐데군드의 말과 달리, 베오릭의 탄식에는 회한과 무기력함으로 가득한, 절망이 담겨있었다.

“마침내 예언된 검이 다시 지상으로 나왔구나. 우리 시대에 신들의 황혼이, 세상의 종말이 벌어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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