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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96화 (9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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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자도 용병이니 저런 자를 상대하는 임무에는 추가적인 보수를 요구할 거요. 값은 싸지 않을 거고 여러분이 지불해주었으면 하오. 물론, 내게도 보상을 좀 줘야겠고.”

기가 찬 표정의 굴리엘모.

“애초에 부채 탕감의 조건이 참전이었지 않소? 그렇다면 당연히 성실히 싸워야 할 것 아닙니까?”

능청스런 태도를 취하는 데로드.

“누가 성실히 싸우지 않겠다고 했나? 상황이 변했으니 보상을 더 달라는 거지. 아니면 당신네, 피오렌치아 인들로 저 자를 상대해보던가.”

피오레 가문의 한심한 군사력을 본 데로드는 더 이상 피오레 가문을 옛날처럼 어려워하지는 않았다. 피오레 가문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겠지만, 생각해보니 딱히 두려워 할 이유도 없었다. 카니아의 대표는 그들의 알력 다툼을 뒤로 하고 안건에 집중했다.

“그 자가 뭐하는 자인지나 들어보죠.”

“여러분이 궁금해할까봐 직접 데려왔소. 들어오게. 베오릭.”

이윽고, 막사 안으로 잘 무장한 전사들이 들어왔다. 전사들의 숫자는 모두 여덟이었고 한 명 한 명이 무척 체격이 컸으며, 무척 도전적이고 사나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몸 곳곳에 흉터가 있는 그들은 한 눈에 보아도 역전의 용사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어디 내놓아도 눈에 시선을 받을만한 대단한 전사들이었지만, 그들 가운데서도 세 명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가장 덩치가 커서, 정말로 곰 만한 체격을 지닌 거인과 머리를 땋고 있는 전사 집단에 소속되어있는 여전사, 그리고 부리부리한 코와 붉은 머리칼을 지닌 용문신의 사내였다.

굴리엘모는 인상적이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참주 데로드. 당신이 야만인들을 길러서 근위대로 삼는다고 들었데는데, 이들인가 보군요.”

피식 웃는 데로드.

“도련님, 말조심 하는 게 좋을 걸세. 이 친구들도 우리말을 할 줄 알거든.”

“그렇다면 우리 관습도 알겠지요. 먹이를 주는 주인을 무는 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때 굴리엘모의 손가락 사이로 순식간에 단검이 내리찍어졌고, 책상이 두 동강이 나 버렸다. 호위병들이 개입할 틈도 없었다. 뒤늦게 호위병들이 무기를 뽑아들려고 했지만, 굴리엘모가 굳은 태도로 손을 저었다.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씩 웃더니 다가와서 단검을 삽시간에 빼들며 내려다보았다.

“어이, 도련님. 돈 주면 주인이라는 건 너희 나약한 문명인들 생각이고. 우리 동네에서 그런건 조공이라고 불러. 궁금하면 시험해볼까?”

“감히 이 분이 누군 줄 알고…!”

“뭐긴, 돈만 많은 호구새끼지.”

“뭐야?”

호위병들이 발끈하려는 순간, 굴리엘모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는 오만한 자였지만, 돈으로 통제가 되는 인물과 아닌 인물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이놈들은 목숨을 전혀 아끼지 않는 놈들이니, 위협은 아무 소용도 없을 터이다.

‘언젠가 무례에 대한 대가는 받아내고 말테다.’

그 사이, 붉은 머리의 사내가 덩치 큰 사내를 끌어당기며 공용어로 말했다. 좌중에 들으라는 의도가 명백했다.

“토르스탄! 그쯤 해! 도련님들 우시겠다.”

붉은 머리의 사내에 말에 일행들이 껄껄 웃었고 그는 실실 웃으면서 굴리엘모의 앞에 서서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그의 공용어는 북구인 억양이 아주 강했다.

“도련님이 좀 이해해. 우리는 목숨 아낄 줄 모르는 야만인들이라 이 동네 예의 같은 건 안 차리거든. 참주 아저씨도 그건 양해해주기로 했고. 맞지?”

참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참주도 이들을 대하는 게 쉽지 않아했고 이 붉은 머리의 청년은 이들의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그는 굴리엘모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린 앞으로도 이런 태도로 일할거야. 싫으면 그냥 가고. 아니면 손잡고.”

굴리엘모는 처음에는 표정을 구기더니, 금세 상인 귀족다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그래. 잘 부탁하지. 너희들이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건, 사생아 왕자 놈의 목을 가져오면 평생 가져본 적 없는 보상을 내려주마. 그건 너희도 관심이 있을 테지?”

“말이 좀 통하네. 잘 부탁해. 내 이름은 베오릭이라고 해.”

“위대한 오르마델로의 아들이자 피오레 가문의 후계자, 굴리엘모다.”

베오릭은 뭔가 잊고 있다가 떠올렸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아! 너희 문명인들은 부모의 업적이 자기 건 줄 안다고 했지? 그걸 깜빡했네. 나는 빙하의 여왕, 안스겔리아의 아들이다. 예의는 안 차려도 돼. 아버지가 다른 형제만 열 한 명이거든.”

베오릭의 말은 비아냥거림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굴리엘모는 애써 연기하며 참아 넘겼다. 아무튼, 단기간에 두라노를 함락시키려면 아르투르를 쓰러뜨려야만 했고 그러려면 뭐라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란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아르투는 자신조차 믿기지 않는 승리를 거둔 후였지만, 여전히 상황이 나쁘다는 걸 알았다. 적들은 너무 많았고, 보급도 잘 받았다. 병사들은 자신의 무용에 희망을 얻고, 무너진 성벽을 보며 두려워했다. 결국 원점이었다.

그는 사령관으로서의 일은 조레스와 시라노에게 맡겨둔 채, 성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이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생각만이나마 좀 벗어나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크게 지쳐 있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어디로 갈까? 원래 가려던 아발로니아로 가서 엘라카르시스를 만나고, 검의 비밀을 풀어볼까?

아니면 그 여정은 조금 미루고, 넓은 세상을 여행해보는 것도 좋을 터이다. 견문도 넓히고, 인생의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었다. 레무리아 반도에서 배를 타고 동방으로 떠나는 건 어떨까? 동방 대륙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었다. 반인반마의 기마 민족이 말을 내달리는 끝없는 초원의 바다가 있었고 열사의 사막을 건너면 오아시스에 사는 부유한 상인들이 있었다.

그렇게 먼 여정을 떠나면 구세주 발타리아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계시를 받고, 종국에는 그곳에서 승천했다는 성스러운 묘지가 있었다.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곳에 도달하는 자는 기적을 목격하게 되리라고 했다. 냉소적인 귀족들은 그걸 헛소문으로 치부했지만, 열렬히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은 둘 다 아니니 한번 쯤 가보는 것도 좋으리라.

한편, 고대의 신비가 남아있다는 북방은 어떨까? 그곳에는 구세주가 도래하기 전의 옛 신과 마귀들, 이종족들이 가득 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곳의 삶은 척박한 지, 북방에선 끊임없이 약탈자들이 내려오곤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용의 후예, 그림니르라 부르면서 문명인들을 먹이로 삼아 번성하곤 했다. 아, 비유적인 의미다. 정말로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은 드물었다.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두 세대에 걸쳐 문명인들의 대표로서 그들과 싸웠고, 끝끝내 승리하셨지. 그 덕에 왕이 되셨던 거고.’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은 그 북구인들의 후예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땅이 어떤 곳인지 보았으니, 어머니의 고향이 어떤 곳인지도 알고 싶었다. 혹한의 땅에 사는 북구인들은 모두가 강인한 전사들이며,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검과 방패를 들고 자신들을 지킨다고 했다.

‘과연 여인의 몸으로 남자들과 무력으로 맞서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모를 일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단지 아버지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그분은 가장 뛰어난 기사들과도 견줄 수 있는 위대한 전사였고, 강인한 만큼이나 아름다운 분이라고 했다. 한때는 그저 술집 창부인 어머니를 두었다는 것을 말해주기 싫어서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머리가 굵고 보니 그 말만큼은 사실로 보였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교도 사생아라고 불렀으니까.

‘아버지가 말한 것 같은 분이면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테지. 어머니는 정말로 어떤 분일까?’

어머니가 어떤 분일지 생각해보는 건 잠시나마 아주 행복한 상상이었다. 실제로 만나보면 기대와 다를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아르투르는 스스로를 즐거운 상상 속에서 깨워내, 현실의 공성중인 두라노로 돌아왔다. 아르투르의 눈에는 우물에 물을 길러 가는 소년 소녀들의 행렬이 보였다. 그들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지치고, 공포에 떨고 있건만 아이들은 여전하구나.’

아르투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실은 아르투르도 얼마 전부터 잠자리가 편치는 않았다. 자기가 직접 죽인 자들은 천 명은 진즉에 넘었을 것이다. 자신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쓰러져 갔던 그들이 모두 죽어야만 했던 자들일까? 전장이 아닌 곳에서 만났더라면 대화로 잘 풀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도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의 아들이지 않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싸움의 이유에 회의가 들던 것도 사실이지만, 저런 아이들을 볼 때면 회의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전쟁의 참상에서 아이들을 구할 수 있다면,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할까. 얼마나 그들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을 까, 부관, 조레스가 와서 고개를 숙였다.

“지시하신 사항은 모두 이행했습니다. 독재관 각하.”

그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아르투르와 비슷한 연배의 청년으로, 남자답게 잘생긴 호쾌한 청년이었다. 오랜 밭일과 운동으로 단련된 그의 근육질 몸매는 마을 처녀들의 시선을 한 눈에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고생이 많았네. 병사들의 반응은 어떤가?”

“일단은 모두 진정했습니다. 하지만 저 신 무기, 대포를 악마의 마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새로운 기술일 뿐이라도 설명해줘도 잘 믿지 않더군요. 항복하자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건 모두 독재관 각하 덕분입니다.”

“그렇군. 얼마 전까지 서로 창칼을 겨누던 자들도 적지 않을 텐데, 그들끼리 내분을 벌일 기미는 없는가?”

조레스는 침착히 답한다.

“말씀하신대로 그 점도 살폈습니다. 시라노와 에렌 의원, 그리고 참주의 아들, 이름이 베르나르도던가요? 그 세 명이 잘해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내분의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들 똘똘 뭉쳐있더군요. 이번 일이 끝나면 또 싸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르투르는 조레스의 말에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가, 한숨을 쉬었다.

“뭐, 내가 그 친구들 입장이라도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긴 어려울 걸세. 루드비코는 원망을 듣는 폭군이었지만 자기 지지자는 챙겼고, 레말리트의 동지들은 고결한 대의를 내세웠지만 복수를 앞세우다보니 적이 많았지. 에렌은 모두가 좋은 사람이란 건 인정하지만 난국을 이끌 지도력은 없고. 내가 떠나고도 그들을 통합할 만한 인물이 필요해.”

조레스는 손을 들어 턱을 몇 번 매만지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르투르 공께서 두라노의 군주가 되실까봐 두려워하지요.”

아르투르는 억울한 듯 소리쳤다.

“그건 당치도 않은 말이네. 그 자리를 원했다면 애초에 레말리트에게 정권을 왜 넘겨주었겠나? 루드비코를 처치하고 그 자리를 내가 차지했겠지.”

조레스는 그제야,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말을 꺼내들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같이 무식한 놈도 압니다. 아르투르 공만이 저희 두라노 민중을 진심으로 구할 힘과 의지를 모두 가지신 분이라는 걸요. 한낱 농노를 위해 결투 재판을 벌인 기사가 있다고 할 때,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음유시인들이 돈 받고 꾸며내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공께선 정말로 그걸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르투르는 침묵 속에 조레스를 바라봤다.

“기사들의 명예란 오직 귀족들 만에만 통용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공은 항상 그것을 지키시더군요. 누구를 대하든지요. 혹여나 제가 아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성격이 지랄 맞아서 그런 건 못합니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진심입니다. 아르투르 공은 언제든지 이 도시의 절대 권력자가 될 수 있으셨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제력과 현명함을 갖추셨다는 뜻이죠. 권력자에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조레스는 불쑥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아르투르 공을 두라노의 군주로 추대하고 싶습니다. 공의 의향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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