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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조레스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는 이런 일을 농담으로 할 경박할 자도 아니었고, 이런 말로 정치적 의향을 떠볼 사람도 못되었다. 즉, 그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군주가 되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 도시에서 자란 자네가 군주정이 무엇일지 알 것 같진 않네만. 그건 생각보다 답답한 체제야.”
또렷한 목소리로 답하는 조레스.
“저는 올해로 스물 둘입니다. 이미 세상 물정을 알쯤에는 루드비코 놈의 참주정이었죠. 하지만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 전의 자유도시 시절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린가? 대체로 많은 시민들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닌가?”
쓴웃음을 짓는 조레스.
“마스터 에렌 같은 상공업자들은 그렇겠지요. 제 아버지는 이미 자유도시 말기에 땅을 잃고 소작농이 되셨습니다. 힘 있고 부유한 자들이 헐값에 땅을 사들이고 거부하면 깡패들을 고용해서 내쫓았으니까요.”
“군주정에선 선거로 지도자를 뽑지 않네. 내 아들, 아들이 없다면 딸이 뒤를 이을 걸세. 내 자식이 자네 마음에 든다는 보장도 없고.”
조레스는 냉소를 머금었다.
“선거, 선거라. 자유도시 말기에 이미 선거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지역 유력자들은 돈으로 표를 샀고, 거부하면 암살자를 보내 본보기를 보였습니다. 그게 무슨 민의입니까? 부유층은 루드비코가 나라가 잘 돌아가고 모두가 행복하던 공화국을 한 명의 참주가 무너뜨렸다고 기억하겠지요. 하지만 루드비코는 단지 그들 가운데 가장 잔혹하고 강한 자였을 뿐, 자유 도시의 혼란이 그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겐 참주정이나 자유 도시 말기나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런 놈들에게 저희를 맡기느니 차라리 공과 공의 자손에게 충성을 바치고 싶습니다. 제 친구들도 다 똑같이 생각합니다.”
아르투르는 기뻤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생겨서 얻어지는 이득도 이득이지만, 그전에 자신의 공로가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조레스는 아르투르의 표정을 긍정으로 이해하고 신이 나서 생각해두었던 것을 더 올렸다.
“칭호는 무엇이 좋겠습니까? 마땅히 아르투르 공에겐 왕이 어울릴 것입니다. 으음, 하지만… 주변에서 두라노 영토만 가지고 왕이라고 인정해줄 수는 없으니, 공작 정도는 어떻습니까? 아니지. 공작도 너무 낮고… 대공 정도가 좋을 것 같군요.”
“하하하. 고맙네. 조레스. 하지만 난 두라노의 왕이건 대공이 될 생각이 없네. 적어도 지금은.”
“예? 하지만…”
“그래. 자네 마음은 내가 잘 알아. 그러니 꼭 기억해두겠네. 남자는 진정으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가까이 두지. 나를 이렇게까지 인정해준 사람은 별로 없어. 그리고 흔들림 없는 평화가 세워져서 가족, 이웃들과 잘 살기를 원하는 자네의 뜻도 잘 아네.”
조레스는 다른 유력자들과 원하는 것이 전혀 달랐다. 더 넓고 강력한 국가에 대한 애국심,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자부심, 사후의 구원.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으러나가고, 저녁에 돌아와 아내가 만들어준 빵과 스프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평범한 삶이 그가 바라는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야. 내가 떠나고나면, 자네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만 하네. 그러니 날 보고 잘 배우게. 무엇이든 가르쳐줄테니.”
“하지만… 저는 일개 농부일뿐입니다. 능력의 한계가 뻔하죠. 농사일엔 빠삭하고, 글도 알고 다른 도시에 판매차 방문한 적도 있어서 제 고향에선 가장 똑똑한 놈이지만은… 그것뿐입니다. 공처럼 군대를 지휘하거나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어려운 지식은 모릅니다.”
하지만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조레스를 보며, 아르투르는 웃어보였을 뿐이다.
“사람을 이끌 줄 아는 것! 그게 지도자의 모든 능력이라네. 나머지는 배우거나 남에게 맡기면 돼. 만약 자네가 진정으로 내 가문이 그대들을 통치해주길 바란다면, 우선 두라노에서 가장 인망 있는 지도자가 되게. 그렇게 해서, 두라노 시민들의 뜻을 모아오면 그때는 수락하도록 하지.”
아르투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계를 서는 병사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지쳐있었지만 필사적으로 힘을 쥐어짜내 순찰을 도는 모습이 보였다.
“보이나? 그들이 도시에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저렇게 필사적으로 싸우진 않았을 거야. 가족들과 함께 달아날 방도를 모색했겠지. 이곳은 그들의 도시고, 그들의 고향이라네. 그것을 강제로 빼앗고 싶지는 않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민의가 준비되면 기꺼이 군주가 되어 주시겠다는 거지요?”
“그래. 하지만 지금은 적들을 막는 게 더욱 시급할 것 같군. 너무 오래 쉬었네. 전투 준비를 하러가자고.”
***
그 날 새벽, 아르투르가 성벽 너머에 바리케이트 건설 작업을 지휘하고 있을 때 적들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도시의 네 방향에 모두 배치가 끝난 대포들이 탄환을 쏘아내며 천둥소리를 냈다. 잠들어 있다가 깬 두라노의 신병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으아아악! 성벽이 무너진다! 악마, 악마의 마법이다!”
“2차 방어선으로! 바리케이트로 도망가!”
침착하게 벗어나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잠들어있을 때의 급습이었고, 화약 무기가 내는 소음은 처음 듣는 이들에게 공포감을 유발했다. 그들은 허둥대며 먼저 빠져나가기 위해서 서로를 밀차다가 엉켜버렸고, 압사당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아르투르가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이런 상황이 도시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중이었다. 쉬지 않고 터지는 굉음이 일어날 때마다 육중한 탄환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사정없이 건물을 부수어댔다. 성벽과 방어탑, 민간인 거주구역을 가리지 않고 부딪히는 건물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시내에 배치된 투석기들이 반격을 가했지만 그 위력은 초라할 따름이었다.
이런 상황을 수습하기도 바쁜 참에, 시내에서 불길이 일었다. 성 내에 잠입해있던 적병의 방화인지, 사고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시라노! 정예병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랑트리뷔아체 놈들을 막게! 조레스, 자네는 내 군기를 가지고 북쪽으로 가서 피오렌치아 놈들을 상대하게.”
남쪽과 북쪽은 적병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으니, 현지 수비대가 잘 버텨 주리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불길이 도시의 보급창으로라도 번진다면 끝장이었다. 에쿠잘루스에 올라 화재 현장으로 달려간 아르투르는 신속하게 임시 소방대를 조직한 뒤, 체계적인 진화 작업에 나섰다.
“우왕좌왕하지마라! 침착하게 대응하라! 노약자들은 물을 길어오고, 장정들은 화재 현장으로 진입하도록! 겁먹지 마라! 이것도 전쟁의 일부다! 목숨을 걸고 해내!”
그가 한창 진화 작업을 지휘하고 있을 때, 동서남북의 전령들이 달려와 모두 급보를 전했다.
“북쪽에서 적들이 공격해옵니다! 적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서쪽에서 랑트리뷔아체의 대군이 진입중입니다! 놈들이 진입하면 끝장입니다. 도와주십시오!”
“남쪽과 북쪽도 다급한 상황입니다! 예비대를 보내주십시오!”
하지만 아르투르는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모두 진정해라. 적들이 수는 많겠지만 실제로 들어올 수 있는 건 소수에 불과하다. 각지는 우선 성벽 잔해에서 버티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는 바리케이트에 의존해 시가전을 펼쳐라. 차분하게 방어전을 펼치면 막을 수 있어.”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니 전령들도 흥분하는 게 당연했다. 모두가 자신이 있는 곳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하겠지만, 그 중에 진짜 위험한 곳을 골라내는 것이야말로 지휘관의 역할이었다. 아르투르는 자신은 마저 화재 작업을 지휘하는 한편, 마지막 남은 잔여 병력의 투입지로 정했다.
“서쪽으로 가서 랑트리뷔아체 놈들을 막아라! 결코 시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 화재를 진압한 후, 내가 직접 가겠다!”
아르투르의 판단은 서쪽이었다. 그쪽이 가장 수가 많고 위험했다. 피오렌치아는 수만 많은 거품 군대고, 나머지 둘은 나름 강할지언정 공성전의 방어자를 압도할 정도의 수는 되지 못했다. 이 공성전의 시작과 끝은 모두 서쪽 방면의 전투가 핵심이 될 터였다.
곧 화재를 완전히 진압한 아르투르는 각 방면의 보고를 받았다.
“북쪽, 피오렌치아 놈들이 독재관님의 깃발을 두려워해서 전진을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잘 버틸 수 있겠습니다.”
“동쪽에서 오는 카니아 인들은 봐줄만하게 싸우지만, 수가 적습니다. 성벽을 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서쪽의 공세가 매섭습니다. 몇 번 돌파될 뻔했지만, 그 때 보내주신 예비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시라노 경이 앞장서서 무용을 떨치고 있으니 얼마간은 버틸 겁니다.”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예상대로였다. 이제 남쪽이 무사하단 소식만 들은 후, 서쪽으로 자신이 직접 가서 랑트리뷔아체 군을 내몰면 이번 공격도 무사히 막을 수 있을 터였다.
“독재관 각하! 남쪽이 함락 직전입니다! 성문이 돌파되었고, 바리케이트도 무용지물입니다!”
“뭐라고?!”
위협이 서쪽이 아니라 남쪽이라니, 제라니아 군대는 잘 쳐줘도 중간 급 군대였다. 아무리 대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들, 이렇게 단기간에 돌파해냈을 리가 없었다.
“야만인들이 성벽을 타넘고 들어와 동료들을 마구 죽이고 있습니다! 특히 그들의 대장인 붉은 수염의 악마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여러 수비대장들이 나섰지만 채 삽시간에 죽어버리더군요. 이대로면 몰살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르투르는 곧장 에쿠잘루스에 올라서 남쪽으로 내달렸다. 서쪽도 결코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겠지만, 시라노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혼자서 전황을 바꿔?’
***
“으하하하! 이거 장관이구나!”
소위 야만인들. 문명지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도시의 부와 화려함은 항상 탐이 나지만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이었다.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었던 자들을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다는 기대감은 광신적인 돌격으로 이어졌고, 허무하리만치 두라노의 수비병들이 쉽게 무너진 까닭이었다. 성벽이 무너진 이상, 목숨을 아끼지 않는 야만인을 도시에서 편히 자란 문명인들이 이겨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거 너무 쉬운데.”
베오릭은 자신에게 용감히 달려드는 적병을 왼손의 도끼로 아무렇지도 않게 쳐서 죽였다. 이야만인 부대는 양측 군대가 격전을 벌여온 지난 몇일 간 편히 쉬며 기력을 비축해둔 뒤였다. 제라니아 참주 데로드가 그들을 비장의 한 수로 남겨두었던 까닭이다.
베오릭과 그를 따르는 일곱 북구인 전사들은 다른 야만인 병사들조차 두려워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에게 서로 웃고 떠들면서 적들을 도륙해나갔는데, 그 와중에도 조금의 틈도 내보이질 않았다. 기껏 상처를 입혀봐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더욱 난폭하게 날뛰는 광전사들이었다.
“그래서 아르투르란 놈은 어디 있나? 한번 붙어보고 싶은데. 이건 다 샌님들이고.”
여전사는 자신에게 동시에 칼을 내지른 세 병사의 공격을 방패로 막더니, 쭉 힘으로 밀어내서 그들을 밀쳐버렸다. 그리고 차례로 심장을 찔러 죽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룬문자가 새겨진 장검을 한번 공중에서 휘릭 돌리고는 주변을 돌아봤다.
“기사 놈들은 잘 싸우는 편이었네?”
“내가 말했잖아. 문명인들 가운데선 그놈들 이길 놈들이 없다고.”
한숨을 쉬는 여전사.
“쯧. 일 분도 못 버티던 그놈들이 최고 수준이라니. 한심한데.”
베오릭은 시체의 산 위에 앉아, 웃음을 섞어 말했다.
“힐데군드. 방심하지 마. 그러다가 한 번에 간다?”
대답을 한 자는 가장 덩치 큰 사내, 토르스탄이였다. 그는 두개골에서 도끼를 거칠게 뽑아들었다.
“껄껄. 뭐 죽으면 어때서. 죽은 전사들에겐 신들의 만찬장이 기다리고 있건만. 그보다, 약탈은 언제 허용 해줄 거냐? 저놈들은 이미 시작했는데, 가져갈 돈이랑 여자가 하나도 안 남겠는데.”
“너도 그런 건 슬슬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 아, 저기 봐라. 우리가 기다리던 놈이 오는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아르투르를 보며 베오릭은 씩 웃었다. 다른 북구인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침내 싸워 볼만한 적수가 나타났음을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